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전 › 예수님과 석가의 차이

늘새롬 | 2010.02.08 13:51:2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고전15:17-20
설교자
강종수 목사
참고
http://cafe.daum.net/st888


2009.2.7    주일 오전예배 설교

고전15:17-20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멘.

종교인으로서 훌륭했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이 없이는 우리의 믿음이 헛되다 부활이 없다면 죄 가운데 있을 뿐이라 하며 참된 구원의 결정적인 목표가 부활임을 강조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청했을 때 주님은,

마12: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부활의 중요성

오늘은 세계적으로 3대 종교(기독교, 불교, 마호멧교) 중에 불교의 교주와 우리 주 예수님과의 본질적이고도 역사적인 차이점을 살피면서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1. 교주 신분이 다르다

석가 뿐 아니라 성현군자라는 사람들과 세상 모든 교주들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를 위한 예언적 경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구약 성경 전체에 예수님의 일생에 대해 아주 상세히 예언했습니다.

요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석가는 BC 563년 4월 8일(음력) 해 뜰 무렵 북인도 카필라 왕국(지금의 네팔 지방)의 왕 슈도다나(uddhodna)와 마야(My)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29세 때에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하였습니다.

석가(?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입니다.

참된 종교를 논할 때 오래된 종교의 역사적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석가를 통해 만들어진 불교는 지금부터 2500여년 전이었습니다. 예수교는 2천년이지만 교주이신 예수님 자신의 존재는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요8: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아브라함은 예수님 오시기 약 2천여 년 전의 족장입니다. 예수께서 존재하시기를 사실은 아브라함 나기 전부터라 하심은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보다 존재론적으로는 기독교 교주가 훨씬 더 오래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석가처럼 어느 성주의 아들 정도가 아니라 다윗 왕통의 후손이며(마1:1) 남달리 특별한 교훈자가 되어 교주가 되신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독자이십니다.


2. 삶의 교리가 다르다

석가는 고통과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체념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를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현실 참여와 역사를 긍정적으로 새롭게 하시려는 분입니다. 기독교는 도 닦는 정적이고 개인적인 감상의 종교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에 참여하여 고치고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살리는 종교입니다.

석가는 입산하여 수도했지만 예수님은 하산하여 삶을 사시고 바로 살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불교도인들은 입산수도를 좋게 여기나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를 무시하고 탈문화적인 사고방식의 교리는 우리 인간에게 해악이 됩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일하는 종교로,

살후3:10‘...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기독교인이 되어도 율법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웠던 유대인들처럼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불교문화 속에서 얻은 가치관이나 종교적 정서가 그대로 나타나서 관상적이고 도 닦는 수준의 신앙심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일이 고달프다고 운명론으로 받아들이거나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고 다시 재기하여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고치고 이루고 성장하기를 힘씁니다.

불교도인들은 그래서 기독교인들보다 여유 있어 보이거나 젊잖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불교철학의 삶의 교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므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삶의 교리는 개인적인 수도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는 자기 변화에 힘쓰고 다음은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인류사에 빛과 소금되어 역사에 동참하는 활동적인 종교입니다. 변명이나 하고 침묵하거나 감상으로 젖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진리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며 새 역사를 변화의 역사를 창조해내었습니다.


3. 가르침의 궁극 목표가 다르다

종교의 문화적 동기는 거의 100% 세상살이를 위해 만든 겁니다. 불안해서 만들고 잘 살아보겠다고 만든 것들입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물질주의로 기독교 사상도 그렇게 저급한 사상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고전15: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성경은 염려든 욕심이든 세상을 위하여 구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 앞에서 겨우 생각하는 것이 물질이나 구하는 정도라면 이건 아니란 말입니다.

불교계의 학승 성철 스님을 아시지요? 그 사람의 열반송이 이랬습니다.

“한 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탄이여 오소서, 사탄을 숭배하나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불교성전에 보면 성경처럼 한 과부가 독자를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석가는 그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7집을 찾아 쌀 한 움큼씩 얻어오라고 했지만 해가 지도록 다녀도 찾지 못하고 돌아와 죽음을 그냥 받아들여라는 교훈을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 눅 7장에도 과부가 아들이 죽어 장사하게 되는데 상여를 메고 가는 도상에서 주님은 죽은 청년을 살리셨습니다. 교주의 능력 차이고 종교적 목적의 차이고 인생관의 차이며 내세의 차이입니다.

석가 자신도 85세에 등에 종기가 나서 그의 말대로 생로병사하였으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석가는 죽어 인도의 네팔에 묻혀 있고 우리 주 예수님은 부활하시므로 빈 무덤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석가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다 같다고 합니다. 그것이 겸손인줄 알지만 목마르다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 십자가 걸친다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올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믿는 자들로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 진리를 알기 때문에 이것을 모르고 타 종교를 따르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잡 종교와 사이비 종파들과 화합할 나약한 종교인이 아닙니다. 일반 종교가 드라마라면 기독교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우리는 사실을 믿고 불교는 가상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이요 허구이며 거짓말이고 거짓말쟁이인 사단의 말입니다. 이 차이점을 알고 주님께 감사하면서 힘을 내어 전도하고 모든 타 종교인들과 맞서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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