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레미야 › 내 중심에 타는 불

정지석 | 2009.05.22 12:21:3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렘20:9
설교자
정지석 박사
참고
새길교회 2008.10.05 주일설교

예레미아 20 : 9, 요한 17 : 21

 한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미 죽음은 받아들여서 별 두려움이 없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들과 이별하는 것이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 간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졸랐습니다. 제발 한번만 다시 세상에 보내주어 그리운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달라는 애원을 하나님은 들어주었습니다. 다만 <눈>만 세상에 다녀오라고 허락했습니다. 세상에 돌아온 그 사람은 먼저 사랑하는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친구들 역시 자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별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내와 친구들을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세상에 다시 온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희곡 <눈 이야기> 중에서).

 오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변화무쌍하고 일시적인 것들 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기대를 걸고 영원한 가치를 두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고 변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슬퍼하며 절망에 빠져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는 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깊이 사로잡힌 것 같습니다. 죽을 수 없어 사는 것,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이 병은 눈에 보이는데서 시작한 것이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으로 깊어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들을 마치 영원한 것처럼 믿고 삶의 궁극적 목적을 두는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종종 사람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 눈에 보이는 일에 삶의 궁극적 목적을 두고 사는데 그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에 궁극적 의미를 주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삶의 궁극적 의미를 둡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신앙은 어떤 것인가를 증언합니다. ‘안’의 일, ‘속’의 일에 깊은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가 유대인 랍비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했을 때도 거죽(겉, 형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곳에서 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14장 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심이라’고 했으며 20절에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증언합니다.

 안과 속의 그리스도의 영을 증언하는 이 요한복음의 증언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에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과거 존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행하고 그 행적을 추모하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그 몸을 만지던 역사적 예수의 현존은 오늘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의 현존으로 이어지고 살아 있다는 것이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입니다. 그것을 알고 체험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적 현존은 몸의 현존보다 더 명료하고 진실하며 더 확실하고 실감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현존은 우리 인간의 온전한 이성과 전혀 모순되지 않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우리 이성을 온전케 하고, 충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감정을 평온하게 하는 능력의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진리의 영이요 평화와 생명의 영으로서 우리들의 마음 깊이 스며드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말끔히 치유합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의 원천이요 우리 삶 안에 실재하는 실체적 진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인의 뗄 수 없는 관계를 깊이 보았던 이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속에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므로 그리스도인은 일상 삶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적으로 실재하여 체험되는 영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을 영적으로 추구할 때 흔히 빠지는 유혹과 위험이 있습니다. 나 홀로 신앙, 내 신앙의 절대화, 기이한 체험 위주의 열광주의 신앙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성서가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현존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7장 21절에도 보면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내적 현존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어떻게 이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하나 됨은 아버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것 같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 증언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상호 마음의 중심 안에 서로 존재함으로 하나 되는 내적 친교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세속 사회 공동체와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방식입니다. 즉, 교회 공동체의 일치는 단순히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성을 존중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공동의 중심을 갖고 견실하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는 길은 어떤 실용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존재양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가, 또한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존재하는가가 그 무엇보다 우선하고 중요한 점입니다. 요한복음이 증거 하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본질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신앙의 건강성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신앙은 사사로운 개인 신앙에 머무는 것이거나 자기 신앙 체험을 절대화시킬 수 없으며, 기사 이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공동체의 내적 일치를 추구하는 영적 신앙과 역사내적 신앙에서 그 건강성은 증명된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기독교 신앙은 역사 내적 신앙입니다. 히브리 경전(구약성서)의 예언자 영성이 이를 잘 증명합니다. 오늘 읽은 예레미아서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영적 신앙을 잘 보여줍니다. 예레미아는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다’고 그의 영적 체험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마다 조금씩 그 표현이 달리 나타납니다. 개역성경은 ‘나의 마음이~’라고 하며 공동번역 성경은 ‘뼈 속에 갇혀있던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라고 표현합니다. 영어성경 Holy Bible은 ‘His word was in my heart like a burning fire' 라고 하며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은 ’Within me there is something like a burning fire'라고 적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라 하든지 심장이라 하든지 그것은 ‘안’과 '속‘을 의미하므로 새 옥스퍼드 주석 성경은 ‘Witnin me’ 즉 ‘내 안에’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속에서 불타는 그 영적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명시하기도 하지만 새 옥스퍼드 주석 성경은 Something,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라 했습니다. 모호한 표현이지만 그래서 훨씬 명료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내 안에 불타는 그 무엇(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예레미아의 고백은 히브리 예언자의 영적 신앙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영적 고통은 역사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아가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던 이유는 그의 역사적 증언과 활동에 기인합니다.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 활동하던 예레미아는 유다의 멸망과 재앙을 선포했습니다. 그로인해 당시 유다의 번영과 풍요, 안정과 질서를 강조하던 권력층에 의해 옥에 갇히고 매를 맞습니다. 번영과 안정을 바라던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조롱과 비난, 모욕을 겪게 됩니다. 안정과 번영을 외쳐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재앙과 멸망을 선포하니 모진 곤욕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아는 세상에서 겪는 모욕과 고통으로 여호와의 예언을 대행하고 싶지 않으나 이미 그의 중심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영은 예언자를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그의 중심에서 여호와를 향한 열정이 불처럼 타오르고, 포로로 끌려가 혹독하고 비참한 곤경을 겪을 하나님의 민중들을 생각할 때 그 가슴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히브리 경전에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선포합니다. 예언자의 재앙 선포는 하나님의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예언자의 멸망선포는 곧 새로운 건설과 희망의 선포를 의미합니다. 구약성서 신학자 부르거만은 예레미아 당시 체제 수호 이데올로기가 예루살렘의 종말을 은폐하는 상황에서 예레미아는 시적 은유를 통해 종말의 아픔을 토로했고 하나님께서 이 고통에 함께 하심으로 이스라엘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고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르거만은 멸망과 희망을 선포하는 히브리 예언자들을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의 창조자’라고 부릅니다. 예언자의 영적 체험 신앙은 정치 사회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역사 내적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믿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약성서와 똑같은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 히브리 경전을 구약성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삼고, 역사적 상황 속에서 증언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영적 신앙의 회복,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 내적인 영적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영적 신앙이라 하면 내세 지향이면서 동시에 현세 기복적인 이상하고 기형적인 혼합형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신앙이라든가 체험신앙이라 하면 거리끼고 외면하고 싶은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역사 안의 영적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겉의 신앙보다는 ‘속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과 삶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점에서 생각케 해주는 것이 있어 소개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단순한 신앙입니다만 이 사람들은 독특한 신앙생활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직접 소통을 간구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제가 처음 이 사람들의 예배에 참석했을 때 그들은 고요하게 앉아있었습니다. 간혹 누군가 중간 중간 일어서서 무언가를 짧게 말하고 앉곤 했지만 끝까지 그렇게 고요하게 앉아있었습니다. 다 끝나고 일어나는 그들에게 저처럼 처음 그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이, 아마도 일반교회 예배에 익숙했던 사람이었겠지요, Worship service는 언제 시작합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worship은 이미 저 안에서 있었고 service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고요하게 앉아 드리는 침묵 예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의 현존을 체험하는 이들의 신앙은 생활문화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들 신앙 양상을 기다림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기다림의 신앙은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여유와 틈을 주고 진지함과 유머를 구사하는 생활문화를 낳았다고 봅니다. 이 사람들은 토론 중에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거나 흥분하는 일이 없습니다. 차분하게 토론하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며 경청합니다. 고요함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신앙생활이 낳은 생활문화요 태도라고 보입니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고 성찰하는 마음의 습관을 갖고 있으며 누구든지 선입견을 갖지 않고 차별치 않고 친절하게 대합니다. 이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다수자 논리를 피합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직접 소통을 추구하지만 늘 공동체의 일원으로 독대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을 지극히 존중하면서도 공동체 삶의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모든 일을 만장일치제로 결정합니다. 다수결로 소수 의견을 꺾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문제에서부터 정치 사회의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인내를 갖고 토론합니다. 의견이 부딪쳐 합의가 어려울 때 이들은 고요한 침묵 시간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침묵 후에 다시 토론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민감성이 매우 뛰어납니다. 옥에 갇힌 자를 위한 돌봄은 국제 엠네스티 운동을 탄생시켰고, 국내외의 재난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활동은 옥스팜 운동과 같은 사회복지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구호와 봉사 활동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영적 신앙과 사회적 증언의 일치를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체험은 반드시 증언되어야 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즉, 내밀한 신앙 체험은 역사적, 사회적 증언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인의 내밀한 영적 체험은 미신적 신비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이 사람들의 사회적 평화 증언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2002년 영국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을 때 저는 이 사람들의 평화 행동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 남부에 있는 공군 기지에 미군 공군이 미사일을 싣고 이라크를 폭격하게 될 것이란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점심시간에 누군가 이런 소식을 전했고, 게시판에 평화 행동(Peace Vigil)을 알리는 쪽지가 붙었습니다. 누군가 행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의 행동은 절대로 공동체의 이름으로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든지 강요하는 일이 없습니다. 개인의 자발성을 철저히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참여하든지 안하든지 그것이 크게 논쟁거리도 편을 가르는 일도 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평화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6명인가 모였고 자동차 두 대에 나눠 타고 2시간여 길을 갔습니다. 한적한 시골 외딴 곳에 위치한 공군기지였습니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부대 정문에는 보초들이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이국인이었던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좀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평화행동팀의 행동은 의외였습니다. 정문 맞은 편 길가에 차를 세운 평화행동팀은 뒷 트렁크에서 간이 의자를 꺼내 빙 둘러 앉아 고요한 침묵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구호와 충돌등과 같은 일반 시위 행동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맥이 탁 풀리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습니다. We Love Peace. Do not attack Iraq이란 글귀를 적은 작은 플랜카드를 옆에 세우고 빙 둘러앉아 한 시간 정도 고요히 침묵하는 시간을 갖고 비스켓과 물을 마시는 모습은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별일 없이 돌아왔습니다. 공군기지 정문의 보초병들도 이상한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조용히 떠나는 것이 이상했을 것입니다. 그 후 이 평화 파수꾼 운동은 매주 지속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미사일 기지 앞에서의 이 사람들의 평화행동을 종종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미사일 기지 앞에서 고요하게 예배드리는 이들의 행동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많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영적 체험을 정치 사회적 문제와 일치시킨 역사 내적 신앙으로 증언하는 생활 문화를 이 사람들은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의 현존을 내 안에서 확인하고 우리의 불완전한 이성으로 가둬 온 그리스도의 영을 자유로이 해방시킬 때 우리의 내적 삶은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도 온전해 질 것입니다. 이 영적 신앙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깨끗이 치유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현존한다는 사실을 확신함에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는 그 증거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내적 하나 됨에서 보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역사적 참여의 영성으로 증거 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영은 진리와 사랑, 생명과 평화의 영으로 우리 안에 현존합니다. 역사적 삶속에서 진리가 선포되고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그리스도의 영은 현존합니다. 요한 1서 16절을 읽으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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