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임의진 › [시골편지]무와 무관심

임의진 | 2017.08.09 15:10:3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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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코롬바키 못허겄능가? 조깐 얌전허게 묶어보랑께.” 뽑혀 올라온 무와 무단을 보고 동네 누구씨가 순한 마누라를 족치는 소리. 간밤에 달궈진 불기가 남은 아궁이며 굴뚝, 보일러들이 동시에 쿨럭거리고, 식은 자리에 태양과 숲의 온기가 차츰 쌓이기 시작한다.

김소형 시인의 따끈한 시집 <숲>을 읽었는데 ‘십일월’이란 시가 바로 이때로구나. “나한테 묻지 마. 시간은 결코 좋아지는 법이 없어.” 시간뿐만 아니라 시절도 그러한 모양이 분명해. 누가 물대포에 죽어나가도, 누가 실직하고 서러워도 대답은 일월이나 십일월이나 마찬가지. “묻지 마 바쁘다니깐, 나는 시계처럼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관심으로 가득찬 이 우주에 신은 오늘도 아이를 점지하고 아이를 낳으시고. 저 가련한 집닭의 똥 묻은 달걀까지도 쑹쑹 태어나고 있음이렷다.

남정네 허벅지만 한 무를 뽑아 수확되는 시기. 이 싸늘한 무관심의 세상에 ‘있을 무’가 엄연히 존재하누나. 처녀귀신을 위한 총각김치만이 냉혈한 세상을 구할 유일한 명약인가. 하얀 무들이 뽑혀 누워 있는 밭들. 이처럼 긴 딜레이의 시간. 기다려도 기다려 봐도 오지 않는 첫눈이여. 물 빠진 검은색인 잿빛의 우울에서 구해낼 무와 폭설을 대망한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달아도 될 것처럼 새빨갛고 맛있는 깍두기도 반가워라. 무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다. 봄날의 노란 단무지. 무를 나눠 먹으며 무관심과 싸우다보면 달고 따스운 삼사월이 성큼 오려나.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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