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일서 › 세상과의 싸움

신윤식 목사 | 2013.02.21 23:42:4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일5:4-5
설교자
신윤식 목사
참고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49강) 요한일서 5:4-5 세상과의 싸움

 

<본문>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한일서 5:4-5)

<설교>

계명에 대해 ‘지켜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 자체를 두고 잘못됐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성경과 다른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해 볼 바는 계명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냐?’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계명을 지키고자 할까요? 여러분도 계명을 지키고자 했고, 또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물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지금 계명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답을 내리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은 신약시대니,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니 계명은 필요 없는 것이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혹시 ‘계명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질까 해서 이런 말씀을 미리 드립니다.

 

다시 질문 하겠습니다. ‘누구를 위해 계명을 지킵니까?’ 이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 지구상에서 가장 계명에 철저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유대인, 즉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들이 계명을 그토록 철저하게 열심히 지키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가지고 있었겠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 이름과 자기 의를 위해 계명을 지켰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분노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러운 악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 모든 것들이 자신의 신앙을 돋보이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자 힘쓰는 악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바리새인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다르지가 않습니다. 지금 역시 내 이름을 위해, 내 신앙을 위해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명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계명은 인간의 자기 사랑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계명을 지키지 못할 때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로 계명이 무거운 짐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천을 묻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실천을 묻지 않으신다는 것은 ‘실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을 보시고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힘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완성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완성자라는 것은 율법의 조항을 하나하나 실천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이 내포하고 있는 그 정신을 예수님이 온전히 나타내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벽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을 때 그 사랑에 의해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율법에 충족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 되어진다는 것이지요. 내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전부를 점령하심으로서 내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기에 계명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에, 그 사랑에 마음에 깊어진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의 문제가 4절에 와서는 세상과의 문제로 연결되어 언급됩니다. 4절을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대저’라는 말은 ‘그 이유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3,4절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 이유는(왜냐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어떻습니까?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 하나님께로서 난 신자가 세상을 이기는 것과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사도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에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는 말까지 연결하여 생각한다면 세상을 이긴 믿음으로 말미암아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세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세상일까요? 세상을 말할 때 많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향락 산업, 즉 쾌락과 오락을 추구하는 문화 등을 신자가 가까이 해서는 안될 세상을 이해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생각하는 세상을 이기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향락적인 오락과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을 세상을 이기고 멀리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쾌락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 문화와 담을 쌓고 있는 수도원 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수도원이라고 해서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문화와 접하지 않을 뿐, 그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그들 역시 세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대적하는 모든 것이라고 보면 쉽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세상과 싸운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문화나 풍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적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지 않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아니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반대되는 것은 내 힘으로 살 수 없다는 특이한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어떻게 대적할까요?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세상과 싸운다는 것은 자신을 보지 않고 은혜와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세상이 무엇이고, 세상과의 싸움이 무엇이며 세상을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세상과 싸운다고 해봐야 엉뚱한 싸움에 매달릴 뿐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도 세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날 위해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보다는 나의 영광 나의 이름을 위해 살려고 하고 은혜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들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 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계명이 무겁지 않다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겠습니까? 계명이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은 자기 신앙을 위해 실천해야 할 조항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실천해야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실천하지 못할 때 자기 신앙에 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볍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계명을 보지 않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긴 자는 계명을 자신의 신앙을 위한 실천의 조항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계명을 통해 자신의 믿음 없음과 악함을 보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더욱 더 깊이 하나님의 사랑에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에 빠져들게 하시고, 다시 그 백성을 내세워서 사랑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신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의 모습들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날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을 아는 것이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 없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지키시고 인도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자신을 깊이 자각 하십시오. 그리고 사랑 없는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피흘리신 예수님에게서 찾으십시오.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보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제일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며 이런 신자에게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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