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이사야 › 내가 여기 있나이다.

신실 | 2013.08.26 13:56:4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사6:1-8
설교자
이영화 목사
참고
당진 함께하는 교회 http://tgchurch.hompee.com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 6 : 1 - 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게 될 때에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한다는 자세와 이 일을 중요한 누군가가 내게 맡겨 주셨기에 이 일을 한다는 것과는 그 일에 임하는 태도나 결과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못해 일하는 것은 항상 수동적이며 쉽게 중단하거나 포기해 버릴 수 있습니다.  또 게으름을 피우거나 대충대충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누군가가 이 일을 나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일하는 사람은 결코 쉽게 포기하거나 중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 ‘소명과 사명’ 을 이야기합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르심’ 이라고 한다면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소명을 받은자에게 맡기신 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명과 사명이 있는 사람은 내 일이 아니라 맡기신 자의 일을 먼저 생각하며 어떻게 하든지 그 일을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최선을 다하며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서 내게 이 일을 맡겨주셨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울수록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니 생명을 다해 그 일을 완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발휘하게 됩니다.  여러분 젊고 혈기 왕성하던 모세와, 도망자가 되어서 미디안에서 양치기를 하며 팔십이 된 모세 어느 쪽이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론 당연히 젊은 모세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하던 모세보다 오히려 팔십에 접어든 모세가 더 위대한 일을 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소명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젊었을 때에 소명의식 없이 자기 힘만 믿고 자기의 방식대로 행동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노령에 접어든 모세는 비록 나이는 많고 기력은 쇠하였을 지라도 소명의식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지도자로 위대한 일을 온전히 감당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나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소명을 받고 일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겨 주시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기까지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기 위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까요?  그 첫째는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무엇보다 주님을 뜨겁게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아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지만 깊이 한번 생각해 보면 누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이겠습니까?  누가 진정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명자일까요?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자라고 다 사명자가 아닙니다.  교사라고 다 교사가 아닙니다. 성가대원이라고 다 성가대원이 아닙니다.  직분자라고 해서 다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직분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이고 권사도 마찬가지고 제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닌다고 다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에 이사야 선지자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사명을 받기전에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이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뛰어드는 일은 오래가지 못할뿐더러 자기 감정이나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내게 사명을 맡기신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자기의 눈을 들어 보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통해 비록 세상의 왕은 죽어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인생의 모든 의미나 가치나 꿈이 변화됩니다.  전에는 세상의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세상의 것들을 위해 정신없이 살아왔어도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가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다음 문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의 것을 다 상대화시킬 수 있으며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게 되면 세상이 주는 부와 권세와 명예도 다 사라지고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 앞에 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 이와 같은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셨습니까?  문제는 십수년을, 그 이상의 신앙생활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한번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위탁해 본 적이 없다면 그 인생은 무의미하고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휴가 시즌에 갈 곳도 많고 할 일도 많고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뒤로하고 이 자리에 나와 계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가대의 노래 소리를 듣기 위해서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이목사의 얼굴이 얼마나 잘 생겼는가 보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오늘은 꽃꽂이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뭔가 새로운 소식이 있나 하는 것을 듣기 위해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가벼운 이유 때문에 이곳에 나오신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유일한 목적은 이 시간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눈과 귀를 하나님께 고정하고 집중하며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진정한 예배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제사인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 시간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사야는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게 됩니다.  그분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사랑으로 덮고 계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1절 후반절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 옷자락은 사랑의 옷자락입니다.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옷자락으로 모든 인간들을 감싸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찬양을 받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3절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찬양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찬양의 소리가 울려퍼질 때에 4절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면서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 것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사야는 이처럼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능력의 하나님이요,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직접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내일부터 2박3일간 주일학교에서는 십자가 캠프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성령을 체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기회이자 시간입니다.  어렸을 때에 성령을 체험한 아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죄를 이기게 됩니다.  너무나 세상이 악하고 아이들을 유혹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고 십자가와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이러한 시간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있다면 자녀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명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주님의 사명자로 쓰임 받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은 바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됩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아도 주님을 만나본 사람은 자연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뵙는 순간 무엇이라고 소리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놀라운 영적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자신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 뵙는 순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나를 향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이 다 사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해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속사람이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죄의 본성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이사야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이사야의 탄식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하나같은 고백이며 이것이 위대한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입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만났을 때 뭐라고 부르짖었습니까?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겸손한 자세로 나아갈 때 주님은 그런 자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사명자로 사용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단순히 죄를 지었다는 죄의식만으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죄를 고백할 때 제단 숯불을 가져다가 그의 입술을 지져주심으로 그의 모든 악을 제하고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6-7절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 말씀은 주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크고 귀한 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공하고 지위가 높아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죄사함의 복’ 입니다.  시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는 말씀처럼 아무리 다른 복을 많이 받았어도 이 죄사함의 복을 받지 못하였다면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체험이 없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말해 깨끗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재료로 만든 그릇이라 하더라도 깨끗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려고 하실 때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으면 결코 주님의 도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고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손에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주님을 만나본 사람, 주님을 대면해 본 사람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 그리고 그 죄가 주님의 보혈로 다 씻음 받았다는 죄사함의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 이 은혜에 붙잡혀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십니다. 사명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내 일생을 바쳐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무슨 일을 위해서 나의 전 삶을 바쳐야 될 것인가 망설이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다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정말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임을 깊이 깨달을 때에 평생을 바쳐 이루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지금도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이처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보내려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패역한 백성들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가야 할 곳이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쉽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전적으로 헌신해야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지금도 불행을 당한 자들이, 소외된 자들이, 상처와 온갖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괴로워하는 자들이, 병든 자들이 손을 흔들며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체험이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계십니까? 죄사함의 용서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이 은혜의 체험이 분명합니까?  ‘우리를 위하여 누가 가려는가? 내가 누구를 보내면 좋겠는가?’ 주님은 지금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께서 보내려는 자가 바로 내 자신임을 깨달으시고 이사야가 고백 했던 것처럼 우리의 자리에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어 주시옵소서” 라고 사명에 응답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 8. 4. 주일예배말씀. 이영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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