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임의진 › [시골편지] 옹가, 긍가, 강가

임의진 | 2016.04.25 23:58:1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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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스키 마스크를 눌러쓴 멕시코 게릴라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그가 불러낸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구수한 옛이야기를 기억해. 내일이라고 부르는 빵의 재료는 고통이라고 그랬지. 옥수수와 설탕으로 만든 빵 마르케소테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담겨있다지. “가난(Hamhre)과 사람(Hombre). 최초의 신들. 세상을 창조한 이들은 죽음과 삶을 그렇게 불렀다네. 가난은 죽음이라 불렀고, 삶은 사람이라고 불렀네.” 배고픈 사람이 없도록 빵은 나눠 먹어야 하지. 외롭게 죽지 말아야 해. 옥수수가 오두막집에 들어찰 때까지 빈곤과 고통을 이겨내야 해. 겨울 빈터. 대지에 내려앉은 건 두꺼운 얼음장뿐. 쪼글쪼글한 할매 주름살처럼 고랑마다 이랑마다 깊게 파인 상처들. 핏빛 붉은 흙바람이 불면 어둡고 추하고 서러운 땅에 꽃씨들이 눈을 뜰까. 빈터의 가난을 이겨내고 봄날에 만나 사랑하자던 약속.

 

저물 무렵 떠도는 영혼 같은 진눈깨비를 보았네. 찬비에 섞여 날리는 진눈깨비가 철모르고 피어난 산수유를 꾸짖는 밤. 한기를 피해 사람들이 모인 곳에 몸을 깃들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큰 목소리. “옹가?” 남도 사람들은 ‘옹가, 긍가, 강가’ 이렇게 딱 세 마디면 인생 함축이렷다.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긍가?” 긍게로, 긍게 말이시… 말끝마다 장단 맞춤. 동병상련이 굳이 아니더라도 긍가로 힘껏 동의하고 지지하며 진심을 알아준다. 동참과 동행은 옹가로 표현된다면, 더불어 있을 때는 긍가로 힘을 실어주고, 멀리 떠날 때, 헤어질 때면 강가로 작별을 서운해들 한다.


이 세상이 아무리 고통의 나날일지라도 옥수수가 자랄 때까지 긍가, 긍게로, 긍게 말이시 격려해주는 당신이 있어 살 만해. 화단에 뿌려진 봉숭아씨는 땅속에서 늦잠을 자고 있겠지. 봄이 옹가? 나는 긍가라는 말을 서둘러 내뱉고 싶다. 죽음과 삶 사이, 가난과 사람 그 사이에 입술을 떨며 하는 말 긍가는 사랑이겠다. 사소한 구원이요, 희망이겠다. 강가는 생각만 해도 슬퍼 당신 입술을 빌리고 싶은 말. 아쉬워 차마 꺼낼 수 없는 작별의 인사말.


임의진 | 목사·시인  201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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