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임의진 › [시골편지] 영혼이 찾아온 날

임의진 | 2020.05.08 23:18:4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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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강의하러 간 김에 친구 얼굴 한번 보려고 방문했는데, 바쁜 일처리로 볼이 빨개 있었다. 같이들 마시라며 커피를 사서 넣어주고 뒤돌아섰다. 나는 다음 역까지 한참이나 걸었다. 영혼보다 빨리 달려가는 바쁜 몸들,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량들. 내뿜는 한숨과 매연에 얼른 이 산골로 돌아오고 싶었다.
구절초가 꽃 잔치를 벌이고 있다. 연보라 꽃송이에 꿀벌들이 달라붙어 쪽쪽대는 소리가 요란도 하지. 10월은 구근 식물 옮겨심기에 적기다. 젖먹이들을 물어 옮기는 어미 개나 고양이처럼 여러해살이식물들을 옮기고 새 보금자리를 지정해준다. 후일에도 내 정원은 꽃과 여러 식물들로 나와 손님들을 기쁘게 맞아줄 것이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소중히 달라붙어 안전하게 잘 지낼 수 있는 곳. 정신 차리기에 좋은 곳을 사람도 ‘가지고, 가꾸고’ 해야 한다. 하루쯤 시간을 내어 풀을 뽑고, 꽃대를 잡아주고, 따뜻한 국화차를 내어 마시면서 살아야 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올가 토카르추크는 화가 요안나 콘세이요와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책을 냈다. 너무 바쁘게 산 ‘얀’이라는 이름의 남자 주인공. 어느 날 자신이 누구인지 과거를 깡그리 기억 못하게 된다. 의사에게 찾아갔는데, 병명은 ‘영혼을 잃음’. 2~3년 전에 갔던 데를 찾아가거나 어디 한적한 곳에 기다리면 혹시 영혼이 되돌아올지도. 얀은 변두리 시골에 집을 구해 영혼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어느 날 대문을 쿵쿵 두드리며 영혼이 돌아왔다. 얀은 다시 영혼을 잃지 않고자 시계와 트렁크 따위를 마당에 묻어버린다. 시계자리에선 종모양의 꽃이 자라고, 트렁크에선 호박이 열려 담을 타고 넘어갔다.
그림책이 좋아 침대에 껴안고 꿀잠을 잤다. 내게도 영혼이 찾아온 기쁜 날이었다. ‘하루쯤 시간을 내서 봐요’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사실 내가 조르고 바쁜 그들이 만나주는 세월. 친구도 순위가 있을 텐데, 돈벌이가 시원찮다보니 천덕꾸러기인가봐. 내 영혼이나 자주 만나야지 그럼.
임의진 목사·시인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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