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레미야 › 우리와 다른 하나님

임영수 | 2009.05.21 10:21:2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렘29:10∼14
설교자
임영수 목사
참고
1998. 6. 28.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

오늘의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요시아 왕 13년(B.C.627)에 활동을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B.C. 587년 이후 얼마동안까지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어느 예언자들보다 자기 민족의 불의와 죄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유다왕 여호야긴 때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다인은 왕족, 선지자. 일반 민중을 포함해서 약 3,000명이었습니다. 이때가 이스라엘의 가장 절망적인 어두운 역사의 시기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비애에 찬 애가를 지어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무능력하신 분이라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역사의 시기에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과는 전연 다른 희망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29장 전반의 내용이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예레미야가 본 하나님의 계획은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차면 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킬 것과 그들을 통해 미래의 역사에서 전 인류를 구원할 구속의 역사였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본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이스라엘이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재앙을 준비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평안과 소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로 그 포로의 시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린 때가 아니요, 가장 가까이 계신 때라는 것을 알고, 그때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고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있는 평안과 소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없이 그들 수준에서 만들어 놓은 삶에서 경험해 온 평안과 소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불행과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평안과 소망은 십자가의 형벌 다음에 부활의 때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안과 소망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시기는 십자가의 심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구속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바벨론 포로의 시기가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절망하고 어둡게 느꼈던 그 시간에 그의 자비와 긍휼, 용서의 손길을 펴신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로 그 하나님의 시간을 파악했습니다.

본문에 70년이란 역사의 시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역사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밝아오는 평안과 소망의 시간의 전주곡과 같은 의미를 지닌 시간입니다.

교회에 통용되는 하나님과 관련된 호칭들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호칭들은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는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존재해 가시는 존재방식이 우리의 것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협잡하거나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권모술수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설득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언제나 그 분으로서 계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분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의 신념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공상 세계의 인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전연 관련 없이 우리의 신념에 도취되어 행동하기도 하고 공상 세계 가운데서 허황한 꿈을 꾸기도 합니다. 굉장히 흥분과 열기로 일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전연 상관없는 일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사상을 충족시켜 주는 분으로, 우리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생의 길을 보장해 주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신념에 사로잡혀 살아가다가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좌절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계신다고 인정하는 때는 우리 소원대로 무엇이나 다 되어 갈 때 우리가 세워 놓은 계획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보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정직하게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사상, 우리의 계획, 우리의 생의 설계가 얼마만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에 가까우냐 하는 것입니다. 전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하나님 없이 세워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도 하나님께 그것에 동참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찬동해 주고 편을 들어주고 보장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점이 하나님과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학생이 대학교수 요원으로 일하기 위해 박사과정 시험을 치렀습니다. 불행하게도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그 학생을 만나 시험 결과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때 그 학생은 시험에 불합격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학기에 시험에 다시 응시해서 합격과 함께 장학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 학생을 만났을 때 그는 시험에 합격하고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아직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 대답은 지금은 좀 계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교회의 공통된 착각이 있습니다. 교회를 세상 수준과 똑같이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교회의 편이요, 교회의 수호신이라고 맹신하였던 점입니다. 화려한 건물, 짜임새 있는 제도, 지적 수준이 높은 성직자 확보, 풍족한 재정, 많은 수의 신도가 곧 하나님께서 교회의 편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으로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러한 조건 때문에 전적으로 교회의 수호신이 될 수 있을는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경제가 풍성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마음껏 먹고 즐길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즐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경험한 사실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 그들은 향락에 도취되어 불의와 악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계획한 것은 무엇이나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생각들이 심판 받을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심판 받을 사람들은 심판 받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거나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때는 그 이전이었고, 심판의 순간은 그 분이 가장 가까이 접근해 오시는 때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시간을 바르게 파악하였습니다.

교회가 자기 시대에서 예언자적 안목을 상실하지 않고 깨어 있을 때,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이 세상의 평안과 소망 가운데서 먹고 즐길 때 애통하는 자로 살게 되고, 그 반대로 자기 시대 가장 절망적인 역사의 시기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고, 전심으로 그 분을 찾으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다른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십자가의 심판 다음에 다가오는 평안과 소망의 시간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심판 다음 부활의 때에 경험하는 평안과 소망의 시간에 비춰지고 있는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용서되고, 화해되고, 치유되고, 온전케 된 우리 자신의 모습이며,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시기에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게 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게 됩니다. 우리가 설계하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는 소망과 평안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옛것이 아닌 새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옛 것 가운데서 후회와 갈등, 한숨, 자기 연민이 아닙니다. 옛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 것으로 갈아입는 미래 지향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소망·사랑의 근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신 분이라는데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거짓으로 우리를 합리화시켜 주거나 우리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고 자기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짓 소망, 거짓 평강 가운데 머물게 하며 우리를 합리화시켜 주고 우리의 비위를 맞춰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우상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다른 하나님은 십자가 없이 이루어진 소망과 평안의 삶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합니다.

저는 희망이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다른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거짓 소망, 거짓 평안에서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있는 평안·소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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