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놓으려고 힘썼으나

최용우 | 2008.11.11 16:49:2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18:38-19:16
설교자
이재철 목사
참고
1997년 4월 13일
제목: 놓으려고 힘썼으나
본문: 요한복음 18:38b-19:16
설교: 이재철 목사 (1997년 4월 13일)

조선왕조 500년이 우리 민족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한가지만 말해 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세종 대왕의 한글창제일 것입니다. 한 민족이 고유한 자기 말과 글을 갖지 못할 때, 고유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역사를 지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결국엔 소멸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타민족에 동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1446년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중요성과 가치, 그리고 우리 민족역사에 대한 기여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오히려 모자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글창제가 이처럼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해서, 전 국민적인 합의나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한자에 대하여 까막눈이던 일반 국민들은 한글창제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이미 한자에 능숙하던 지배계층 중에는 오히려 반대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한자를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따로이 우리 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공연히 한글 창제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세종 대왕에게 한글창제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 반대론자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2월 2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예부터 대국 중화의 제도를 본받아 실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학문에도 정치에도 아무 유익함이 없는 줄로 압니다. 더구나 글자 제정은 의견을 두루 청취하면서 시간을 두고 가부를 논해야 마땅한 데도 너무 성급하게 발표했습니다. 혹시라도 중국 측에서 시비를 걸어올까 두렵습니다. 주변국들이 제 글자를 가지고 있다하나 그들은 모두 오랑캐 족들일뿐입니다. 우리가 중화의 은혜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 족에 합류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더구나 이미 우리는 이두라는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두는 반드시 한자를 익혀야 쓸 수 있기에 오히려 학문에 도움이 됩니다. 만약 관리들이 쉽게 언문만 익히게 된다면 결국에는 한자를 아는 이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할 일이 태산 같이 많은데 어찌하여 급하지도 않는 언문 익히기 부담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할지라도 한낱 기예에 불과합니다. 학업에 정진하고 정신을 연마해야 할 어린 왕자들과 유생들이 시간을 허비해 기예 익히기에 몰두한다면, 이는 크나큰 국가적 손실입니다. 감히 고하오니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당시 그 역시 집현전 고위 학자였던 최만리에게는, 이와 같은 반대 상소문을 올릴 수밖에 없는 개인적 인식과 시대적 상황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상소문을 볼 때, 그의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심중에는 우리 민족 우리 문화보다도 중국, 중국문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상소문을 만약 중국의 황제가 보았더라면 크게 만족하면서 큰 상을 내렸을 것입니다.
최만리는 학자로 관리로, 특히 말년에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중국을 더 염두에 둠으로 말미암아 훈민정음에 관한 한 그는 자신의 인생에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오점을 찍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의 심중이 중국보다 우리 민족을 더 우위에 두었더라면, 그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곧 '결정'이요 '판단'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것을 결정해야 하고 또 많은 것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삶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더 중요한 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사항을 결정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염두에 두는가? 우리의 심중이 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 18:38b)

유대인들이 사형에 처해 달라며 끌고 온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빌라도 총독은 아무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0절의 지적처럼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죽이려 함을 빌라도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줄 수 있는 전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하였지만, 유대인 군중들은 오히려 강도 바라바의 특사를 요구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총독 빌라도는 군병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하게 한 뒤,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다시 군중들 앞으로 끌고 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19:4)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없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혼을 내 주었으니 이제 그냥 풀어주면 어떻겠느냐는 식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공관 안으로 들어가서 한번 더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사형에 처할 만한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12a)
총독 빌라도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예수님의 석방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12절 하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b)
참으로 그것은 무서운 협박이었습니다.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참칭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가이사 즉 로마 황제의 신하일 수가 없다는 이 말의 의미는, 만약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석방시키기만 하면 반역자를 풀어준 당신의 죄를 직접 로마 황제에게 진정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가끔 유대인들 중의 유력자들이 로마총독의 비리 사실을 황제에게 진정하여 역대 총독들이 곤욕을 치른 바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던 빌라도는, 끝내 그 협박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16)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막 15:15)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앞에 세워 놓고 무죄냐 혹은 유죄냐, 사형이냐 아니면 석방이냐를 판결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끝내 자신이 정당하지 못함을 잘 알면서도 사형을 언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더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자기 자리였습니다. 애써 차지한 총독이란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보다는 불의한 다수를 만족케 하는 일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노라고,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스스로 자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리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만 이 신앙고백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전세계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 중의 중죄인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빌라도는 지난 이천년동안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한결같이 정죄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의한 다수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잘못된 일 인줄 뻔히 알면서도 진리를 서슴없이 못박으면서까지 자기 자리, 자기 욕망을 우상으로 삼았던 어리석음에 대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그처럼 지키기를 원했던 그 자리가 빌라도를 평생토록 지켜주었습니까?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그로부터 불과 몇년 후 로마 황제로부터 파면 당한 뒤, 승진이나 다른 보직을 받지 못한 채 갈리굴라 황제때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못박으면서까지 고수하려한 자리였지만 허망하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의한 다수들에게 만족을 주면서까지 지키려 한 자기였지만, 그러나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면에서 그는 목매어 자살한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없음을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예수님의 석방을 세번씩이나 시도했던 사람이었으므로, 만약 빌라도가 자기에게 연연하여 불의한 군중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풀어드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빌라도 총독이 반역자를 살려 주었다고 모함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빌라도 총독은 파면을 당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영원한 의인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사후 이천년이란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그토록 연연했던 총독자리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중요치 않은 것을 중요하다 착각하다가, 그는 막상 중요한 모든 것- 진리와 자기자신을 송두리째 다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갈 1:10)

바울은 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살전 2:4)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라도와는 달리 불의한 자들의 환심을 사려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자들의 환심을 사는 길은 오직 하나―진리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배신하여 불의한 다수의 환심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진리를 위해 불의한 다수들로부터 모함 받고 핍박받는 길을 기꺼이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에 대해 연연치 않는 자이었으므로 가능했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와 사도 바울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자신, 자기 자리, 자기의 것들을 가장 중요시하여 진리를 미련없이 버렸다가, 그가 선택한 불의한 자들과 더불어 공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 오던 모든 것의 무익함을 깨달아, 자기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미련없이버리고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가 선택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의인으로 영원한 세움을 입었습니다. 무엇이 진정 자기를 위하는 것인지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자기를 위해 진리를 버린 빌라도입니까? 아니면 진리를 위해 자기를 버린 바울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만족을 주려, 누구의 환심을 사려 애쓰고 있습니까? 옳은 길인 줄 알면서 옳은 길을 가는 자입니까? 틀린 줄 알면서 틀린 길을 가는 자입니까? 우리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불의한 다수입니까? 아니면 의로운 소수입니까?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 볼 때 나라는 존재는 결코 나의 우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최만리의 어처구니없는 한글창제 반대 상소문이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듯이, 우리의 전 인생은 하나님 앞에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자기를 위해 진리를 버린 빌라도가 오늘도 사도신경을 통해 단죄되고 있듯이, 진리를 위해 자기를 버린 바울이 영원한 사도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도 망각치 마십시다. 그때에만 우리 모두 어리석은 빌라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오직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9)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세부적인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자기를 진리보다 더 사랑하면 빌라도처럼 반드시 자멸할 것이요, 진리를 자기보다 더 사랑하면 필히 영원한 세움을 입으리란 사실입니다. 주님, 머지않아 공동묘지의 흙으로 돌아갈, 이 허망한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진리를 버리고 불의한 자들에게 환심을 사면서까지 자신의 욕망을 지키려는 허물에서 헤어나게 하옵소서. 오직 진리를 위하여 날마다 나를 쳐 복종시키고 나를 버리므로, 영원한 진리의 증인되는 기쁨을 우리 모두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제목:
본문:
설교:

댓글 쓰기

목록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