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1285. 농사 짓기가 겁이 나네유

한희철 | 2002.01.02 21:19: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한희철1285. 농사 짓기가 겁이 나네유

 

올핸 처음 당근 가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봄이 되어 밭을 갈고 씨를 뿌렸는데 시간이 지나도 싹이 나질 않았다. 가물대로 가문 땅, 다시 갈고 다시 심고 두 번 세 번 같은 일을 해야 했다. 

고생과 걱정 끝에 고마운 싹이 났고, 고마운운 마음으로 정성으로 키웠다. 뜨거운 볕아래 쪼그리고 앉아 김도 서너 번 맸고 쑥쑥 잘 크라고 비료도 몇차례 껸졌다. 싹이 늦게 나긴 했지만 그런대로 당근은 잘 자라 평년작은 되었다. 강가 그 넓은 밭들이 당근잎으로 초록빛 물결로 아름다웠다.

올핸 얼마나 받을까, 누구에게 팔까, 돈 받으면 급하게 가릴 것이 이것 저것 또 무엇이 있지, 모두들 마음이 그랬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때가 되었는데도 아무도 당근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예년 같으면 벌써 값을 흥정하고 이 밭 내게 팔으라 선금도 오갔을텐데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다니.

그래도 설마 - 하여 기다렸는데 설마는 결국 설마로 끝나고 말았다. 당근은 하나 둘 썩어가기 시작했고 결국은 길아 엎을 수밖에 없었다.

말이 쉬 안 나오는 얘기지만 별수가 없었다.두 번 세 번 뿌린 씨 값만 해도 만만치 않고 비료값, 품값, 게다가 가을이면 물어야 할 도지······ 

무심하게 밭을 갈아 엎어야 했다. 고생으로 갈 키운 자식같은 당근들을 도리없이 갈다 엎어야 했다. 뻘겋게 드러난 당근들, 정말 밭이 뻘겋게 피를 흘렸고, 밭에 땀을 쏟은 이들도 피눈물을 흘렸다.

그 속에 주일이 되었고 아침 열시, 교우들은 모였다. 고만 와도 좋을 비는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가라앉은 마음, 젖은 마음 위로 내리는 비는 찬비였다. 

설교 시간, 말문이 쉽게 트이지를 않았다. 

고만고만 앉아 있는 교우들, 앞자리의 조숙원성도, 이서흠성도. 허석분 할머니, 이필로 속장, 지금순집사, 김을순집사, 모두들 당근을 갈아 엎은 아들이다. 남의 땅 빌린 것까지 이천육백평을 고스란히 갈아엎은 이필로 속장,

조숭원 성도는 1800평, 허석분 할머니는 아픔몸을 참아가며 고생에 고생을 했는데, 게다가 여전히 내리는 비는당근 갈아엎고 심은 가을 무씨마저 지워내고 있을 터이니...

“정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말 그랬다. 그래도 주일이라고 예배 드리러 온 교우들의 모습은 내내는 눈물겨웠고, 그 지경이 되도록 어디 판로를 뚫지 못한 내 무능력은 죄스러웠다.

제단에 서서 마음이 무너질 때, “괜찮아유, 목사님. 이럴때두 있구, 지럴 때두 있는거지유.”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조숙원 성도였다.

믿기 시작한 지 1년밖에 안 된, 당근밭에 들어간 돈만 백만원이 넘는다는 그였다. 겉사람 (육신이라 해도 좋고 삶의 조건 혹은 환경이라 해도 좋겠다)은 후패해도(낡아가도, 무너져도) 속사람이 새롭다.(고후4:16)는 말씀을 소개하며 위로를 권했다. 

예배를 마치고 작실로 올라가는 길, 조숙원 성도가 속내를 털어 놓는다.

“일이 이르케 되니 증말 힘이 읍서유. 너무 실망스럽구유. 갈수룩 일이 이르케 되는 게 아닌가 싶은 게, 농사 짓기가 겁이 나네유.”

(얘기마을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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