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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 | 2013.08.26 13:53:1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8:34-38
설교자
이영화 목사
참고
당진 함께하는교회 http://tgchurch.hompee.com

그리스도인의 삶

마가복음 8 : 34 - 38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리스도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에 한번 나오는 정도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구별되는 특징이 교회를 다니고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구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말씀을 보면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교회를 꼽으라면 안디옥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바나바와 바울은 이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하면서 그 곳 성도들을 일 년간 가르쳤습니다.

 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때에 제자들이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움을 받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움을 받게 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구별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인 됨의 특징이란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당시 그리스도인 됨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활의 사역을 거의 마감하실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 하셨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견해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29절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라면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한 고백들을 들으신 후에 앞으로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실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과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그렇게 되지 않기를 구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세상적인 힘과 능력을 가지고 메시야가 나타나 자신들을 로마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 줄 정치적 대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기를 기대하였기에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다는 말씀에 그렇게 되지 않기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이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기들도 무엇인가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인 지위를 기대하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자신의 이익으르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방편으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려 합니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서 내가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외형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부담 없이 큰 교회를 다니려고 하는 풍조가 한국교회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무언가 얻으려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주님을 따르는 삶이란 무엇이며, 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하여 먼저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을 따르는 삶을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첫째가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 는 것이며 둘째가 ‘십자가를 지라’ 는 것 그리고 세 번째가 ‘나를 따르라는 것’ 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주님을 따르는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말의 의미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의 근원인 자기 의지를 부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삶의 권리를 주님께 넘겨드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사영리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 자신의 의지가 내 마음 중심에 있었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마음의 중심에서 내가 내려오고 그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곧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내 자신에 대하여 ‘아니오’ 라고 하며 예수님께 대하여는 언제나 ‘예’ 라고 하며 그 분의 통치를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언제나 내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원하기는 언제나 주님이 나를 다스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십자가를 진다’ 는 것은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실제로 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민족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식민지 정책에 있어 로마에 대한 반역죄나 중한 죄에 있어서는 십자가 형이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내렸습니다.

 당시에 십자가 형을 받는 죄수는 감옥에서부터 형장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그 고통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당시 십자가의 형벌과 관련하여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란 마치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 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다시말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믿는자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과거 초대교회의 때나 종교개혁 당시의 역사를 읽어보면 많은 참된 신자들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사에서도 일제치하에서 많은 성도들이 고통을 받기도 하였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6.25 때에는 많은 성도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지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기에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에 죽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반대가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대를 받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예전에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는 다르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방식과 다르다고 하여 믿는자들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미움과 반대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늘 존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이나 재산상의 손해, 인사상의 불이익도 각오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주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함께 지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세 번째로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 개인의 공적 및 사적인 삶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기업과 직업도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향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것을 찾아서 실천에 옮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모두 일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일터로 주셨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라고 할 때에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생활로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영역의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모든 영역이 주님을 따르는 생활의 시험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시간도 주님을 따르는 일을 바르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시간에 있어서 우선순위도 조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모든 일에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져야 합니다. 또 세상에서도 그렇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구별하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시간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나아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는 일들, 교회에 봉사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이들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도 편하고 부담이 없고 책임질 필요가 없는 일들을 하고자 하는 것이 지배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습이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된 특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을 가장 앞세울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주님을 따라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이유들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역설적인 진리로 말씀하십니다.

 35절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서 ‘목숨’ 이라는 단어는 원어적으로 ‘자아, 생명, 영혼’ 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숨’ 은 앞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대응하여 사용된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주님의 이 약속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아를 위하여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와 재물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공허함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진정한 자아(생명)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아와 생명은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나 재물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해야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역설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자아를 내어 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참된 자아, 즉 인간됨의 본질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 전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때 모든 풍성한 은혜를 다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참된 만족이 있었고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할 때에 비로서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생명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6-37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참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따라야 할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그 다음 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시에 있게 될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특징인 음란하고 죄악된 지식과 풍조를 따라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갑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세상에 어울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판단하실 때가 이르면 주님을 따르기를 부끄러워 한 사람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그래서 이 날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일을 과연 부끄러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라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예배를 귀히 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충성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재림시의 우리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삶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해서는 “아니요” 라고 하며 주님께 대하여는 “예” 하며 사는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는 사람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며 사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으며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생활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 됨’ 의 모습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와 같이 주님을 따름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 8. 11. 주일예배말씀. 이 영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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