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임의진 › [시골편지]처녀 귀신의 원한

임의진 | 2016.06.21 12:50:4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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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의 밤은 어둡고 습하고 이따금 신발장수 지네가 사르락사르락 기어 다녀. 서까래에 비가 샐 만큼 벼락비까지 쏟아지네. 눅눅한 장마가 시작되었구나. 할매의 집엔 벽마다 귀신 퇴치 부적이 붙어 있다. 시비구설, 송사, 손재, 상패를 막는 붉은 딱지 부적. 오뉴월 서리가 내린다는 잡귀 중에 가장 무서운 처녀 귀신. 우환질고에서 건져줄 한 가닥 지푸라기 부적. 밀양엔 밀양부사 외동딸 처녀 귀신 아랑이 있고, 여기 담양엔 영산강에 빠져죽은 처녀 귀신 달님이가 살고 있어. 비가 오는 밤이면 불타서 오그라든 뼈를 세우고 피범벅이 된 채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달님이가 흐느껴 운다네. “오매 무성그” 할매는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또 놀라.

골목을 뒤지던 귀신은 늙은 괭이 울음소리를 하고 나타나 문지방을 넘는다. 봉긋하게 솟은 버섯 같은 가슴을 보아 처녀 귀신이 분명하네. 달님이는 자기를 강물에 밀어뜨린 그 남자를 찾아다니지. 외로운 나는 귀신이라도 좋아. 온몸에 싸인 밤그늘이 슬퍼 보여. 귀신이라도 안아줘야지. 쌓인 원한을 풀어줘야지. 이승과 살뜰한 이별을 할 수 있도록. 몸을 떠난 마음이여. 봄날 눈처럼 녹고 실타래처럼 풀어지길. 자유를 얻어 저 세상에서 부디 행복하길.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야. 살아도 죽은 것 같은 싸늘한 하얀 얼굴의 처녀 귀신들이 있다. 인상부터 무섭고 사나워. 먹구름처럼 찡그린 얼굴로 줄창 화가 나 있어. 오매불망 사랑한다면서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무슨 원한을 졌길래 이토록 싸늘하고 차가운지.

처녀 귀신 달님이는 기도와 어둠과 통곡의 밤을 지나 마음을 풀고 하늘로 승천한다네. 그래야지. 원한을 풀어야지. 슬프고 억울한 일이 있었대도 주변에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귀신도 친구가 있어야 해. 동굴 같은 흉가에서 나와 친구들과 사랑해야지. 처녀 귀신의 밤. 장맛비는 자정까지 내리고…. 12시 종이 울리면 초록물뱀처럼 스윽 얼굴을 내미는 처녀 귀신이 내 손을 더듬네. 차갑고 따뜻한 두 사람의 손이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네.

임의진 목사 시인 20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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