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 분노의 노예에서 자유로운 길

김필곤 목사 | 2010.02.06 22:22: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창4:1-15
설교자
김필곤 목사
참고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운전하고 가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차가 끼어들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분노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가 생기지만 참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 아들하면서 욕을 해대며 운전대를 상대방의 목으로 알고 비틀며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창문을 열고 "집에가서 애나 보라"고 욕하다가 그것도 분이 안풀려 앞에 차를 세워 놓고 한 바탕 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무덤덤하게 무시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급한 일이 있겠지 하며 사고나지 않도록 기도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우리는 늘 분노를 할 수 밖에 없는 현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분노의 지뢰밭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화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봅니다. 체면 억압 문화 때문에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 깊이 품고 있다가 결국 분노의 노예가 되어 그것이 병이 되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듀크의대 연구 결과에 의하면 보통 사람에 비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20%가량 높다고 합니다. 심장병의 주요 발생요인은 담배 술보다 분노가 더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약 80% 정도의 부부가, 마음에 숨겨놓고 쌓아놓고 있는 분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월프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분노를 느낄때의 위장의 점막은 충혈 되고 운동이 증가되며 위산분비가 많아져서 마침내는 위, 장출혈과 궤양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대장염의 96%가 분노때문이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해치고 우리의 정서적 신체적 건강 뿐만이 아니라 영적 건강까지 해를 끼치는 이 분노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몽테뉴는 “분노는 기묘한 용법을 가진 무기다. 다른 모든 무기는 인간이 이를 사용하지만, 분노라는 무기는 반대로 인간을 사용한다.”호라티우스는 “분노는 일시의 광기이다. 그대가 분노를 제압하지 못 하면 분노가 그대를 제압한다.”라고 말했는데 분노를 방치하면 결국 인간의 분노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오늘 분노의 노예가 된 가인을 어떻게 처방하는가를 통해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배우길 원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의 가정도 분노의 노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은 아들 가인과 아벨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직업이 농사하는 자였고 작은 아들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같은 아들이지만 직업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농사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큰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작은 아들 아벨은 양의 첫새끼를 잡아 그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아 주었는데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았습니다. 이 때 가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을 한 번 같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심히 분했다고 했습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피가 거꾸로 도는 것같았습니다.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아무도 없는 들에 단둘이 있을 때에 아우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완전히 분노의 노예가 되어 결국 살인죄를 지는 그것도 동생을 죽이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해를 끼치는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요?

1.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분노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6).-분노의 원인
분노는 개인적 분노와 집단적 분노, 죄악된 분노와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분노에도 죄악된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집단적인 분노에도 죄악된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로운 분노 의분과 죄악된 분노 분노를 구분하는 것은 그 기준점에 따라 다름입니다. 자신에게 기준점이 있을 때는 대부분 죄악된 분노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점이 타인이나 공익 등에 있을 때는 의분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악된 분노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분노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욕구충족이 아니되면 분노가 생깁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대접받지 못할 때, 먹고싶은 욕구가 좌절될 때 등 분노가 생깁니다.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때도 분노가 생깁니다. 동물이 자기 영토를 공격당할 때 분노하는 것처럼 자동차 운전을 하는데 끼어들면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대인관계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생깁니다. 무시 당했다고 생각할 때 분노가 생깁니다. 친구에게 부모에게 자식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면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손해를 보았을 때,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를 받았을 때 분노가 생깁니다. 위협이나 해를 받았다고 느낄 때 분노가 생깁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법이 평등하지 못할 때 정의가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될 때 분노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노의 원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원인이 다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차가 끼어늘면 분노가 생기는데 내가 가는데 왜 방해하느냐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확장시키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이 급한 일이 있겠구나? 남의 입장에서 서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더욱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그사람에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있구나라고 시각을 확장시키면 전혀 의미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의 노예로부터 자유로워 질려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세요. 가인이 분노를 품었습니다(5). 그 때 가인의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처방을 내리시고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왜 분노하는냐? 왜 안색이 변했느냐? 이유를 물어보고 계십니다. 분노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 지금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분노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네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고 너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대우했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때문에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받고 안받고는 하나님 마음이지 자기가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제자를 받지 않은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은 모르고 동생 때문에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는 분이십니다. 이미 아벨의 마음은 열납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믿음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히 11:4), 자신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에게 분노의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너 회개하여야 진정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분노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할 때 분노의 문제는 종식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없습니다. 다 죄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다 용서함을 받습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노의 문제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그것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으로 받은 분노로, 어떤 사람은 아내로,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받은 분노로 평생을 화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용서의 복음, 화해의 복음, 능력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의 분노의 문제를 가지고 나올 때 진정 분노의 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미국의 중서부의 한 도시에 큰 전도집회를 하였답니다. 집회 앞서서 며칠 전에 도착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일제히 조간신문에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고 헤드라인 타이틀로 나왔다고 합니다. 무디가 바쁘다는 이유로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자들이 화가 나 악평을 했습니다. 이것을 본 무디의 참모들이 분노하였습니다. 무디 앞에 신문을 가지고 와서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분노를 하였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신문기사를 쭉 읽어 보시더니 웃었답니다. "이 사람들 사람 잘못 봤구만, 나는 이 신문기사에 난 것보다 훨씬 더 악해. 나는 훨씬 더 교만하다고. 이 정도면 잘 썼구만."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겸손하라고 준 신호이니 더 기도하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사람의 모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분을 품지 말고 분을 다스림으로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과정 해방
분노는 분노 자체가 죄는 될 수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분노는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생존 수단입니다. 인간의 기본 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가운데 하나인 '노'(怒)에서 연유된 감정입니다. 분노는 사랑, 흥분, 슬픔, 두려움, 불안, 평안과 같은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대표적인 감정입니다. 그 자체가 옳다거나 그릇 되다고 할 수 없는 기본적인 감정입니다. '강한 불쾌감'으로 표현되는 분노는 그 강도에 따라 가볍게는 짜증나고 약이 오른 상태부터 원한, 분노, 분개, 격분, 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문제는 이 분노가 감정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분노를 느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세지며 핏대가 오릅니다. 분노는 적개심과 함께 행복의 파괴자, 많은 중병의 주요원인되어 버립니다. 우울증, 비능률, 교통사고, 재정적 손실, 결혼 생활의 갈등, 강간, 살인, 가정폭력, 전쟁들으로 발전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가인이 심히 분노합니다. 그 분노가 어떻게 발전합니까?
(1)안색이 변합니다(5) 분을 품으면 화병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화병은 정신은 물론육체와 생활에 큰 손상을 입힙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정신 신체 의학연구 개척자인 월터 캐논박사는 [화의 구름]이있음을 발견하고 이 구름이 뇌신경에 모이면 눈에 핏발이서고 열굴이 붉게 상기되며 말을 더듬게 되는 증세가 생긴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박동이 불규칙해지며 피가 위와 장기에서 심장 중추 신경계 근육 등으로 역류한다. 소화관의 기능이 중지되고 간에 저장되어 있던 당분이 유출된다. 그리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공격을 하게 됩니다(8). 아벨을 쳐죽입니다. 분노가 자라면 결국 폭력과 살인으로 이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3)마음이 강팍해집니다(9). 뻔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분노의 노예가 되면 사람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가 발전하여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그 고리를 끊고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죄의 소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범죄행위로 발전하지 않도록 다스려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 4:26-27)"
분노의 감정이 있을 수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분을 품으며 복수를 계획해서는 아니됩니다. 분노는 잘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가 마음을 분노의 노예로 만들도록 자리잡지 못하게 히고 노가 일어나 자라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는 심령의 상태, 복수심을 가진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시 그 분을 처리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분노가 파괴력을 가지고 이성을 마비하고 신앙을 무기력하게 하고 자제력을 상실하게 하여 분노의 노예로 삼을 수 있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분노가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우리의 감정을 분노의 노예로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엡5:18절을 보십시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뿐아니라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분노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3. 분을 가지고 선을 행함으로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7).-결과 해방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분노가 죄를 짓는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분노를 처리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1)내적 억제형 (2)외적 표출형 (3)자기주장적 표현형입니다.
1) 내적 억제형은 분노를 분노를 의식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입니다. 끼어들기 하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렇다고 양반 체면에 싸울 수 없고 핸들을 잡고 그 사람 목이라고 생각하고 목비틀 듯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아니면 기대가 좌절되어 화가 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되 불쾌한 감정이 무절제한 행동이나 말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 분노를 절제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한다고 했습니다. 단기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좋은 방법이 될 수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억제하면 결국 분이 쌓이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 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까지 해치게 됩니다.
2) 외적 표출형은 파괴적 반응으로 분출시키는 것입니다. 화나면 폭언을 퍼붓고 끼어들기 하면 개 아들이라고 욕을 하고 가지 않고 서있으면 자리 펴고 자고 가라고 한마디 합니다. 그것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차를 세워놓고 싸우고 그래도 분이 안풀리면 공기총으로 쏩니다. 이 방법이 가인이 쓴 방법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들에 나아가 아우를 쳐 죽입니다(8). 분노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1)동생을 잃습니다.(8) 가족을 잃은 손실을 보게 됩니다. (2)살인 죄인이 됩니다.(8) 인류 최초의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3)형벌을 받습니다.(11)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효력을 얻지 못합니다. 땅에서 유리합니다. 외롭습니다. 아무도 상대를 해 주지 않습니다. 13절에 보니 형벌이 중하여 견딜수 없습니다. (4)외로움에 빠집니다.(12절)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화내는 사람 옆에 가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마음이 멀어진집니다. (5)불안과 두려움이 찾아 옵니다(14) 피해자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쌓이게 됩니다. 폭군 쳐놓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6)모두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부모 아담 하와의 상처 후손들 우리까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분을 품고 있는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라고 했습니까? 7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분을 품고 있는 그를 향하여 선을 행치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마음을 지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엎드려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죄지를 찬스를 노리는 것입니다. 분으로 악을 행하면 분노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를 건설적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죄의 방법이 아니라 분노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3)자기 주장적 표현형으로 분노를 풀어야 합니다.
분노를 무시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압한다고 억압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를 무시하고 억누르면 문제는 더 악화되고 곪아터질 뿐입니다. 폭발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다 결과적으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를 해칩니다. 남을 해칩니다.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정직하게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통해 일어나는 감정을 조절하라는 것입니다. 문제와 사건 자체에 묶이면 분노는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와 사람을 분리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용서하라고 합니다.

4) 성경적 방법으로 풀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하나님은 분노도 예외가 아닙니다. 진리가 분노의 노예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한나가 원통한일을 당할 때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풀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기도의 통로를 주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억울하게 갖혀있을 때 찬양한 것처럼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 사람보는 것 아닙니다. 분노가 폭발될려고 할 때 사람보는 것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노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참 해방을 주십니다.

분노의 노예에서 자유로운 길/창4:1-15/2002.4.28 열린교회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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