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참된 자유와 해방

조용기 | 2009.05.23 14:48:4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4:16~21
설교자
조용기 목사
참고
2004년 8월 15일 주일2부설교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참된 자유와 해방’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압박과 설움의 노예생활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젊은 청년들은 강제징병으로 총알받이가 되었고 젊은 여성은 위안부 성노예인 정신대로 끌려갔고 장년들은 부국대로 탄광과 강제노동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애써 지은 농사는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다 빼앗기고 사람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고 대포와 포탄을 만든다고 숟가락도 솥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의 감시는 몸서리쳐졌습니다. 저는 그 시대에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남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고 온몸으로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름도 빼앗겼고 말도 빼앗겼고 글도 빼앗겼습니다. 한국말을 쓰다가 들키면 하루종일 얻어맞고 벌을 섰습니다. 저는 제 이름이 그때는 조용기가 아니고 요시다 요오끼였습니다. 정말 슬픈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던 그날 사람들은 급조한 태극기를 손에 손을 들고 처음듣는 애국가를 부르며 거리를 꽉 매웠습니다. 일본헌병과 경찰들은 도망을 쳐버렸고 경찰서는 부서지고 일본신을 섬기던 가미다는 박살이 났습니다. 그때 감격하여 부르던 노래 한구절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노래를 전혀 모를것입니다. 제가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오는날. 우리의 앞뜰에 무궁화 피었네. 동포여 동포여 이 날을 잊지를 말자. 영원히 자유를 길이 누리세.”
제가 목소리만 좋으면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처럼 열심히 노래를 부르겠는데 목소리가 나뻐서 자신이 없어서 잘 못부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또 다른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적 해방과 자유인 것입니다.

[본론]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예수님께서는 첫째로,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과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인간은 저주와 가난의 종이 되고 말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사야 1장 28절에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야웨를 버리므로 저주를 받고 패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였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가난해졌습니다. 영이 죽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정체불명의 잃어버린 존재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간은 정체불명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현실에 붙들려 사는 동물적인 인간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것이 정체불명의 존재인 인간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마귀는 혼미한 신이 되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마음이 혼미하여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고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가난인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인간은 생활의 가난속에 떨어지게 된것입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가시와 엉컹퀴를 헤치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어떤 사람 말하기를 ‘아, 오늘날 세계는 그와 같지 않다. 사람들은 녹색혁명을 통해서 농업을 개발하고 세계의 사람들이 다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가난은 과학의 문명발달한지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입니다. UN식량농업기구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의 기아인구는 현재 8억 4천 2백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들은 만성적인 영향결핍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중에도 특히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의 피해가 큽니다. 매일 천여명의 여자들이 간단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2만명의 어린 아이들이 야채와 70원하는 비타민제를 먹지 못해서 눈이 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1천 1백만명의 아이들이 기아와 영향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수많은 어린이가 학교에 나갈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노동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아동노동자가 2억 4천 6백만명에 달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인간은 저주받은 땅에서 생활에 궁핍과 곤궁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도 굶주린 배를 앉고 몸부림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런 가난의 노예 생활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여러분 우리가 말하는 이상적인 천국이 저 멀리 모르는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곁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우리에게 가져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잃어버린 자아를 찾게 된 것입니다. 영이 죽은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용서와 의와 영광과 평안을 얻고 잃어버린 자기를 찾았습니다. 다른사람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잃어 버린 인생을 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보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사는지 환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잃어 버린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자기를 찾은 존재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니라 자기정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게 구원받고 찾은 존재가 된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다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서 정체성이 확실하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으며 우리는 거룩함과 성령충만한 존재가 되었으며 치료받고 건강하게 되었으며 축복받고 형통하게 되었으며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얻은 확실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영이 살아났으므로 영의 가난함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요하게 된것입니다.
세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리스 정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되었을 때 그는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던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에 물들어 가지고서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버리고 불신자가 되어 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노력하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세계와 인류역시 무한이 발전해 나갈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점점 허무해져갔습니다. 그가 당시를 회상하여 기록한 글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공포심과 혐오감과 심적 고통으로 꽉차 있었다. 나는 전쟁터에서 많은 살인을 했고 결투를 벌여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도박을 하고 농노들은 희롱하고 착취했다. 나는 간통을 저지르고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고 폭행과 살인을 했다. 내가 범죄하지 않은 죄는 하나도 없다. 나는 흉악한 죄인이다.” 사람이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위대한 삶을 산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죄의 포로가 되어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삶을 살던 톨스토이는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과 많은 사형수들의 죽음을 본 후 인간존재의 근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우고 신봉했던 철학과 과학을 통해서 답을 얻으려 했지만 만족할만한 답을 결코 얻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그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저서인 참회록에 기록한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영이 살아나고 잃어 버린 자아를 찾게 되고 그 결과로 지은책이 부활이라는 위대한 소설을 지어낼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수 있고 거룩하고 참다운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이론이요, 이상에 불과합니다. 바울선생도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 오실 때 비로써 참 자유와 해방을 얻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죄악의 압박과 설움에서 오랜 세월 고통한 우리의 힘으로 해방과 자유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해방과 자유를 허락해 줄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버지의 돌보시는 자녀가 된것입니다. 영적으로 해방과 자유를 얻어 부요하고 풍부한 영적 삶을 얻을뿐 아니라 육신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버지 없는 자식이 아니라 이제 아버지가 돌보는 자식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너희 필요한 것을 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 아니고 이제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천지와 만물의 중심이 되시고 우주를 다스리시며 역사를 지으시고 역사의 중심이 되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을 가지신 영원무궁하고 지극히 크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런분이 우리 아버지가 된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했으니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복된 삶을 누리고 삽니다. 서울에 있는 여러 교회에서 신자와 불신자 각각 1백명을 대상으로 생활수준을 조사해 보았더니 불신자들에 비해 신자들의 생활 수준이 월등히 앞선 것이 나타났습니다.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회원국도 터키와 일본을 제하고는 모두 기독교를 믿는 국가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난의 저주에서 해방된 삶을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가난, 육체적인 가난에 포로되고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주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놀라운 능력으로 영적인 가난과 물질적인 가난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2.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둘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에덴에서부터 마귀의 포로가 되었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등돌리자 그 다음에는 마귀의 손아귀에 잡혔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면 자기들 스스로 살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해요. 하나님께 등을 돌리면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요. 집을 떠나면 깡패들에게 잡히게 돼요. 중립지는 있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을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알든 모르든 그 속에 공중에 권세잡은 마귀의 영이 들어와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가 있지. 나를 뭐로 생각하느냐. 내 속에 마귀의 영이 있다고. 그래요. 마귀의 영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세상으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따라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영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루에 1초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노예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영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마귀에게 포로되어 살고 죄의 포로가 된것입니다. 죄의 누룩으로 인격이 부패해졌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짖자 죄가 사람속에 들어오매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해졌습니다. 부풀어졌습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의 종이 되어 죄를 범하고 삽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포로가 되어서 우리는 허덕일수 없습니다. 죄가 죄인줄 알아요. 바울선생도 말하기를 “우리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체로는 죄의법을 섬긴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법이 죄의 법에 항상 잡혀서 끌려갑니다. 죄짓지 말아야지. 죄짓지 말아야지. 죄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죄를 짓습니다. 오늘만 짓고 내일은 안짓는다고 하면서 내일도 짓고 모레는 안짖는다고 하는데 모레 또 짖습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해방되지 못합니다. 거기에다가 인간은 절망의 노예, 희망을 잃어버린 존재인 것입니다. 욥기 8장 13절로 14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잠언서 11장 7절에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에베소서 2장 1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저 동물처럼 육신의 욕구만 충족하고 살다가 영원한 흑암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인해 절망의 노예가 되어 희망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것은 너무나 비극입니다.
영국이 나은 세계적인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안락은 하늘에 있고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는 오직 불안과 고뇌와 탄식이 있을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사상가요, 문학가인 핸리 데이빗 소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요한 절망속에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떠들어 제키면서 나는 절망이다. 말하지는 않지만 그 마음 깊은속에 절망의 눈물을 머금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국의 성직자 토마스 플러는 “사람은 비명과 함께 울면서 태어나고 고통과 함께 살다가 결국에는 절망하여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응아하고 울면서 태어나지요. 그러나 세상의 삶은 고통뿐입니다. 죽을때는 절망하고 죽는 것이 오늘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압박과 설움에서 어둠과 괴로움속에서 사는 인생들을 해방시켜 주고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5절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렇게 말씀했으며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몇 년전에 버지니아에는 있는 대학에서 강의와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묵었던 호텔이 브라운네독이라는 호텔인데 그곳에 있는 벨보이 한 사람이 굉장히 얼굴에 웃음을 가지고 굉장히 친절해요. 흑인인데. 그런데 하도 사람들이 아침을 같이 먹자. 점심을 같이 먹자. 저녁을 같이 먹자 하기 때문에 손님들하고 밥을 먹으면 긴장이 되어서 소화되 안되고 밥맛도 없어요. 밥은 친한 사람끼리 먹으면 맛있게 먹고 대화도 좋은데 손님하고 먹으면 예차려야 되고 손님의 말에 귀를 귀울여야 되고 긴장해야 되기 때문에 손님하고 밥먹는 것 전 딱질색입니다. 그래서 그날 강의를 마치고 손님들이 같이 식사하자고 하기에 내가 손님들에게 다 변명을 하고 그 벨보이에게 말했습니다. “어디 태국식당 없느냐?” 제가 태국음식이 매콤하니까 좋아합니다. 태국식당에 데려가 달라고 하니까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그래서 자기 차에 내가 탔는데 차를 운전하는데 태국식당 찾아 다닌다는 것이 시내를 뱅글뱅글 돌더니만 나중에 나를 갖다놓는 곳이 월남식당에 내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월남식당에 들어가니까 먹을것이 있어야지요. 쌀국수밖에 없어. 그래서 내가 그 벨보이 보고 말했습니다. “당신 이렇게 멀리까지 나를 차를 태워서 식당 찾는다고 애를 썼으니 점심을 나와 같이 먹자.”고 그러니까 앉더니만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그래서 “아니 당신 눈물을 줄줄 흘리느냐”고 하니까 “제가 2년전에 기도에 관한 목사님의 책을 읽고 너무 감동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도 조목사와 식사한번 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면서도 내 속으로 내가 웃었습니다. 나같은 흑인 목사가 조목사님 실제 만나본적도 없는데 어찌 조목사하고 식사를 같이 할수 있겠느냐.” 내가 우스운 기도를 했다고 했는데 오늘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고 자기가 태국 식당을 찾지 못하고 월남식당에 온 덕분으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어서 고맙다고. 그래서 밥을 먹으면서 제가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말하기를 그는 어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이혼을 하고 나가고 난 다음 편모슬하에 자라면서 사회적인 반항심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갱단에 들어가서 폭력도 행하고 마약도 먹고 도둑질도 하고 못한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갱단원의 사람들도 죽이고 대다수 그의 친구들은 총에 맞아 죽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자기도 감옥에 내집 처럼 들락날락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폐인이 되고 자기가 그렇게 안하려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제는 자기 앞에는 갈길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약 딜링 때문에 경찰에 수배를 받게 되자 어머니가 피하라고 너희 아버지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네 번째 여자하고 살고 있습니다. 가기 싫지만은 아버지 집에 도망을 가서 있는데 네 번째 여자가 예수를 지극히 잘믿는 여자라 그 집에 있는 동안에 밤낮으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강제로 교회로 끌고가는데 그집에 붙어 먹고 사니까 아무리 깡패라도 순종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다가 회개하여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고 성령세례를 받아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충만해지자 모든 원한과 저주와 마약중독과 악독에서 완전히 해방이 되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마치 구름위에 걷는 것 같고 너무나 황홀하고 기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 드리고 변화를 받아서 그길로 회개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여 주의 종이 되고 이제는 마약중독자와 깡패들 폭력배들을 전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그들을 위한 교회를 세워서 목회하고 있는 월급이 부족해서 시간나는데로 호텔에 벨보이로 일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는말이 이 세상에 미국 정부도 경찰도 FBI도 자기를 변화시킬수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난 다음에 순식간에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롭게 해주는 능력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자기는 나에게 증거할수 있으니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이러한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습니까? 변화는 오랜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들어오면 순식간에 변화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순식간에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요, 오늘날도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는 위대한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포로된 자에게서 자유를 줍니다. 마귀의 포로, 죄악의 포로, 절망의 포로에서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3.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셋째로,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한다고 했습니다.
아담의 타락후 영이 죽고 영안이 어두어지므로 영적세계를 상실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았어요.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하나님과 기쁘게 지냈습니다. 영의 세계가 아담은 그 본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짖자 영의 눈은 어두어졌습니다. 눈이 안보이면 사물을 볼수 없어요. 여러분 눈을 못보시는 분에게 아무리 무지개 색깔을 얘기해 보십시오. “여보, 무지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청, 주황, 황, 녹, 청, 남, 자 아름다운 색깔을 가진 무지개가 있어요.” 들어도 이해 못합니다. 안보이니까. 이 장미꽃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러나 안보이니까 알수가 없지요. 못본다는 것은 큰 불행이요 비극인 것입니다. 못본다는 것은 실상을 설명해도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지요. 안믿는 사람에게 천국에 대한 이야기 아무리 해도 영안이 어둡기 때문에 알수가 없으므로 바보같은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깨달을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편 10편 4절에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왜, 영이 죽었으니까 하나님이 안보이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요.
마태복음 6장 23절에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눈이 안보이면 몸이 다 캄캄하지요. 영안이 안보이니까 삶 전체가 캄캄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요. 영이 없는 혼적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성과 과학을 통해 체험밖에 모르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혼은 이 세상에서 이해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과학을 통해서 아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혼만 살아서 인간은 혼적 존재가 되고 육신 감각을 통한 감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성경을 믿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고등학문을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교육을 받고 이성과 과학을 통해서 혼적 삶을 사는 사람은 초등학문인 것입니다. 초등학문하는 사람이 여러분 고등학문 하는 사람을 비평할수 있어요? 초등학교 학생이 대학생을 보고 이것해라 저것해라고 가르킬수 있나요? 없잖아요. 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고등학문을 하는 사람이요, 이 세상의 학문은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등학문의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모략당해서는 우리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로 나가면 영안이 띄어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유대인의 율법학자요, 존경받는 선생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봤습니다. 그날은 밤이 어둡기는 하지만 달이 두리둥실 떠있고 구름사이로 달이 나왔다 들어갔다 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저녁이었습니다. 이 니고데모는 사람들에게 들키는 큰일납니다. 예수님을 이단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그림자가 지면 걸음을 걷고 담벼락 사이에 붙어서 예수님 있는 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안보내시고야 이런 이사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깜짝 놀랬습니다. “무슨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그는 초등학문밖에 모르니까 알수가 없지요. “주여 어떻게 사람이 거듭납니까? 나같이 늙은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것을 의심치 말라.” 그때 바람이 확 불어서 나무가 흔들리니까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다 이와같다.” 니고데모는 도저히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서 구원을 받지 아니하면 영안이 열리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는 절대로 못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니까 예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셔서 거듭나는 길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바라보는 길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수만 있으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순식간에 영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죄수 한 사람이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워낙 성격이 포악한데다가 툭하면 말썽을 일으켜서 간수들에게 가죽채찍으로 수없이 맞았습니다. 교도관들은 그를 독방에 넣기도 하고 교육도 시켜 보았지만 전혀 변화가 되지 않아 나중에는 경찰과 교도소에서 이사람은 변화될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라고 이미 도장을 찍어 버렸습니다. 긴 복역기간이 끝나고 그가 출소를 했는데 마침 교회에 속한 작은 숙박시설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시키는데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평생에 그렇게 죄악으로 완악해지고 채찍을 맞아도 울지 않던 그가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감화와 감동력이 와서 그는 몸부림을 치며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자 성령으로 거듭나서 즉시로 그 자리에서 새사람이 되고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것입니다. 그는 180도 변화 되어서 새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고 그때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18년 동안 성실하게 교회에 봉사하여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변화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4백번의 가죽채찍과 40년의 교도소 생활을 해도 변화되지 않았지만 성령이 임하자 불과 1분만에 새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변화되는데 시간이 걸리는게 아니에요. 포로된 사람을 강한자가 와서 해방시켜 주면 순식간에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변화받는데 오랜시일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마귀가 떠나가고 어두운 눈이 밝아지면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이 어둡다가 밝아져서 자기 선곳이 벼랑끝이 서있는 것을 알면 당장 돌아서지 그 길로 눈뜨고 벼랑으로 걸어갈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영을 살려서 영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라는 말이 거기에 있습니다. 고백하자마자 영안은 열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4.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하심
넷째로 주님은 눌린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눌린자라는 것은 사람을 눌러서 인권을 박탈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종살이 하던 사람은 주인의 채찍아래 있고 주인의 억압아래 있어서 인격적으로 억압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정 36년 동안에 일본 사람들에게 얼마나 억압을 당하고 눌렸습니까? 우리는 기가 죽고 이름도 자기 이름 못부르고 말도 자기나라 말을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인격적으로 억압당하는 삶을 산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에 인권을 굉장히 주장하고 인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국내에서 그렇게 인권회복을 주장하고 인권에 대한 강한말을 하면서 왜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까? 국제연합에서 북한인권을 위한 투표할 때 왜 우리나라는 기권을 합니까? 미국 하원에서 북한인권에 대한 결의를 할 때 왜 우리 한국에 소위 정치인들이 그것을 반대합니까? 이 도대체 알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권, 인권, 인권... 그렇게 주장하면서 우리와 같은 동포 바로 저 휴전선 건너편에 있는 북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인권을 약탈당하고 있는데 왜 그사람들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도 안합니까? 비겁하지 않아요? 위선하지 않아요? 인권이란 말을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진실함위에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 인권이란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국제사면위원회와 비영리 인권단체인 프리덤 하우스는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인권유린국가중에 하나로 지목했습니다. 북한은 지금도 배급제를 통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한하고 있으며 교육, 직업, 주거, 여행 등 생활 전반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주민을 출신성분과 충성심에 따라 핵심계층 약 28%, 동료계층 약 45% 그리고 적대계층 약 27%의 3개층으로 구분해서 차별대우합니다. 그런데 적대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유사시 처형대상으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법적인 인권 보호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도 않은데다가 아직도 당의 지시가 법보다 더 우선시 되어 인민재판과 공개처형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귀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지는데 그곳은 환경도 열악한데다가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약 20만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감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난으로 인해 생기는 인권침해입니다. 식량배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굶어죽는 사람이 허다한데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소를 잡아 먹은 사람을 공개처형하는 일이 있다고 한겨레신문 2004년 4월 5일자에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실정 때문에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수만해도 약 30만명에 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까? 북한정권 때문에 북한의 인권은 쉬쉬하고 중국정권 때문에 중국에서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는 방황하는 30만 탈북 우리 동포들에 대해서 쉬쉬하고 말도 안합니다. 그런 인권단체가 우리 한국에 수없이 있는데 비겁하고 야비하고 정치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위선적인 단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으로 인권을 주장하면 내가 정치적인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욕을 얻어 먹을지라도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고난당하고 압박당하는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가 동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눌린자 삶의 자유를 잃은 자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마음과 육체에 병든자를 위해서 주님께서 자유와 해방을 주신 것을 사도행전 10장 3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개인, 가정, 생활, 사회, 육체의 병까지 주님은 눌린자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몽골성회때 참으로 감동을 느낀 것은 태어날때부터 귀머거리와 벙어리된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어머니가 어린딸이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말을 반복하고 기뻐하자 엄마가 박장대소를 하고 얼마나 기뻐하든지 뭐 감격해서 어찌할바를 몰라요. 난 그것을 보고 자유와 해방이 저렇게 좋다. 마귀에게 눌려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딸이 듣고 말하게 되니 저렇게 기뻐하는 구나. 오늘도 여러분께서 비디오에서 보신바와 같이 폐암에다가 골수암에 걸려서 들것에 드러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사람이 집회 이튿날에 그는 들 것을 박차고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자유 아닙니까? 마귀에게 눌려서 자유를 잃어 버리고 억압당하고 죽음에 처해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귀는 나쁜 마귀, 예수님은 좋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나쁜 마귀가 좋은 것 줄수 없고, 좋은 예수님이 우리를 나쁘게 하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의 삶에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온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이사야 9장 4절에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겠다고 말했었습니다.
이사야 30장 26절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여러분 사실 그렇잖아요. 고통과 억압과 괴로움에 처했던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면 똑같은 날인데 똑같은 햇빛인데 달빛이 햇빛같이 보이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 햇빛같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억압하고 고통중에 있을때는 모든 것이 캄캄하지만 해방과 자유를 얻으면 모든 환경조차도 아름답게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토레니에라고 하는 정신과 의사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스위스에서 30년 동안이나 여러 정신과 의사를 찾아 다니며 치료를 받은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대개 정신과 의사들은 그병의 원인을 어린시절에서 찾습니다. 어린시절에 억압당하고 매맞고 고통당하고 슬픔을 당하고 박대를 당한 그러한 경험이 잠재 의식속에 있어서 그것이 정신병을 유발하는데 그 어릴때의 잠재의식속에 감추어진 고통과 상처를 들추어 내서 그를 치료해 주므로 정신적인 병에서 해방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토레이니씨 앞에 나와서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어릴 때 상처입은 것이 없어요. 그 토레이니씨는 아주 뜨겁고 열렬한 기독교 신자인데 “이 여자는 마음속에 상처가 없는데도 정신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니 왜 그럴까? 이것 아무래도 마귀가 역사하는가보다.”고 그래서 그 여자를 예수께로 인도하고 안수기도를 해주니까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고 자복하더니만 그만 그 정신병에서 깨끗이 나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30년 동안 여러 유명한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하고 분석해도 속수무책이었던 그녀의 병이 치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치유받은 후에 토레이시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껏 세상에 이렇게 황홀한 자유가 있는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30년 동안이나 저를 억눌었던 억압에서 저는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과 자유가 얼마나 좋습니까?

[결론]
우리는 일정 36년의 노예생활에서 우리의 힘이 아닌 연합군, 특히 미군에 의하여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바로 은혜의 선물로 자유와 해방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삶의 존재적 노예생활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것도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선물로 값없이 믿음으로 해방과 자유를 선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윤리와 도덕의 교사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마귀와 죄와 절망과 질병과 마귀의 억압에서 종살이하던 우리들을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속에 넘치는 해방과 자유를 주시며 이미 예수를 마음에 믿은 사람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말씀한데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마귀는 또다시 와서 여러분은 종으로 삼으려고 온갖 발버둥을 다칩니다. 그러나 말씀에 서고 믿음에 굳세게 서서 마귀를 당황하게 대적하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압박과 설움, 어둡고 괴로움속에 살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유와 해방을 주고 광명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어디서 와서 왜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슴에 품고 살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마귀의 속박은 영원히 물러갔습니다. 마귀의 정사와 권세는 영원히 철폐 되었습니다. 율법의 정죄와 의식도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인간 행위의 자랑도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축복으로 해방과 자유를 얻었으니 예수믿는 사람은 이 자유속에 살고 아직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하고 자유를 쟁취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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