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갈라디아 › 믿음의 본질

신실 | 2013.08.26 14:01:3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갈2:15-21
설교자
이영화 목사
참고
당진 함께하는 교회 http://tgchurch.hompee.com

믿음의 본질

갈라디아서 2 : 15 - 21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013년10월에는 부산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즉 WCC 총회가 열리게 됩니다.  WCC는 1948년에 조직되어 겉으로는 기독교 운동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이 총회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상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문화, 종교, 전통에 따라 신실하고 진실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우리는 이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원의 길임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저마다 제시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각 종교마다 구원을 이해함이 다르고, 또한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과 길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경우 구원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입니다.  부처가 대중들에게 설파한 ‘초전법륜’ 이라는 것을 보면 인간 구원을 ‘고집멸도’ 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생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고(苦)이고, 이 고통이 생기는 원인이 집(集)이고, 이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멸(滅)이고, 이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도(道)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팔정도(八正道)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겪고 있는 고통을 깨달음을 통해서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속 신앙의 경우 구원은 ‘당면한 현실 문제로부터의 구원’ 입니다.  여러 신의 힘을 빌어서 액땜을 하고, 악귀를 쫓아내서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풀고 복을 불러들이는 것을 구원이라고 이해합니다.  이를 위해서 굿을 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악귀를 쫓기 위해 부적을 부치는등 샤마니즘적 종교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속이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당면한 문제를 여러 신의 힘을 빌어서 해결하고 현세의 복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처럼 인생의 고통의 문제 해결을 구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무속신앙처럼 인생의 현실적 문제 해결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한 마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가 이루시는 구원은 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여기서 죄는 세상의 법률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어겼다든지, 법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는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죄의 결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절시켜 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 큰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원하는 곳에 살게 되어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부자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고 노하고 자식은 아버지가 싫다고 가출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출세를 해도 자식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도 아버지는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출세를 해도 그 출세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지고 싶은 것을 다 손에 넣는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과의 심각한 관계가 해결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궁극적 관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돈에 대한 관심보다 성공과 출세에 대한 관심보다 쾌락에 대한 관심보다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입니다.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이 궁극적 관심이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화해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어 우리를 향하신 진노를 거두시고 우리는 용서받은 존재로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바울은 구원을 말할 때 오늘 본문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의롭게 되는 것’ 이란 표현은 가장 핵심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16절에서 보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친히 준비하신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을 의롭다 부르지도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하시는 사람은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직 예수를 말하는 것이며 오직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길 밖에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본질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씀은 마27:44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를 설명할 때 사용된 것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완료형 수동태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말씀인가 하면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박혀왔고, 또한 지금도 십자가에 못박혀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이미 저 십자가 위에 못 박혀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기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진정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왔고 지금도 그 십자가에 못박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2000년 전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있었고, 지금도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음을 말입니다.  한 번은 초대교회 교부였던 ‘성 마카리우스’ 에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러자 마카리우스가 그 사람에게 이렇게 시켰다고 합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에 대고 그 안에 누워있는 시체에게 욕을 한 바탕 퍼부어보게”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고 왔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그 사람을 다시 공동묘지로 보내서 이번에는 칭찬을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그 사람에게 마카리우스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욕을 퍼 부어대니까 시체들이 화를 내던가?” 그가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칭찬을 하니 그들이 좋아하던가?” 이번에도 그는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 마카리우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네. 

 

 그렇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 죄가 나를 유혹해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욕해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높여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해 시체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죽어야 하는데’ 라면서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하기를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이 죽게 해 주옵소서” 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탄식과 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옛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죽어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또 죽여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목의 정욕이 나를 유혹하고, 육신의 정욕이 나를 시험하고, 이생의 자랑이 나를 요동케 할 때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 옛 사람은 이미 죽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과 원수 마귀에게 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20절을 다시보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말씀을 보다 쉬운 말로 직역하면 ‘나는 산다. 그러나 내가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면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 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요 새사람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를 바르게 믿다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 과 함께 깨닫게 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대개 목회자는 식당이나 사업장을 가게 되면 먼저 이곳이 예수를 믿는 곳인지 아닌지를 둘러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식당에 걸려 있는 성구 액자에 ‘늘 주님’ 이라는 글귀를 보았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늘 주님’ 이라는 글씨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늘 주님을 기억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그 사업장 주인의 마음이 늘 주님을 생각하며, 늘 주님이 이 식당에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도 늘 주님을 향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술을 즐겨 드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술기운’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술기운에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엉뚱한 말이나 일들을 하곤 합니다.  소심한 사람들이 아무에게나 큰 소리를 칩니다. 배짱이 없어서 하지 못하던 일들을 합니다. 술에 취해서 술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담대하게 또한 능력 있게 감당할 때가 참 많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말씀으로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능력을 나타내 주심을 믿었습니다. 

 

셋째로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그의 삶에서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1741년 파산하여 화려했던 삶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살까지 생각하였지만 인생의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변화하여 새사람이 됐습니다. 그 이후 그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 연주하던 삶을 포기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곡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만들게 된 곡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됨을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방법론이 달라지게 됩니다. 과거에는 ‘내 실력과 내 가진 것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먼저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짐을 나 혼자서 지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불신입니다. 죄입니다.  여러분의 이제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의지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꿈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로인해 오히려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지만 모든 시험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의 아버지와 가족을 모두 살리게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지난 시간 우리의 실수와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오히려 실수까지도 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생을 정리해야 할 나이에 가족들을 이끌고 먼 가나안 땅으로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만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자기의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 384장에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 하리요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는 가사처럼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앞길을 반드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앞날로 인해 두려워하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 믿음을 가지고 세상 끝까지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 7. 14. 주일예배말씀. 이 영화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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