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출애굽기 › 왜 하나님의 전쟁인가?

김이곤 목사 | 2007.12.12 14:28:0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출15:19-21
설교자
김이곤 목사
참고
새길교회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Cape Town) 대학교에서 흑인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구약성서를 가르치고 있는 이투멜렝 제이 모살라(Itumeleng J. Mosala)라는 교수는, 그의 최근 저서인 {남아프리카의 성서해석학과 흑인신학}이라는 책의 결론부에서 말하기를, "성서로 하여금 명실공히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책이 되게 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성서 자체를 해방시킬 필요성이 있다."라고 강력하게 역설한 바가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분명 전통적인 서구 성서학에 대한 매우 심각하고도 근본적인 도전적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 첫 번째 비판점은 18세기이래 지금까지 세계 성서학 위에 군림해 온 서구의 성서비평학이 지니고 있는 그 방법론적인 한계점과 자기 모순적인 성격이 드디어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이고, 그리고 두 번째 비판점은 서구의 성서비평학이 성서신학의 중심 주제를 분명하게 부각시켜서 "성서로 하여금 성서가 되게 하는 사명수행"에 실패하였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러한 도전은 심각하고도 근원적인 것이었다.
첫번째 문제점이 지적하고 있는 요지는 두 가지로 본다. 그 하나는 전통적인 서구 성서비평학은, 성서 본문(text)이 그 구전과 문서 전승 당시에는 무엇을 의미했던가(what it meant) 하는 것을 추론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현재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자가 처해 있는 오늘의 역사적·사회적 문맥, 즉 오늘의 독자의 상황(context)은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서구의 성서(역사)비평학은 성서 본문이 언제 쓰여졌느냐, 누가 썼느냐, 어떤 문맥에서 쓰여졌느냐, 어떤 특수 용어가 사용되었느냐, 그 본문은 어디서 기원(起源)되었느냐 하는 것을 분석하고 추론하는 데에만 관심을 보였고, 그 성서 본문이 오늘의 우리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을 밝혀 주는 해석학적 책임은 마치 비학문적인 것으로, 또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돌려버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구의 성서(역사)비평학은 "성서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를 성서를 독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보다 더 강조함으로서 마침내는 성서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부터 분리시키고 더 나아가서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데 보다는 단지 개인적인 명상의 대상으로 더 이용하도록 만들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구의 성서비평학이 자신의 성서해석 방법론을 유일한 최선의 것으로 보고, 새로운 해석학적 접근은 이러한 역사비평학적 방법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서구의 역사비평학적 결과들만을 최선의 모범 답안으로 받으라고 강요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구 성서비평학의 태도를 가리켜서 크리스타인 이 꾸돌프(Christine E. Gudorf)는 성서주석 결과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제국주의" 논리라고 비평한 바가 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해석학적 접근은 감히 서구의 성서비평학이 만일 그 제국주의적 교조를 버리지 않는 한은 그 성서비평학이 오히려 성서로 하여금 성서가 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한 셈이라 하겠다.
그 다음 모살라(Mosala)가 지적한 현대 서구 성서신학의 두 번째 문제점은, 앞에서 말한 것보다 좀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현대 성서비평학이란 성서신학의 중심 주제를 분명하게 부각시켜서 성서로 하여금 성서가 되게 하는 그 본래적 사명 수행에서 실패하였다는 점이었다. 논의할 여지없이, 현대 성서신학의 중심 주제는 인간해방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인간구원"이라는 것이 그 중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신학은 이 "구원" 주제에 대한 깊고도 명철한 반성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이 새로운 성서해석학이 현대 성서비평학을 향해 던진 주요 비판점이었다.
사실 성서의 현실을 냉엄하게 들여다보면, 서구의 성서비평학이나 서구신학 일반이 걸었던 길은, "성서가 인간의 삶에 의미를 줌으로서 인간을 비인간화의 죄의 사슬로부터 풀어주는 인간해방과 인간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책이 되도록 성서를 해석해 주고 또 성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는 성서신학적 의무"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관심하고도 매우 관념적인 학문주의로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역사비평학적 성서학을 필두로 한 이러한 서구신학의 입장을 만일 우리가 {모든 종류의 비인간화 요소의 요량이 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 계층적 억압체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하는 "해방의 선교"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목적}이라고 선언한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의 메델린(Medellin)교서의 정신과 비교해 본다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서구의 성서비평학적 태도가 오히려 더 "비성서적"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큰 놀라움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서구의 전승사적 성서연구 고찰 방법을 통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는 출애굽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사에서부터 출발하였고, 이 사건이 적어도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를 이해하는 "모범적"(paradigmatic) 사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약성서는 끊임없이­여러 가지 문학양식을 이용하여­약한 이웃을 경멸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잠 14:21 특히 출 22:21-23) 동시에 야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변호해 주는 것(렘 31:34)이라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즉 성서의 현실이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약자를 위한 하나님의 인간해방 활동과 인간구원 활동을 증언하고 그 패러다임을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성서라면, 실로 저토록 전통 깊은 서구의 성서비평학과 서구신학이 어찌하여 해방 주제를 역사 내적으로 다루지를 못하고, 즉 인간역사 내부의 주요 현안 문제로 다루지를 못하고, 그것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하였던 것일까? 바로 이 문제가 오늘 제가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중심적 이슈요 메시지의 주요 동기이다.
구약을 공부하고 있는 한 학도로서 본인이 보는 관점에 의하면, 서구신학은 여기서, 즉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인간해방 역사를 통하여서 "해방의 논리"보다는 오히려 "힘의 논리"와 "지배 논리"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러한 잘못된 서구신학의 시행착오적 성서 이해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소위,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인간 해방사에 관한 성서 설화의 진의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한 성서 해석학적 오류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성서 해석학적 오류가 기독교 최초, 최대의 이단자인 마르시온(Marcion)의 성서 이해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의 핵심은 "왜 하필 하나님의 전쟁인가?", "왜 하필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방식을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방식으로만 전개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해방전쟁에 관한 성서적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라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1. 출애굽 해방 사건은 "하나님의 전쟁"의 대표적인 성서적 패러다임.
구약성서 최고대의 문헌 중의 하나로 알려진 출애굽기 15:1-18, 21절에 나타난 "미리암의 노래"는 떠돌이 노예인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때 경험하였던 홍해에서의 기적적인 구원경험을 신학적으로 또는 신앙고백적으로 정리하여 그리고 특히 예배 의식문을 통하여 서술하였던 구약성서 가장 초기의 문헌 중의 하나이다. 그 미리암의 노래는 대강 이런 줄거리로 되어 있다.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마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야훼는 전쟁의 용사, 그의 이름은 야훼! 바로의 병거와 군대를 바다에 처넣으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홍해 빠지더라.... 야훼여, 당신의 오른 손이 원수를 짓부쉈습니다. 당신의 세찬 콧김에 바닷물이 쌓였고 물결은 둑처럼 일어섰으며 바다 속 깊은데서 물이 엉겼습니다. 원수들은, ... 칼을 뽑아들고 이 손으로 쳐부수리라 라고 장담하였지만 그러나, 당신께서 바람을 일으키시자 바다가 그들을 덮어 버렸습니다.... 야훼여, 신들 중에 당신 같은 분이 어디 있겠습니다? ... 당신께서 손수 해방시키신 이 백성, 아, 당신은 사랑으로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힘있는 손으로 그들을 당신의 성소로 인도해 주십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고대의 노래 속에 나타난 명백한 역사적 사실은, 이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지 두 가지로만 집약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이 "홍해 또는 갈대바다"라고 불리는 어느 바다에서 기마와 기병을 가진 강력한 바로의 침략군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는 그런 어떤 역사적 경험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이 바다 사건이 "숙곳"으로부터 도보거리로 만 하룻길 지점인 광야 끝의 "에담"에서 일어났는지(J; 출 13:20), 아니면 갈대바다에서 일어났는지(E; 출 13:18), 그것도 아니면 지중해와 믹돌 사이의 바알스본 맞은 편(P; 출 14:2)에서 일어났는지 등등 성서의 증언들이 서로 엇갈리고는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실 하나는 분명, 바다의 기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의 강력한 군대로부터 건짐 받는 어떤 특이한 해방 "경험"을 하였다는 그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다른 역사적 사실은 애굽군대로부터 건짐 받는 이 대 "정치적 해방사건"을 모세 또는 미리암을 대변자로 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해방사건, 또는 하나님의 구원사건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신앙고백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자신의 전투행위(즉 human war)에 관한 보도가 여기서는 일체(!)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는 "기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미리암의 노래"로 알려진 이 고대의 노래는 단지 두 가지의 역사적 사실, 즉 거기 어디서인가 "바다 구원의 경험"이라는 그 어떤 역사적 해방경험이 어떤 형태로든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해방경험의 사실을 출발점으로 하여 비로소 출애굽사건, 광야 인도사건, 가나안땅 점유사건, 성소의 건립과 보존 사실들도 또한 "신학화하는" 작업을 비로소 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이라는 한 신앙공동체가 역사적으로 현존하고 있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만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서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으며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역사적 해방경험에 대한 감격 때문에 생성된 신앙고백문 또는 해방 이데올로기의 천명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이 노래에 나타나게 된 신학 이념은 총괄해서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바다의 기적을 주도하신 야훼 하나님은 "전쟁의 용사"이시다 라는 사상이다. 즉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은 역사 초월적 내지는 관념적 신(神)이 아니라 인간 역사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신(神)으로서 "악(惡)과 싸우시는 분", "악과 전쟁하시는 분"이시라는 초기 이스라엘적 신 이해가 뚜렷하고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문학적, 신학적 표현법은 성서비평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일종 "하나님의 역사 참여"에 대한 의인법적(擬人法的) 표현이지만, 그러나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구약의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역사라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실질적인 희망이시라는 것을 긍정하는 신앙고백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둘째는, 이러한 "하나님의 전쟁"은 약자를 강자로부터 건지시고 보호하시는 편당적 성격을 띤다는 사상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전쟁"에서는 약자가 항상 하나님의 편에 있게 되고 강자는 항상 하나님의 "원수"로서 적대시되는 양극화의 현상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은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고 지키는 "방어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고 동시에 강자로부터 약자를 건져내는 "해방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며 따라서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압하는 부조리한 반(反)평화사회를 변혁시켜서 평화사회를 만들어 가는 "평화운동" 또는 "구원운동"의 성격을 띤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전쟁과 관련해서 "평화"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여기서 일종 성서적 사상의 모순 개념을 읽어내려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쟁"과 하나님의 "평화"가 어떻게 동시적으로 함께 연결될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평화"개념은, 하버드대학교의 구약 교수인 폴 핸슨(Paul D. Hanson)이 적절히 설명해 주고 있듯이,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현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한" 모습으로 수립된 현실 안에서라야 비로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매우 포괄적이고도, 우리의 눈에는 매우 역설적인 개념이라는 점이 구약적 평화개념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출애굽 해방전쟁은 억압자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행위"와 그리고 억압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해방행위", 이 두 대극적 행위가 조화를 이루는 그런 해방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즉 억압받는 자의 "평화"를 위해서는 "해방"이 필요하고 그 해방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또한 신의 긍휼의 충동과 억압자들의 힘을 분쇄하는 "신의 전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하필 "신의 전쟁"이냐는 점이다.
그 다음 셋째로 이 미리암의 노래가 말하는 것은 전쟁과 전쟁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이념이다. 이스라엘이 바다에서 경험한 그 기적적인 해방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한 "하나님의 사건"이었을 뿐이다. 땅에선 야훼만이 유일한 왕이시다 라는 야훼의 유일한 왕권사상(출 15:18)도 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와 같이, 원수의 병거와 마병을 바다에 처넣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콧김으로 바닷물을 쌓아 올려서 둑처럼 만들었다가 바람을 일으켜 그 쌓은 물로 원수를 덮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는 이 신화 시적인 표현은 이스라엘의 해방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건이었을 뿐, 인간은 그 해방전쟁에서 전적으로 제외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점이 매우 자주 오해의 초점이 되어왔던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하필 "하나님의 전쟁"이냐 라는 점이다.
대체로 이러한 "하나님의 전쟁이념"은 하나님의 인간 해방사 또는 인간 구원사를 증언하는 구약의 역사자료인 예언서, 묵시문학 그리고 시편 시 전반에 걸쳐서 깊이 그리고 널리 반영되어 있는 이념이다. 그러면 이러한 성서문학의 현실을 보면서 그리고 성서문학의 현대 신학적 적용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기본 주제인 "왜 하필 하나님의 전쟁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간단히 대답해 보도록 하겠다.

2. 왜 하나님의 전쟁인가?
기독교 최초, 최대의 이단자인 서기 2세기(160년 경?)의 마르시온(Marcion)이 전쟁의 신인 구약의 하나님을 무한한 은총의 하나님이신 기독교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심지어는 구약의 하나님을 기독교로부터 축출하려고 하였던, 이른 바 두 하나님 "대비론"(Antitheses)의 문제는 접어 두고서라도, 출애굽 해방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빛의 자녀인 하나님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인 사탄의 자녀 사이의 세계 최후의 전쟁에 관한 묵시 문학적 종말론에 이르기까지의 구약성서 전반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사 또는 하나님의 인간 해방사가 왜 그토록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방식에 의하여서 주로 주도되어 왔는가 라고 하는 문제는 구약신학의 정립문제 뿐만 아니라, 해방신학을 비롯한 현대의 여러 새로운 신학들이 그들 신학의 성서적 전거로서 구약성서를 사용하는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풀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없이 옳다고 하겠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 해방사 또는 인간 구원사가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수행 된데 대한 일반적 오해는, 대체로 구약성서에 표현된 하나님의 구원사가 결코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 아닌, 이른 바 실제로 사건 이후에 해석된 하나의 해석사로 그리고 그 역사를 하나님의 전쟁이념에 기초하여 문학적으로 극대화한 것이라는 "구약"의 현실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 한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는, 그러한 특수한 성격의 성서문학을 빌려서 나타내려고 한 성서 기자 또는 성서 편집자의 "하나님의 전쟁이념"은 과연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인류구원사 또는 하나님의 인간해방사가 하나님의 전쟁사로서 묘사되고 있는 그 문학 현실들을 검토해 보면, 이러한 구약성서의 증언은 마르시온적 사상이나 또는 역사비평학이나 사회학적 비평학의 일각에서 추론했던 것처럼 그렇게 "지배이념"을 수용,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록 그것이 왕조사를 통하여 때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하기도 하였다 하더라도(예. 출 32:25-29; 삼하 5:6-10), 그러나 야훼의 이스라엘 해방사에 관한 구약성서 증언의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다음과 같은 구원 및 해방과 평화 지향적인 이스라엘적 신앙과 그 이념을 선포하려는 의도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성서 기자들이 증언하려는 주요 목적과 의도는 다음과 같은 성서 기자의 신앙 이데올로기를 증언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1) "하나님의 전쟁"은 해방이념에 기초된 약자 보호의 방어전임을 증언한다.
구약이 지니고 있는 가장 고대의 자료 중 하나로 인정받아온 출애굽기 15장의 미리암의 노래는 구약 다른 곳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기록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쟁이란 어디까지나 약자 보호의 방어전이요 그 기본 이념은 해방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증언한다는 특징을 뚜렷하게 갖고 있다. 홍해의 사건에 관한 출애굽기 14장의 보도나 사사시대의 가나안정착 전쟁에 관한 보도, 시편 탄원 시 그리고 구약역사 최 후대에 속하는 역대기 역사가의 자료들이 모두 이 사실을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 사료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쟁은 "긴박하고도 희망 없는 위기"의 상황 속에 있는 약자의 "부르짖음"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응답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전쟁은 또한 그 부르짖는 약자를 "말과 마차(기병)"로 상징되는 강대한 인간의 군사력으로부터 해방시킨 약자 해방사건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더욱 주목할만한 점은, 이 구약 사료들은 모두 상투적이리만큼 이 힘있는 강자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하고 그리고 그 강자의 위협을 받는 약자들은 또한 예외 없이 하나님의 "편"으로 간주하여 이 둘을 철저히 이원화(二元化)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서 감히 "전쟁의 신, 야훼"의 역설적 이중성, 즉 전쟁으로 심판하시는 "심판의 속성"과 약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시는 "긍휼의 속성" 사이의 조화와 일치를 보게 된다. 바로 이점이, 이스라엘 밖 고대 중동국가들의 신의 전쟁들이 지니고 있는 그 지배 이념적 배경과 이스라엘의 것 사이에 엄격한 구별이 생기는 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 해방사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증언하는 중요한 신학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2) "하나님의 전쟁" 이념이란 이스라엘의 신 야훼를 "역사의 신"으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역사적 해방 사건으로서 역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약성서가 야훼 하나님을 전쟁의 용사(출 15:3)로서 은유하고 있는 신학적 의도는 결단코 전쟁의 합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죄 있는 인간들의 역사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죄스러운 인간 역사에 참여하셔서 구원이 필요한 바로 그 죄스러운 인간들을 이용하여 오히려 이 세속세계에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구원사의 하나님이 다름 아닌 구약의 하나님 야훼이시라는 것을 증언하는데 그 신학적 의도가 있다는 것이 구약성서의 현실이다. 즉 하나님의 전쟁으로서의 인간구원 활동 또는 인간해방 활동은 어디까지나 죄스러운 인간 역사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죄스러운 인간에게는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희망을 제공해 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은 비록 전쟁과 전쟁에 관한 소문으로 가득 차 있으나, 그러나 전쟁의 용사이신 야훼께서 이 세계사에 참여, 성육신 하시어 악의 세력과 대결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는 희망을 제공해 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 바 성서의 하나님은 "전쟁용사"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실로 철저히 하나님에 관한 모든 관념적 이미지를 비로소 벗어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성서의 "구원"은 이렇게 하여 철저히 그 관념적, 추상적, 정신적, 영적 의상을 벗어 던지고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적 부조리의 굴레로부터 해방 받는 "역사적 해방"이라는 개념과 일치하게 된다. 출애굽기 14:13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들을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로부터 건짐을 받는 정치적 해방사건을 가리켜서, 성서는 "여수앝 야훼" 즉 "야훼의 구원"이라는 말로 정의 내리고 있는데, 이 사실이 바로 그것을 웅변적으로 논증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남미의 해방신학자 꾸티에레쯔(G. Gutierrez)가 구원 개념을 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변형, 성숙되어야할 인간 현실 전반을 포괄하는 공동체적 사회개념으로 보고, 마침내는 억압받는 이웃 속에 있는 그리스도에게로 회개하고 돌아가는 운동을 "해방의 영성"이라고 보았던 것도 이러한 구약적 현실과 동일한 맥락 안에 들어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전쟁 이념은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만나듯이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초월자 하나님과 피안적 구원도 이 죄스러운 인간역사 현실 안에서, 이 차안에서 만나고 체험하게 한다고 하겠다.
3) 구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전쟁" 기사는 인간의 전쟁 참여를 거부하려는 의도의 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구약문학의 묘사 중, 가장 특이한 점은 신이 인간을 도운다거나(수 10:14) 또는 인간이 신을 도운다거나(삿 5:23)하는 "신·인 협력사상"이 현저하게 퇴색되고 오히려 인간의 전쟁 참여의 의미를 대폭 축소시키거나 아예 인간의 전쟁 참여를 거절하거나 하는, 이른 바 반전(反戰) 이데올로기로 발전해 가는 것을 발견하게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야훼 하나님의 군대는 그 군대의 수(數)를 적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줄인다거나(삿 6:35), 또는 이스라엘은 여기서 "오, 야훼! 오, 기드온!"(삿 7:18)이라는 전쟁 함성이나 "부르짖는"일만을 하였을 뿐 실전(實戰) 행위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는다거나(출 14:14) 아니면 아예 전쟁 참여를 강력히 비난하고 거부하거나(시 68:30[31])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신학화된 하나님의 전쟁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는 반전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홍해(갈대바다) 앞에서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던 진퇴양난의 이스라엘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부르짖었을 때 모세를 통하여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은 단지, "야훼께서 너희를 대신하여(위하여) 싸우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라는 말씀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저 기적적인 바다 구원의 사건은 백성의 "부르짖음"과 그리고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잡은 손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다로 내미는 다분히 예배의 전적인 몸짓을 한 것 이외에는, 전적으로 "구름", "흑암", "광명", "돌풍", "바닷물", "불기둥", "구름기둥"에 의해서만 성취되었을 뿐 이스라엘은 여기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 나타난 성서 기자의 이념은 "폭력 또는 전쟁 폭력은 전혀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것이다"라 하겠다. 말하자면 신의 전쟁 이외의 모든 전쟁 행위, 즉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인간의 전쟁 행위라는 것은 전적으로 거부하는 반전(反戰) 이념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반전 이념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이야기에서는 더욱 극적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서 있는 소년 다윗, 너무 어려서 군복과 놋투구와 칼 따위는 모두 전혀 몸에 맞지 않아 모두 내어 팽개치고 단지 "물매와 물매 돌 다섯개만" 손에 든 소년 다윗은 방패, 칼, 창 그리고 단창까지 든 거인 골리앗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들고 내게 오지만 그러나 나는 만군의 하나님 야훼의 이름으로 네게 나간다.... 나는 이제, 야훼의 인간해방은 칼과 창을 통하여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전쟁은 전혀 야훼에게만 속한 "야훼의 일"이라는 것을 이 회중으로 하여금 알게 하겠다.(삼상 17:45-47)
그렇다. 분명 이러한 예배의전적 신앙고백문 속에는 단연코 야훼의 인간해방은 결코 칼이나 창과 같은 군사력에 의존하는 "힘의 논리"에 의하여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과 전쟁은 "야훼의 소유"(출 15:3)이므로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그런 반전 이념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더욱이 사무엘서를 편집한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 이야기의 끝 부분에서 이런 신학적 진술을 덧붙이고 있다.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불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삼상 17:50)
라고 증언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쟁" 이념은 오늘의 우리에게 인간해방을 위하여 "인간이" 해야 할 행동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4) 하나님의 전쟁이념이 인간에게 구약성서라는 매개를 통하여 요구하고 있는 것은 대강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하겠다.
(1)그 첫째로는 부르짖음이다.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구약성서의 신앙고백적 증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전쟁이란 언제나 억압받는 자, 해방 받아야 할 자의 "부르짖음"의 충동을 받아서만 비로소 일어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성서가 수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들의 문학구조 일반이 한결같이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르짖음"의 충동이 없이 일어나는 전쟁은 "방어전"이 될 수도 없고 "해방전"이 될 수도 없으며 그것은 단지 선제공격에 의한 침략과 지배를 추구하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르짖음"은, 구약성서의 문맥에서 볼 땐,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사라"의 억압을 견디지 못한 "하갈"이 아브라함을 향하여 호소한 "나의 인권을 회복시킬 책임은 당신에게 있소"라는 법적 호소(창 16:4-6), 또 소돔성의 경우처럼 "폭력"(하마스; 렘 20:8; 합 1:2; 욥 19:7 등 참조)에 의하여 인권침해를 당한 개인 또는 공동체가 그 폭력으로부터의 구원 또는 보호를 요구하는 외침(창 18:20-21), 또는 진퇴양난의 민족적 위기에 직면한 홍해 앞의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과 지도자를 향하여 부르짖은 좌절과 탄식의 항변(출 14:10-12) 등과 같은 "부르짖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사시대, 가나안의 문화적 유혹에 넘어간 초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을 맞던 날 부르짖었던 그 "참회"적 성격의 "부르짖음"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부르짖음" 주제는 신명기 26:5-9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형성 역사에 관한 신명기적 회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사시대의 회상, 왕조시대의 회상, 포로기 이후의 전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재(再)회상(느 9:6)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그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해방사를 충동한 핵심적 요소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일이 낳은 폰 라트라는 구약 신학자는 이 "부르짖음"의 현대적 의미를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에서 찾았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에 호소하는 이른 바, 불의한 지배자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운동은 하나님의 해방전쟁을 충동하는 성서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성서적 현실로부터 배운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인간해방전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로운 전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그 둘째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절대 신뢰이다.
하나님의 전쟁이념이 둘째로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두려움 없는 절대신앙의 요구인데, 이른 바, 전쟁용사이신 하나님만을 절대 신뢰하고 칼과 창, 군사력과 국제 정치력 등과 같은 인간적 "힘"을 의지하여서는 결코 안 된다는 요구이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전쟁인 한, 그리고 전쟁의 승리인 해방 또는 구원은 전적으로 유일한 전쟁용사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인 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떤 인간적 군사력, 무기의 힘, 전략의 우수함, 강력한 왕정 정치체제 그리고 국제적 힘의 역학 관계보다도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이어야만 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라 하겠다. 이것은 참 안보와 거짓 안보 그리고 참 평화와 거짓 평화에 관한 예언자적 논쟁(렘 6:13-14; 28:8-9 등)에서도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는 사상이다.
애굽 군대에게 쫓기고 있는 홍해 앞의 이스라엘에게도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전력의 정비가 아니라 오직 야훼에 대한 두려움 없는 신뢰였고, 골리앗 앞의 소년 다윗에게도 필요한 것은 갑옷과 투구와 창이 아니라 오직 야훼의 이름에 대한 신뢰였으며, 수리아, 에브라임 연합군의 위협 앞에 있는 유다의 아하스 왕과 앗수르의 위협 앞에 있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오직 필요한 한가지도 또한 그 무슨 앗수르나 애굽의 도움을 얻는 그런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었다는 것(사 7장, 30장, 31장 등)이 구약 고대 역사가, 신명기 역사가, 예언자들, 시편시인 등의 신념이었다. 그리하여 한 시편 시인은 말하기를, "어떤 이는 병거를 의지하고 또 어떤 이는 말을 의지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야훼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할 것이다"(시 20:7)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류 평화를 위한 해방전쟁의 진정한 승리는 야훼의 법(토라)에 따라 사는데 있는 것이지 폭력적 수단이나 힘의 논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인간해방을 위한 전쟁이 유독 "하나님의 전쟁"인 이유도 또한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3) 그 셋째는 원수 진멸(헤렘)에 관한 요구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쟁"이란 원수의 완전 진멸 없이는 성공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이념이 주장하는 마지막 요구이다. "원수의 완전 진멸", 그것을 하나님의 전쟁설화는 전리품(헤렘; 원수 또는 원수로부터 얻은 모든 것)의 완전한 진멸로서 설명하였고 그러한 "원수의 것"은 그것이 그 무엇이든 "신의 저주를 받은 것"(anathema; 히브리말로는 "헤렘")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성별하여 모두 신에게 바쳐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에 관한 기록에 나타난 이토록 잔인한 완전하고도 철저한 원수진멸의 요구는 가나안의 바알주의와의 절대 불타협을 요구하는 신명기적 이념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주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신 20:16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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