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배소서 ›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

김필곤 목사 | 2010.02.06 22:23:2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엡2:19-22
설교자
김필곤 목사
참고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오늘은 열린 교회 설립 5주년 기념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1997년 5월 10일 이곳에 처음 열린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2가정이 힘을 합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느 분은 커튼을 해놓고, 어느 분은 교회 차를 사고 어느 분은 피아노를 해놓고 어느 분은 강대상을, 어느 분은 에어컨은 어느 분은 헌금으로 힘을 합하여 이곳에 교회를 세워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교회를 분양받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5년 동안 걸어 왔습니다. 그동안 묵묵히 새벽마다, 주일마다 성도님을 모시기 위해 차를 운행하신는 성도님, 주일이면 성실하게 주보를 만드시는 성도님, 많은 식구들에게 대접하기 위해 고달픔도 마다하지 않고 기쁨으로 섬기는 여집사님들, 매주일 시원한 음료를 제공하시는 집사님, 새벽 일찍부터 교회 사찰 역할을 감당하시는 집사님, 바쁜 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사회교육원에서 꽃꽂이로,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로, 영어 회화로, 아이들 영어, 수학 등으로 봉사하시는 성도님들,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기쁨으로 봉사하는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각 지역에서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자, 구역 식구를 친형제처럼 돌보는 구역장, 모두다 사회적인 지위와 실력들을 겸비하여 좀더 큰 교회를 선호할 만한데도 이렇게 작은 교회에 와서 함께 삶을 나누며 기쁨으로 섬기는 여러 식구들의 헌신으로 우리 열린 교회는 이만큼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짧다면 짧고 길다고 생각하면 긴 5년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5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교회란 어떤 곳이 되어야할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 생각하며 은혜를 받으며 다짐을 하고자 합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19上)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이런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에클레시아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로 지옥의 땔감으로 취급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자기 외에는 야만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구별되었고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이방이나 헬라인이나 하나의 시민으로 불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것이 화목하게 되었고 인간까지 원수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다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외인, 손이었습니다. 외인이라는 말은 헬라어 크세노스는 12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본질이 어떤 것에 비교해서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되 본질이 전혀 다른 인간입니다. 살아 있는 것같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사단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손(파로이코스)는 귀중한 손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낮선 사람 외국인을 말합니다. 집안에 당당히 사는 사람이 아니고, 집 곁, 집주변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살기는 살되 아무런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의무만 있지 아무런 특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미국의 영주권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영어로는 Permanent Aliens Registration 이란 뜻으로 직역하면 영원한 이방인 체류 허가서, 영주한 외국인 등록증이란 뜻입니다. 정치적 참여권,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로마의 시민권은 대단하였습니다. 모든 지역에서 최대한의 편리와 안전을 제공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피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부가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는 동일한 시민이 된 것입니다. 악한 세대 흑암의 권세가 통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특권이 있습니다. 나라의 구성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이 국가의 삼 요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주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공동체라는 의미는
1)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17:7).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교회란 진리를 드러내 놓고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와 함께 살고 진리와 함께 사는 곳이어야 합니다. 말씀이 가라는데 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라는 곳에 멈추어야 합니다. 비록 부흥이 안된다하더라도 말씀대로 따라야 합니다.
교회란 규모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의 모습을 보면 진리는 상관이 없이 부흥만 되면 되다는 생각으로 날튀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교적 출세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량주의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랬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큰 교회 신부가 되기 위해 뇌물주고 연줄을 대었습니다. 그러니 신부들이 그곳에 가서 본전을 뽑는 것입니다. 중세 수도원의 포도주와 농산물 수입으로 성직자들이 너무 부요하여 영성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호화롭게 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이, 성경의 인물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종교를 상업화하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을 보면 우울하기만 합니다.
아인스타인은 "교회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거인과 같았다. 다른 지성들이 독재에 굴복했을 때도 교회만은 끝까지 서 있었다. 나는 처음엔 교회를 우습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한없이 찬양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말씀에서 이탈하는 곳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사람의 머리를 만족시켜 주는데도, 사람의 감정을 만족스럽게 하여 주는데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합치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속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배는 물 위에서 떠 가는 것입니다. 물을 떠나서는 배는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배 속에 침수하여 들어오면 그 배는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 세상의 세속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결국 교회는 교회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고 침몰하고 맙니다.
2)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국이란 어떤 곳입니까? 죽음도 죄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땅의 삶이란 가난도 병도, 고통도 눈물도 죽음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우리는 천국적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영적 치유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림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기도함으로 질병에서 치유되는 역사를 체험받을 수있습니다. 말씀을 배움으로 참 자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신 걱정이 물러갑니다. 증오와 미움이 변하여 용서화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때, 말씀배울 때, 찬양할 때, 기도할 때, 봉사할 때, 전도하며 친교할 때 삶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능력을 체험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막 11:17) 교회에 나와 기도함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 치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2.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19下)
우리는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계급공동체가 아닙니다. 이익공동체도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참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어떤게 인간이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끼리 형제라고 부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상승한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사는 곳입니다.
중세 교회는 이것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가족 보다는 구조, 제도, 조직으로 교회를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문에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권속(오이케이오스)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특별한 관계, 생명, 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법률적 관계를 넘어서서 생명적이고 살아있는 피의 관계입니다. "(요1:12)영접하는자 곧 그이름을 믿는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일3: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롬9: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아들이란 대단한 특권이며 유업을 받을 자입니다.
교회가 가족같아야 한다는 말은
1)가족같은 친밀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가정같이 포근해야 합니다. 가족처럼, 한 식구처럼 한 시대를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기도해 주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업보다는 삶을 위해 있어야 합니다. 선교 사업, 구제사업, 장학 사업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공동체로 삶을 서로 가족처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행2:42-47).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통용합니다. 서로 필요를 나눕니다. 말씀을 통하여 교훈받고 그 교훈에 따라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설립할 때 설립 취지에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의 형태를 세가지로 만들었습니다. 가족교회, 열린교회, 연합교회 형태를 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족교회라 함은 가정의 복음화, 가족회복, 가족치유를 통한 가족의 행복을 우선시 하고 온 교우가 피를 나눈 가족처럼 서로 교제하며 삶을 공유하는 신앙 생활을 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서로 한 가족이 되어 사랑과 협조와 나눔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초대 교회 형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열린교회라 함은 복음중심과, 하나님중심, 성경중심으로 예배하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 치유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 등 교회의 기본적 활동을 함에 있어 진리의 본질을 파수하면서 방법의 개방을 통하여 전통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가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하늘의 문을, 자신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세상을 향하여 세상의 문을 여는 교회,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춘 교회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연합교회라 함은 한 목회자가 교회를 자신의 사기업처럼 운영하고 비서를 두어 목회자와 직접 통화할 수도 없고 타락한 자본주의적 경영방법을 교회에 접목시키는 목회가 아니라, 양이 목자를 알고 목자가 양을 아는 수준으로 교회의 형태를 횡적으로 확대하여 여러 목회자가 지역 지역에서 성도와 함께 가족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교회 연합체를 만드는 교회 형태입니다. 우리 열린 교회가 적정 수준의 교인이 되어 모범적인 교회가 되면 이 교회를 분리시켜 또 다른 열린 교회를 지역에 만들고, 또 다른 열린 교회는 제3대, 4대의 열린 교회를 확대하여 그 모든 교회들이 연합체를 이루어 서로 함께 모여 같은 목회 철학을 가지고 같은 목회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연합 사업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과 제3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고 제3세계 아이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우리의 열린 공동체에 흡수시켜 함께 생활하게 하고 공부를 시켜 파송시킴으로 세계 곳곳에 우리와 같은 교회를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건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체는 다릅니다.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는 책임이 따르고 거래관계가 아니라 생명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비록 성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재력도 다르지만 교회의 영적 용광로에 들어와 영적 한 가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2)가족같은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은 서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가족을 버리는 것 아닙니다. 서로의 단점을 받아주고 세워주고 존경해주고 용서해주고 격려해 주면서 사는 것이 가족입니다.
천국같은 가정일 수도 있지만 지옥같은 가정일 수도 세상같은 가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든 분명한 것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입니다. 피의 관계를 그 무엇으로도 단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고 돌보아야 할 관계입니다. 연약한 교인들 보면서 실망하거나 비난할 필요없습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어떤 부인이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크게 냈습니다. "급구 :남편을 염가로 양도합니다. 남편과 함께 남편의 사냥 도구와 골프채, 개까지 끼워줍니다. "그러자 미국 전역에서 불꽃튀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중 "남편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십시오."라는 편지가 있었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 식구들을 보아야 합니다. 심한 정신병자 아내를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담소하였습니다. 모인 친구들 중에는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야기도중에 자기아내 자랑을 해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것은 정신병자 아내를 둔 친구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다 그 의견에 동의하여 농담을 섞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아내를 자랑하였습니다. "내 아내는 절세 미인이야." "내 아내가 우리 가정에 들어온 후 가정이 화목하게 되고 화기에애하게 되었어." "내 아내는 내 마음이 녹을 정도로 나를 사랑해."
각자 차례대로 이야기를 마치자 정신병자 아내를 둔 사람만 남게되었습니다. 모든 친구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저 사람은 과연 무슨 말로 아내 자랑을 할까?라고 궁금해 하면서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불행한 아내를 둔 그는 활기있는 얼굴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감사가 넘친다네. 자네들이 아는 바대로 내 아내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지. 그러나 나의 큰 행복은 이런 아내로 인해 내가 기도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네. 만약 내 가정에 고통이 없고 화평하기만 했다면 기도와 신앙이 지금같이 뜨겁지 않았을 거라네. 그렇지만 나는 불행한 아내로 인해 항상 기도하게 되었으니 어찌감사하지 않겠는가!" 서로 연약한 부분을 감당하는 책임을 가진 식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교회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은 불완전하여도 서로 가족같이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가 한 가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3.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이어야 합니다(20-22).
성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과거 성전에만 하나님이 거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성도의 모임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이제 모리아 산이 아닙니다. 기초(20)는 사도들 선지자들의 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교훈을 말합니다. "(고전3:11)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들이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훈을 기초로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모퉁이돌은 예수님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1)교회의 주인은 삼위 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모퉁이돌은 건물 기초의 일부로, 건물의 본질, 건물의 위치 건물의 배열을 결정합니다.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지는 것으로 여기서부터 건물의 벽을 쌓아 나가기 때문에 건물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까닭에 건물의 중심이 됩니다. 여기에 건물의 소유주의 이름을 새겨 건물의 소유권을 표시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도와 성도를 연결하여 우주적 교회를 세워 나가게 하는 중심이요 기초이며 그 교회의 소유주입니다. 모퉁이돌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건물이 되어 서로 연결하여 우주적인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어져 간다(21)는 말은 한 번 짓고 끝난다는 말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지어저 간다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구속의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성도들 속에 역사하시므로, 성자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성부는 성도들로 구성된 성전에 거하시는 분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어 교회를 이루어 가십니다.
물질이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중세 시대 때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대성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건축에 필요한 돈을 걷어내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것을 사기만 사면 죽은 사람의 죄도 용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 웅변가요 학자인 수도사 텟젤(Johann Tetzel 1465-1519)은 가는 곳마다 크게 외치기를 '속죄권(면죄부)을 사면, 살아 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속죄권을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져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속죄권을 사면 연옥에 있는 부모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루터라는 신부가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달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꾸 물질이 주인 노릇할려고 합니다. 교회도 권능이 아니라 건능을 받아야 한다고 말들합니다. 건물의 능력이 있어야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는 성직자가 교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나 장로나 권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교회이 주인입니다. 우리는 다 흘러가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영원토록 이 교회에 계시고 이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여기서 내 교회는 베드로의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목사님도 초기 개척자도, 장로님도, 돈이 많아 교회를 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자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전3:11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그리스도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주인의식은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갈등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자기 소유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재산 불리듯 목회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전폭적으로 추앙하던 빌리 그래함 목사나, 적극적 사고방식의 로버트 슐러 목사 등이 자식에게 세습을 했고 서울에 유명 교회 목사들이 자식에게 세습을 해서 잘들 하고 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차려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이익집단도 아니고 사기업도 아닙니다. 목사가 회장도 사장도 아니고 장로가 이사도 아니고 교인이 주주도 아닙니다. 중세 교회를 보십시오. 결국 망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 성직 세급이 문제된 것은 11세기 초엽 프랑스 교회에서입니다. 귀족가문에서 감독직을 독점하다 보니 어린 소년을 감독으로 세운 일도 있었습니다. 서방교회의 경우 15세기의 교황 인노센트 8세는 자기 형의 사생아를 추기경직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성직매매와 성직의 세습화가 극심해지자 12세기의 로마교회는 제2차 라테란(Lateran)회의(1139년)에서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채택, 선포했습니다.
성직매매로 엄청난 부를 취득하고, 성직세습으로 교회의 권위를 독점하는 일들이 교회발전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있음을 알고 교황 펠리기우스(PelagiusⅠ세, 556년-561년)는 성직자는 결혼하였을지라도 자기 자손들에게 교회의 재산을 상속시키지 못하도록 법을 만든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는 한국 교회도 목사는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법을 만들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세습을 하는 목회자들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의 의식입니다. 정치인들이 잘못되었다고 사람들은 욕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치인들도 문제가 있겠지만 더 심각한 것은 유권자 백성들입니다. 유권자의 수준이 정치인의 수준인 것입니다. 교인의 수준이 교역자의 수준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 1:17)"

2)교회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간다는 말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교회입니다. 그 성전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치와 성장(21)이 이루어 집니다. 새성전의 목적(22)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것은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무덤에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를 세우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이루어가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을 교회처럼 만들어내야할 사명감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결국 바벨론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새예루살렘이 임하게 됩니다.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계 18:21)"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2)"

이제 교회 설립 5주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19上)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엡2:19-22/2002. 5. 5 열린 교회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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