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일서 › 사랑을 아십니까?

신윤식 목사 | 2013.02.18 11:52:3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일4:16
설교자
신윤식 목사
참고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43강) 요한일서 4:16 사랑을 아십니까?

 

<본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16)

<설교>

전혀 보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그에 대한 말만 듣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보고 만난 사람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존경은 보지 못한 자에 대해서도 가능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나 행한 일에 대한 존경심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인들에 대한 존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였으면서도 가능한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보지 못하고서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8절을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보지 못한 분, 육신으로 대면하지 못한 분에 대한 얘기만 전해 듣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내용이 보지도 못한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도우시고 복주셔서 풍족한 삶이 되게 하신다는 얘기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할까요?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신다는 내용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할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해서였던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좋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그 일은 바로 자기 목숨을 버리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가장 먼저 이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끼어들 자격이 전혀 없는 존재임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큰 방해물은 우리가 스스로 신앙적이라고 믿고 있는 종교적 행위임을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종교적 행위를 신앙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면 필히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보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돌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신앙적 행위로 여기는 것을 지키고 굳게 세우기 위해 힘쓰게 될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은 거부 대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의 의의 행동을 다 무너뜨리고 대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세우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희생하신 것으로 증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위를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세상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살아갑니까? 사랑을 받아서, 사랑을 알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로 살아갑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여전히 우리에게서는 불평과 원망이 이어질 뿐입니다. 독생자를 죽이신 하나님 앞에서 기껏 우리는 세상에서 입는 것, 먹는 것, 나 잘되는 문제 등을 놓고 불평할 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짐이 없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 알 때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이 굽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하게 충분히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모든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가야지 예수님 밖의 것에 마음을 둔 채로 사랑을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많은 차별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평치 못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보게 되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만 보여질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멸망의 자식들만 보여질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여 주어진 은혜가 아닙니다. 모두에게 공평이 주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예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자신을 예전부터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

지 마시고 예수님을 싫어하고 내 것만을 챙기기에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예수 안에 있는 자로, 믿음이 있는 자로 기정사실화하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에 대해 무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된 아들은 누구입니까?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이지 아버지와 함께 살던 맏아들이 아닙니다. 이처럼 여러분 자신이 맏아들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이 형식적인 것과 습관으로 되풀이 되면서 신앙의 힘과 맛을 잃어버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맏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 이야기는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사실 탕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생각하게 하는 폭 넓은 내용입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돌아온 아들을 반겨 맞는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도 될 수 있고, 돌아온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불평을 하는 맏아들의 이야기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자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나가서 뭘 했는지, 돈을 얼마나 탕진했는지에 대한 추궁이나 꾸지람이 없습니다. 오직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만 있습니다. 돌아온 것으로 다 됐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를 통해 전에는 몰랐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집에서 아버지의 품에서 편히 살 때는 몰랐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집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도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알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었으면서도 사랑을 알지 못한 것, 이것이 맏아들입니다.

 

맏아들은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베푼 아버지를 원망 합니다. 충실히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위해 일한 자신을 위해서는

잔치를 베푼 적이 없었는데 돈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식을 위해서는 잔치를 베푼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한 말은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0-31)는 말이었습니다. 즉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가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었으면서도 사랑해 준 적이 없다며 투덜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나갔다가 돌아온 자식이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눅15:18,19)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온 것입니다. 자신이 죄를 알았기에 더 이상 아들로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안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반겨 맞으며 좋은 옷을 입히며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을 알기 위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럼 되묻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아버지께로부터 나간 적이 없는 자식들입니까? 여러분의 것을 챙기고 여러분의 삶을 살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사랑을 알기 위해 나가야 하기 전에 이미 우린 나가있는 자식들입니다. 나가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것이지요. 이것이여 말로 둘째 아들보다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버지의 사랑을 어찌 안단 말입니까? 그저 자신을 아버지 안에서 충실히 살고 있는 자식으로만 여기고 있으니 나오는 것은 ‘이만큼 했는데 왜 이렇게 밖에 안해줍니까?’라는 불평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애당초 글러 먹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알게 된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즉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돌아온 경험이 없습니다. ‘나같은 자는 아들로 일컬음을 받을 자격도 없으니 그냥 품군으로만 써주십시오’라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잘못한 것이 없이 하나님을 위해 잘 살아온 신자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우리가 곧 나간 자식임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지 않는 너무나 어리석은 자이면서도 그러한 자신을 모른다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들 쇠귀에 경 읽기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4:9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시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죽음에 처한 우리를 살리시고 아들로 삼으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자기 몫을 챙겨서 아버지를 떠나 버린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같은 자를 위해 독생자를 주게 하셨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이 ‘나같은 자’라는 것에 대해 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음을 봅니다. 자기 것을 챙기고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아버지를 떠나 살아가는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전혀 보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나같은 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내가 뭐 어때서’라는 반응만 보이기 십상입니다. 이런 상태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관심 밖의 문제가 될 뿐입니다.

 

맏아들은 ‘나같은 자’를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위해 일했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둘째 아들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해준 아버지의 마음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을 보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탕자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자리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탕자로 살아왔던 자신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아버지를 떠나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같은 자를 받아주시고 나같은 자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지금 현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가장 적절한 것임을 의심치 않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에 부끄러운 나를 생각한다면 지금 주어진 이것도 감사할 뿐이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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