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1539. 거지 순례단

한희철 | 2002.01.02 21:19: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한희철1539. 거지 순례단

 

“여보. 누가 찾아왔어요.” 

주일 오후 서재에서 저녁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데 아내가 부른다. 나가보니 모르는 젊은이들이, 한눈에 보기에도 열명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교회 마당에 서 있었다. 그들은 제각각 베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어찌 찾아 오셨오?” 

“우린 거지 순례단입니다.”하며 일행의 대표이지 싶은 젊은이가 나서서 대답했다. 

‘거지 순례단’. 벌써 몇 년 째 이맘때면 단강을 찾는 이들이다. 대학생선교회에서 전국수련회를 마치곤 돌아가는 길에 제각각 흩어져 전도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긴 왜 왔소?” 

몇 번 겪었기에 그들이 왜 왔는지를 모르지 않지만 굳이 물었던 건 그동안 그들의 방문이 마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도하러 온 기독학생들이라 하며 다녀가는 그들의 모습이 봉사활동을 하러 나온 일반대학생들보다도 못한, 참 철딱서니 없구나 싶은 모습을 그동안 속상한 마음으로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대표되는 학생이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길게 설명했다. 자신들은 위에서 정해지는 지역으로 들어갈 뿐이며, 사영리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태도는 당당했다. 잘 훈련된 군사가 무방비 상태의 성을 찾아온 듯했다. 

“저녁은 어떻게 할거요?” 우선 지역 주민들에게 전도를 하겠다는 그들의 말에 저녁식사에 대해 물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거지’였던지라 늘 얻어먹고 나가곤 했고 그들의 지난 모습에서 마뜩하지 못했던 점 중의 하나가, 얻어먹는 그들의 태도가 너무 당연하고 당당하다는 점이었다. 

미안함이나 고마움보다는 ‘우리가 이 정도 일을 하면 교회에서야 이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는, 불쑥 찾아온 ‘떼거지’들이 갖는 뜻밖의 당당함을 때마다 겪었기 때문이다. 

“전도하러 간 집에서 주면 먹고 안주면 안 먹겠습니다. 나중에 못 먹은 학생들만 좀...”

 그들은 예수 ‘흉내’를 내고있는 것 같았다. ‘흉내’라 느껴졌다. 한창 바쁜 농사철, 집집이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고 있다 하더라도 대개는 어둘때까지 일들을 할덴데 이유야 어쨌든 찾아온 사람을 그냥 보내기는 어려운 게 농촌의 정서,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도 있잖은가. 

‘주면 먹고 안주면 안 먹는다’ 아마 그들은 그렇게 교육받은 모양이었다. 말끝을 흐렸지만 뜻은 분명했다. 얻어먹지 못한 학생들의 저녁을 준비해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놀이방에 짐을 푼 학생들은 몇 개 조로 나뉘어 전도를 떠났다.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불쑥 예고도 없이 찾는 떼거지 (그들은 열 한 명이었다), 그런 짐을 모른 척 아내에게 지우기가 싫어 얼른 차를 타고 나가 라면 한 박스와 계란을 사왔다. 

농촌교회 목회자 부인이 그런 일을 당연한 듯 해야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룻밤 자고 간다했으니 다음 날 아침 대접도 해결해야 했다. ‘굶는’ 경험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너무 매정하다고 여겨졌다. 

저녁 예배를 마쳤을 때였다. 

저녁 식사에 대표자와 조장들이 전도한 결과를 보고 하겠노라고 서재로 왔다. 그들은 일정한 양식을 갖춘 종이에 전도한 결과를 적어 가지고 있었다. 

‘아무개는 어디 사는데, 나이는 몇 살이고, 하는 일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이런저런 형편에 있으니...’ 그들의 ‘보고’는 그렇게 시작됐고 그런 식이었다. 

순간 느꼈던 당혹감이라니... 그건 마치 무슨 인수인계를 하는 것 같았다. 후임자에게 생판 모르는 사람을 소개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만나고 온 사람과 그들의 형편을 소개했다. 

 

형편이 그러니 목사님이 한번 만나보고 기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친절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아무개씨네 가서 물으니 교회는 다닌다 해서 ‘영접’했냐고 물으니 안 했다 해서 영접 기도를 해주고 왔습니다.” 그들의 보고 중엔 그런 내용도 있었다. 

그들에게 물었다. “아무개씨가 ‘영접’이란 말의 뜻을 알던가요? 알만한 형편이라고 여겨지던가요?” 그들이 얘기하는 아무개씨는 ‘영접’이라는 말을 알만한 형편에 있지 못한 사람이었다. 

“아무개씨네를 찾아갔더니 두 노인이 아파 꼼짝을 못하고 누가 있더라구요. 파리가 가득한데도 파리도 못 잡고 누워있었어요. 이렇게 사는 분들도 있구나 싶은 게, 제 영혼이 성숙해 짐을 느꼈습니다.” 겨우 얘기를 참으며 듣다 그 대목에서는 더는 못 참고 말았다. 

“영혼이 성숙해졌다고?” 아프고 딱한 노인 구경하면서 영혼이 성숙해졌다니. 도대체 이들 마음 자세는 무엇일까. 아파 달려드는 파리를 쫓지도 못하고 누워있는 노인을 불쌍하게 바라보며 ‘사영리’를 전하고 영접 기도를 하고 돌아서서 영혼의 성숙을 느꼈다니. 

 

그들에겐 뭐 이런 목사가 있나 싶었겠지만, 너희들이 한 일은, 아무 말 없이 노인집 파리를 잡아드린 일보다 못한 일이라고 했다. 파리나 잡아드리고 오지 그랬느냐고,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걸레로 방 안 청소나 해드리구 오지 그랬느냐고 했다. 그 모습이 하도 고마워 “어디서 오신 분들이라구요?” 노인이 물으면 지긋이 “하나님이 보내서 왔어요” 그럴 순 없었던 걸까. 그런 노인 앞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이 막히고 눈물이 나는 대신, 그들은 당당하게 ‘전도’를 하고 돌아섰고 영혼의 성숙함을 느꼈단다. 

말없이 봉사하고 돌아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말만 하고 돌아서는 이들도 있다. 말없이 땀 흘리고도 고맙고 송구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말만 남기고 당당하게 돌아서는 이들도 있다. 

문제는 ‘믿는다’는 이들의 뒷모습이다. 그들은 대개가 ‘말’로 와서 ‘말’만 남기고 간다. 그게 제일 중요하고 그거면 다 되지 않느냐는 태도다. 

솔직히 그들이 안 왔으면 좋겠다. 오늘은 선교회 전화번호를 찾아 담당 간사에게 그 얘기를 할 참이다.

(얘기마을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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