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임의진 › [시골편지] 노루 궁뎅이

임의진 | 2020.04.03 21:46:2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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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 올 테야. 산고개 너머로 토끼가 뛰고 노루도 뛰어넘는다. 깊고 큰 산이 뒤로 쭉 늘어져 있는데, 호랑이만 없고 다 사는 거 같다. 노루 엄마와 아기가 행차를 하는 날엔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나도 숨을 꾹 눌러 참게 된다. 산비탈은 미끄럼틀이고 칡넝쿨은 천연 그네. 동물원 식물원 찾아갈 필요가 없다. 미국에 다녀온 할매에게 물었다.

“어디가 가장 재밌으셨나요?”

“으응. 디질년들이라고 아시오? 거기가 참말로 재미지고 좋등마.”

“아아. 디즈니랜드.”

“암만 좋대도 울 동리만 하겄소. 사람이 말이 통해야 쓰재잉. 당최 귀머거리론 못 살재.”

동네는 흥미만점 디즈니 수준. 거기다가 소일거리 밭일거리 손발이 착착 맞는 이웃들이 있다. 연장 창고에는 노루발못뽑이가 있고, 뒷산 언저리엔 노루발자국이 선명하다. 소들이 사는 아랫동네 우사엔 소들이 항상 웃는 낯. 소 우자를 써서 ‘우하하’ 웃는다. 강아지와 송아지가 뛰노는 풀섶엔 무당벌레가 기지개를 켜고 비행을 준비 중. 뭐든 제자리에 있을 때, 제 할 일을 하며 지낼 때 동네가 평안하다. 개도 똥을 늘 싸는 곳에 누고, 노루똥도 늘 같은 곳에만 보인다. 고라니와 노루는 울음소리도 다르고 얼굴 생김도 달라. 우는 건 알지만 웃는 건 모르겠다. 옛날에 아버지가 충청도 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오셨는데, 아무리 웃기는 얘길 해도 반응이 싸늘하여 여쭤보니 “집에 가서 웃을라는디유.” 그랬다나 어쨌대나. 노루는 항상 웃는 표정이다. 궁뎅이는 하얀 털로 하트자가 새겨져 있다. 사랑을 아는 놈임이 분명해. 노루가 행복하면 산이 왼통 행복으로 물든다.
노루 궁뎅이를 보면 재수가 좋다 해서 산사람들은 비손을 모으고 합장. 칡 캐러 산을 타는 이들이 지렛대로 삼고자 노루발못뽑이, 속칭 ‘빠루’를 챙겨간다. 이 빠루가 네 빠루냐, 산신령이 금빠루로 바꿔주기도 하는 모양. 나도 노루 궁뎅이처럼 빼딱거리며 산책하다보면 금가루가 뿌려진 노을을 만나기도 한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 세상. 산짐승 아기들도 자장자장 잘 자렴.
임의진 목사·시인
201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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