옹달샘한희철 › 779.눈 내린 마을

한희철 | 2002.01.02 21:19: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한희철779.눈 내린 마을


마을을 전설 속에라도 묻으려는 듯 싫도록 눈이 내렸다. 낮고 낮은 하늘의 입맞춤. 하늘은 사방 눈으로 내려 땅을 감쌌다. 한없는 푸근함. 그러고 보면 한 마을은 커다란 둥지, 저마다 움막 속에 살지만 문득 그렇게 하나였다.
담장 밑 높다랗게 쌓인 장작더미가 큰 재산처럼 넉넉해 뵈고, 한 더미 장작을 아궁이에 던진 어른들은 인심 좋고 손맛 좋은 집으로 모여 시간을 잊고, 아이들은 빨려들 듯 눈속을 달린다.  그렇다. 눈은 아이들을 부르고 아이들은 그 부름을 안다. 여기저기 눈사람이 세워지고 곳곳에 싫지 않은 눈싸움이 벌어진다.
아이들은 놀이의 천재. 집집마다 흔한 비료부대 하나씩을 들고 모여 눈썰매를 탄다. 어디에도 흔한 짚가리. 비료 부대 안에 짚단을 넣으니 푹신한 눈썰매가 되고 마을 어귀 논으로 내려서는 논둑은 천연의 눈썰매장이 된다.
여차하면 논바닥에 굴러 박힐 것 같은 위험을 아이들은 잘도 피한다. 아이들 엉덩이는 갈수록 젖어가고 반질반질 언덕은 갈수록 윤이 난다. 머뭇거리다가 뒷사람과 부딪혀 한데 뒹굴어도 일어설 땐 모두가 웃음이고, 꼬리에 꼬리, 부대 하나에 엉덩이를 땡겨 둘이 셋이 올라타기도 한다.
방해하지 않으려 천천히 내린 어둠. 망설이는 어둠이 얼굴 사이로 할 수 없이 내릴 때 그제야 아이들은 아쉬움으로 돌아서고 그러면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흰 연기. 어둠과 흰 연기 편안하게 섞일 때 마을은 또 한번의 커다란 둥지, 모두를 같은 품으로 감싼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전설 속 한 사물로라도 잊혀지고 싶은 하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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