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전 › 십자가의 능력/

김필곤 목사 | 2010.02.06 22:12:0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고전1:18-25
설교자
김필곤 목사
참고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아마 세계 장한 어머니 참피언 대회를 하면 우리 나라 어머니들이 금메달을 탈 것 같습니다. 우리 어머님들 참 자식들 끔찍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유치원 선착순으로 받는다고 하면 하루 전부터 가서 줄 서있습니다. 전학 선착순으로 받는다면 밥을 굶으면서도 줄을 서게됩니다. 외국에 가서도 한국 어머니들 이름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 역사상 최초로 어머니와 딸이 동시에 학교에 다니는 기록을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입니다. 미국 육군 소령이자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을 다닌 서진규씨와 그녀의 딸입니다. 그분은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분은 경남 동래군의 어촌 마을 월내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풍문여고를 마친 뒤 종로에 있는 가발공장에 취직했다 19살에 미국으로 식모살이로 갔습니다. 식당 웨이트리스를 하며 못다 한 공부에의 열정을 불태워 5개 대학을 옮겨다니며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남편의 폭력으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 그녀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미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소령이 되었고 딸을 하버드 대학에 보내고 자신도 1990년 9월, 마흔 둘의 나이에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 1992년 봄에 하버드대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 과정에 합격했습니다. 그의 자녀 교육과 인생 성공의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목표에서 눈을 떼지 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힘을 얻고 인생에 승리하려면 목표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됩니다. 운전할 때 목표점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면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볼록렌즈로 종이를 태울 때도 초점을 정확히 맞추면 조금 지나면 불이 붙습니다. 그러나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하루가 지나도 불이 붙지 않습니다.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목표에서 눈을 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시선을 다른 여인에게 줄 때 가정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학생이 공부에서 목표를 다른 좋지 않은 것으로 돌릴 때 문제아가 됩니다. 기업가가 목표를 기업경영에서 눈을 뗄 때 그 기업을 오래 갈 수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목표에서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릴 때 신앙인은 실패하기 쉽고 사탄의 노리개 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일평생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떼지 말아야 신앙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온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에 우리의 눈이 고정되면 우리 인생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1. 십자가의 도( 복음)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18, 24)
18, 24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도는 " 호 로고스"로 그 말씀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게 되는 진리 즉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 이 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사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죄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에 복잡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특히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은 분쟁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 분쟁은 누구에게 속하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은 아볼로에게, 어떤 사람은 게바에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서로 주장하며 자랑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3). 십자가를 떠날 때, 십자가에서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때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만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인간을 보기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제도를 보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떼고 자꾸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신앙의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능력입니다. '뒤나미스'입니다. 다이나 마이트입니다. 폭발력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사랑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용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율법의 포로에서 참 자유함을 누립니다. 양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보았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십자가을 바라볼 때 상한 심령이 고침받고 쓰러지는 심령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씻어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악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곳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도가 있는 곳에는 절망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어떠한 죄악도 용서받는 능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공자가 죽은 자를 살립니까? 석가가 죽은 자를 살립니까? 소크라테스가, 아니면 바울이, 아볼로가, 베드로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1) 이 구원의 능력은 차별이 없습니다(24).
가난한 사람도 부한 사람도, 잘 생긴 사람도 조금 잘 생기지 못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종도 자유자도 차별이 없습니다.
2) 이 구원의 능력은 사람의 것보다 강하고 지혜있습니다.(25).
지존파 살인 기계, 인육식을 하며 죽이지 못하여 한을 품은 자들이 무엇으로 변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 완악한 마음도 십자가의 도가 들어가니까 봄눈 녹듯 녹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63년 10월 19일 새벽 2시,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이덕주소령 일가족 6명을 몰살시킨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도끼 살인 자 고재봉의 짓이었습니다. 그는 박중령의 집에서 잔심부름하다 작은 물건 훔쳤습니다. 마침 가정부가 보고 난리를 치자 도끼로 위협하다가 살인미수로 육군 형무소에서 7개월 복역하였습니다. 그는 복수의 일념으로 감옥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자마자 찾아가 온 가족을 도끼로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박중령은 전속되어 가 억울하게 다른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신문에서 본 처음 수간부터 대한성서공회 권서자 안선국집사(현 목사,한길교회)가 사명감을 느끼면서 새벽기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5000번 수인번호, 고재봉을 처음 면회했을 때 요3:16절 읽어 주고, 침묵하다가,"형제여 당신도 죽고 나도 죽고, 당신도 죄인, 나도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습니다. 면회를 거절합니다. 신약성경 넣어주고 돌아왔습니다. 고재봉이 그것을 뒤척이다가 요3:16절 눈이 닿았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이냐!" 그는 스스로 면회 신청했습니다. 그새 다섯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큰 성경 넣어달라고 하여 넣어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아 이 성경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내 인생은 아마 변했을 것입니다," 새벽 교회 종소리에 일어나 앉아 찬송으로 시작 기도하고 성경읽기 시작합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말 들으사" 어느날 갑자기 큰 소리 외치며 흐느꼈습니다. "내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서 예수님을 안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합니다. 방언 체험을 합니다. 전도 시작합니다. 감방이 변합니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새 소망이 생겼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던 전날밤 감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나가면 꼭 교회에 나가라고 당부를 합니다. 검찰관이 마지막 할말을 물었습니다. 그는 "요3:16"을 말하였습니다. 또 할말은 "검찰관 님 제가 웃을 때 방아쇠를 당겨 주세요, 찬양을 부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9명 헌병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습니다. 찬송 끝내고 웃고 있을 때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형수 고재봉과 같은 살인마를 변화시키는 것이겠습니까? 교양으로, 소크라데스의 명언으로, 섹스피어의 작품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들어가면 사람이 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들어가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기픔으로, 근심이 평안으로, 증오가 사랑으로, 다툼이 평화로 변화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들거가면 가정도, 사업의 현장도, 직장도 교회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2. 이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능력을 무엇으로 전달합니까?(21)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전도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전도'라는 말, '케르그마'는 '예고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케룻소'에서 온 말로 '넓은 선포', '큰 선포', '포고' 곧 설교를 뜻합니다. 참으로 전도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구제하고 약한 자를 도와 주고, 사회사업을 하고 풍성한 교제가 있다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의미가 없는 교회일 뿐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의 증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본질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고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좋은 교회는 수가 많이 나오는 교회, 시설이 좋은 교회, 많은 구제사역을 하는 교회이기 보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될 수 없습니다. 전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24) 인간을 구원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택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왜 그렇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세상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입니다.
(1)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를 채택하지 않고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 29:14 (LXX)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소피아로 사물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총명은 쉬네시스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발휘할수 있는 독특한 능력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인간의 지혜가 상대적이고 의존적(依存的)이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이세상 지혜를 영적이 세계에 대하여는 미련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20)
지혜있는 자는 두뇌가 우수한 자입니다. 변사는 헬라의 철학자나 변론가입니다. 선비는 유대인 서기관들을 말합니다. 아무리 그들의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연계시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별계시를 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18)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면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됩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됩니다.
(1)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출애굽 때부터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적적인 사건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진정으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십자가인 것을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정작, 우리 인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나 엘리야, 엘리사 시대처럼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표적은 표적으로 끝나는 것이지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들을 영원한 죄와 죽음으로부터 살리는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를 상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악자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말하는 것은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걸림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롬9:33,벧전2:8) 그러나, 이 십자가야 말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니의 능력"(롬1:16)입니다. 십자가는 연약함을 상징하는 표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성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의 구원이 아니라 아담 이후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는 도구였습니다.
(2)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장 비천한 죄인들이나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십자가와 구세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된다 해도 육신의 한계로 인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지혜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의 분석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볼 때에 미련하기 그지없는 짓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스철학의 중심은 이성과 합리주의입니다. 이성과 합리에 맞지 않으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성경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신화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동정녀 탄생도, 예수님의 부활도 부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이성을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인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까? 보는 것만 아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하루살이 메뚜기 개구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살이가 놀다가 내일 만나자고 합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웃습니다. 메뚜기가 가을 지나 봄에 만나자고 합니다. 개구리가 웃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한계, 인식의 한계입니다. 개미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아파트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파트에 대하여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인식하는 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말씀 특별계시이고 우리에게 주신 영안,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24절)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24-25절)
철학자 파스칼 천제였습니다. 대단한 천재 수학자 물리학자였습니다. 참으로 휘귀한 천재였습니다. 12세 때 논문 쓰기 시작하였고 15세 때 유럽의 지성 감동시켰습니다. 당시, 계몽주의 시대였습니다. 파스칼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밤낮 책상에 앉아 하나님은 무엇이냐를 질문하였습니다. 제1 원인자, 원인의 원인, 우주론적인 접근, 본체론적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파스칼도 그런 탐구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32세 때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을 때 고백한 글을 평생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과학자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확신, 확신. 사랑, 기쁨, 평화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했어도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이렇게 썼다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순간에 이세상 일체의 사물을 망각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수저 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다물려 준 다음 39년의 생애를 뜨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영국의 버틀란트 럿셀은 그가 쓴 철학사에서 파스칼을 가리켜 "참으로 아깝다 이사람이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인류에 공헌한 것이 얼마나 많았을지 모른다." 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러셀은 신령한 복을 몰랐지만 파스칼은 알았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방법은 전도의 방법입니다(21-24). ①전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23) ②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③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④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습니다(25). 비록 십자가가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패배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전도가 미련한 것같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변하고 그것으로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으로 가정과 사회가 변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믿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지구촌을 살아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지혜들을 동원하여도 구원을 받을 만한 지혜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1-12절에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거나 찾거나 그 이름을 부르거나 섬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듣겠습니까?
미련한 것 같지만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받아들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화됩니다. 헬라의 지식으로, 유대인의 표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교육으로 할 수 없는 능력이 사람가운데 가정 가운데, 사회 가운데 일어나게 됩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에게 전도를 통하여 복음, 십자가의 도가 들어가면 변화와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지난 주간 기도원에 있는데 수요일 저녁 10가 넘어서였습니다. 핸드폰을 꺼놓고 기도하다고 10시쯤에 핸드폰을 켜니까 전화가 왔습니다. 아는 분입니다. 전화를 받자 말라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이 식도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이제 교회를 나갈터이니 기도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들, 십자가의 도가 없는 사람들은 강하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위기를 당하면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1996년의 권위있는 음악지 [클래식 CD]는 독자와 음반 소비자 조사를 통해 호세 카레라스를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했습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장이었답니다. <1990년 로마 월드컵 3테너 콘서트>, 그리고 <1994년 LA 월드컵 3테너 콘서트>,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을 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나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억울한 나이였습니다.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사전 연락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호세 카레라스는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붙잡았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를 받았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은 그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신을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을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두나미스, 다이나 마이트입니다.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것이고 이 복음이 증거될 때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가정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초점을 흐려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초점은 복음의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데 맞추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고린도전서1:18-25/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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