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길희성 | 2007.12.09 20:50:3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14:1-11
설교자
길희성 형제
참고
새길교회
백문이 불여일견,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아야 직성이 풀리고 보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인식의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도 '본다'(see)는 말은 '안다'(know)는 말로 쓰입니다. 보는 것은 빛이 있어야 가능하며, 사물이 빛 아래 환히 드러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빛과 진리와 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특히 경험과 실증성을 강조하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매우 강하며, 보지 않고는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옛날사람들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것들이 이렇게 직접 경험으로 검증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것들이 많이 있으며 또 실제로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타인의 말이나 증언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신앙 생활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인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편으로는 보이는 세계에 한 발을 디디고 사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다른 한 발을 들여놓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정말로 실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실로 신앙은 모험이요 도박 같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우리의 삶을 거는 도박입니다. 보이는 것이라면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또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며 눈에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며, 보이는 것을 또 바랄 까닭이 있겠는가(로마 8: 2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로 믿음이란 이 보이는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려는 인생의 일대 모험이요 용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믿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앞당겨 선취하며 살다가 언젠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환히 볼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과 믿음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믿음이 필요 없고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대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삽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우리가 지금은 거울 속의 영상 같이 희미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 12)
그러나 우리 인간은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며, 보이는 세계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실감 있고 설득력 있으며 때로는 오직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간혹 이런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셨나? 나 여기 있다고 누구도 부정 못하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면 모두가 꼼짝없이 의심 않고 믿을 터인데 왜 계속 숨어만 계시며 우리의 애를 태우면서 그렇게도 어려운 믿음만을 요구하실까? 또 예수님도 그렇지, 그 성전 꼭대기에서 악마가 보는 앞에서 확 뛰어내리셨으면 누가 그가 메시아임을 부정할 수 있었겠으며, 그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갈 필요도 없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나 믿음은 결코 강요될 수도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식적 거리가 없이 마치 어떤 사물을 대하듯 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이 꼼짝 못하고 믿음을 강요받을 것이고 그러한 믿음은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강요된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우리 코앞에 나타나서 믿음을 강요하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폭군이나 왕과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직접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너무도 강한 빛이기에 만약 우리가 그를 직접 대한다면 우리의 눈은 타버리든지 멀어버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보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며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존재로서 만약 이 시간과 공간의 차단벽이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대한다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들의 인식활동의 제약이자 동시에 우리를 보호해주는 보호막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치 오존층이 우리를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차단시켜 주듯. 또 예수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다면 사람들을 아마도 놀라서 그 앞에 벌벌 떨면서 무릎을 꿇었을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도 져서는 안 될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역사의 고통의 현장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한없이 감동케 하는 참다운 구원의 드라마를 펼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진정한 인류의 구원은 사랑과 자기 희생에 있는 것이지 기적과 권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존을 감당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이면서도 그를 눈으로 직접 보고자 하는 욕망을 지워버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무언가 확실한 증거를 보고 싶어하는 존재들이며,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도 무슨 기적이라도 보았으면 확실히 믿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이것이 아마도 기적을 구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존재가 복음서에 둘이 있는 데 하나는 도마요 다른 하나는 빌립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고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기 전에는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하다가, 예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도마의 손으로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만지고 창에 찔린 그의 옆구리를 만지도록 한 후에야 믿었다고 합니다(요한 20: 24-29).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속에서는 빌립이 우리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좋겠습니다." (다른 영어 번역에는 '그러면 우리가 만족하겠습니다'라고 되어 있음). 예수께서 내 '아버지,' '아버지'하고 자꾸 말씀하시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은 빌립은 드디어 도대체 그 '아버지' 한번 좀 보여줄 수 없겠습니까?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라고 말씀하실 때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인가 하고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서 빌립의 결정적 문제는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그를 보여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여태까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따라다니다가 이제 와서 엉뚱한 소리를 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계속 그를 따라다니고서도,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다시 한번 분명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한다는 말인가?"라고 그의 우둔함을 책하셨습니다. 빌립의 문제는 하나님을 모른 것이 아니라 그가 정신 없이 따라 다니던 예수의 정체, 그의 인격의 비밀을 모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보고도 참으로 그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보다도 예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고, 죄지은 자와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가 되신 그의 행위 속에서 의인보다도 죄인을, 강한 자 보다는 약한 자를 사랑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믿음의 눈을 지닌 자들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빛을 전달해주는 투명체와 같은 존재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 인식과 예수 인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무슨 철학적 사변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서 그를 믿는 것도 아니며, 무슨 신비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세상에 살다가 가셨다는 것만으로도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을 믿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존재는 믿겠는데 예수를 믿기가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또 왜 굳이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필경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동정녀 탄생, 부활, 물 위를 걸어갔다는 등 수많은 믿기 어려운 기적사화들이나 삼위일체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들을 억지로 믿게끔 강요하여 정작 하나님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수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아들 예수의 모습을 오히려 가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아들의 모습을 보면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그 아들의 모습을 닮아서 그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혹시 빌립과 같이 여태껏 예수를 따라다닌다고 하면서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세상에 수많은 성인과 성자, 의인과 혁명가들, 존경할만한 사람들을 제쳐놓고 하필이면 우리하고는 너무나도 먼 저 팔레스타인 한 구석에서 살다가 죽은 예수를 우리 삶의 중심에 놓고 삽니까? 그에게 무슨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이 있어서입니까? 그가 공자님과 부처님과 같은 인생의 지혜라도 가르쳐 주었단 말입니까? 아니면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을 위한 혁명가였기에? 병든 자를 값없이 고쳐주는 남다른 봉사가였기에? 아닙니다. 이러한 것만으로는 예수를 우리 삶의 중심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보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 자, 하나님을 가장 구체적으로 계시해주는 자이며, 그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현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곧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우리 삶의 중심에 놓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의 어떤 면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게 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당당하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가요? 오늘의 성경 말씀은 이 점에 대해서 우리에게 특별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인격의 비밀을 접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보았다기보다는 하나님과 더불어, 아니 하나님 안에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신 분입니다. 그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도록 그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보다도 더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예수에게는 이러한 깊은 영적 체험이 있었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단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직접 모시고 느끼면서 사는 분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이러한 면, 이러한 그의 인격의 신비를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가 그러한 존재임을 그의 말씀과 그의 행위라는 외양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서 압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빌립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행위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예수의 내적, 영적 체험과 의식에 근거한 것이며, 예수를 예수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인격의 이와 같은 깊은 신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의 대상적 인식, 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한 물건, 한 사물, 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 존재의 근거이며, 우리 생명의 근원이며, 나의 숨결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내가 그를 생각하고 의심하고 하기 전부터 그는 이미 나의 존재의 근저에 계시는 분이시며, 내가 그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하는 그러한 존재라는 것이 예수의 증언입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은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실재였습니다. 바로 의심하는 자의 생명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인도의 성인 비베카난다(Vivekananda)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서양 세계에 힌두교의 위대한 영적 전통을 소개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에 변호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적 고민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는 이 지도자들을 만나서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은 신을 보았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자신 있게 말을 못 했는데 라마크리쉬나라(Ramakrishna)라는 성인을 만나서야 자신 있는 대답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라마크리쉬나 선교회 등을 조직해서 힌두교의 정신 세계를 세계에 전파하는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마도 비베카난다가 빌립과 같이 예수를 만나서 같은 질문을 했더라면, 예수는 하나님을 보았다기보다는 지금과 같은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즉 내가 그 안에, 그리고 그가 내 안에 있다고.
그런데 문제는 우리와 같은 범인들은 이러한 확실한 영적 체험을 가지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아야 믿을까 말까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인간의 몸으로 아들의 형상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형태로, 형상이 없으신 분이 한 형상을 취하여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이는 것을 필요로 하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확실한 것, 가시적인 것을 붙잡을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막연한 사변이나 공상을 할 필요가 없고, 우리의 신앙은 암중모색도 아니고 무모한 모험이나 도박은 더군다나 아니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그리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존재임을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신비요 은총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우리를 불러서 자기를 떠나지 말고 자기와 함께 살자고 초대하십니다. 그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그 안에 거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5장-17장).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를 떠나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일인가요? 그것은 그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5: 9-11).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시면서 그의 빛을 발하는 큰 발광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교제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빛을 간접적으로 전달받아 비추는 작은 빛들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빛의 계절입니다. 빛 되신 예수의 얼굴에서 자신을 낮추어 낮고 천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얼굴을 확인하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빛을 되받아 세상을 향하여 우리들의 작은 빛을 발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듯이, 우리들의 얼굴에서 세상이 은총의 하나님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우리가 빛의 자녀들임을 보여주어야 하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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