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일서 › 마음에 있어야 할 것

신윤식 목사 | 2013.02.21 23:40:5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일5:2-3
설교자
신윤식 목사
참고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48강) 요한일서 5:2-3 마음에 있어야 할 것

 

<본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2-3)

<설교>

사도는 사랑을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사도의 이 말을 스스로 뒤집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앞서 4:20절에서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증거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2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킬 때 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4:20절의 내용을 뒤엎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을 안다고 했다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킬 때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는 어떤 의미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일까요.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렸던 1절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분명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자가 자기를 내신 이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함께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사랑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사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식으로 멋대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즉 형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 어떤 마음으로 대하든 상관없이 하나님만 사랑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모습을 잔뜩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와 연관된 자기 행위를 내세우며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큰소리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이 이런 잘못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과 자신의 일대일의 관계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잘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것 역시 두 가지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사실 사도의 말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별개의 사항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이웃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고 증거 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말로서 형제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사도의 말이 끝났다면 우린 또 다시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에게만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잘 대하면서 ‘나는 형제를 사랑하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또 다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형제 사랑을 친절을 베풀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즉 가만히 앉아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형제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계명 지키는 것을 형제가 어려울 때 도와주고 나누는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계명을 이처럼 어떤 내용을 실천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 계명은 신자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까? 아니면 가벼운 것이 됩니까? 무거운 짐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지키지 못했을 때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그래서 계명을 지키고자 할 때 그 계명은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계명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계명은 무겁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겁지 않다는 것은 가볍다는 것을 뜻합니다.

 

계명이 무거워지는 것은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습성 중에 하나는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확인한 결과 죄책감을 가집니다. 내가 나를 보니 참 한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보이셨는가를 생각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에게서 형제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형제를 심판하고 평가하지 않고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의 행위를 보면서 자신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함께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서 났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계시고,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죄책감을 가지거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은 자연히 형제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으로 대할 것입니다.

 

계명은 신자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경을 이용하여 교인들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려고 합니다.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해서 스스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천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누구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고달픈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계명으로 인해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쉼은 죄책감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짊어지신 예수님께 나오는 것만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긴 일을 하는 기쁨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나를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 역시 날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의 마음으로 할 때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것입니다.

 

그런데 때론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때문에, 계명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천을 묻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행동과 실천을 보고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실천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에서 이런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가까이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짐이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실천의 문제를 너무 무시해 버리고 가볍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도 실천과 행함의 문제를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실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하고 못하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의 잘못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행함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의 못남을 보면서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여전히 복의 자리에 있게 하신 그 사랑을 마음에 담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할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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