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 전부이신 하나님께 감사

신실 | 2013.08.26 14:05:1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시73:12-28
설교자
이영화 목사
참고
당진 함께하는 교회 http://tgchurch.hompee.com

전부이신 하나님께 감사

시편 73 : 12 - 28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교회에서는 감사절을 일년에 두 번 지키는데, 그 성경적 근거가 출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는 말씀으로 구약 이스라엘은 1년에 이모작을 했습니다.  전반기에 추수하면서 맥추절을 지켰고, 후반기에 추수한 후 수장절을 지켰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보리농사를 직접 짓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맥추절이 폐기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비록 우리가 보리농사를 통해 추수를 하지는 않지만 시대를 따라 변화된 직업과 삶의 현장에서 많은 수확과 결실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도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입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지만, 결국 우리 자신에게도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잊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한해의 중간에서 맥추감사절을 통해 감사를 기억하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감사의 유무가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신앙이 있을 때에 가능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감사와 행복은 비례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행복이  소유 혹은 조건과 비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세상에 모든 부자들은 다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소득이 올라가면 처음에는 어느 정도까지는 행복지수가 올라가다가 그 이상이 되면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우리 인생은 소유가 많아지거나 환경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감사해야 진정 행복해진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면 항상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조건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감사 대신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비교의식입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말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에게 마찬가지입니다.    

 

하버드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는데 질문이 ‘다음 둘 중에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첫째로 당신은 1년에 평균 5만 달러를 버는데 다른 사람들은 평균 2만5천 달러를 버는 세상에서 살겠습니까?  둘째로 당신은 1년에 평균 10만 달러를 버는데 다른 사람들은 평균 25만 달러를 버는 세상에서 살겠습니까?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놀랍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첫번째를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소득이 적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버는 쪽을 선택한 겁니다.  절대 소득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상대 소득’ 에 신경을 더 쓴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런 비교의식 때문에 성도들조차 마음이 흔들리고 감사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 시73편의 저자인 ‘아삽’ 도 그랬습니다.  그는 다윗 왕 시대에 성가대장인데, 그가 쓴 시가 시편에 여러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어느정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교의식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고 감사 대신 불평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행히 후에는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였지만 아삽의 그러한 모습은 우리가 어느정도 신앙이 성숙해지지 않으면 진정한 감사가 어렵고,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 그 인생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감사하는 사람, 정말 행복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고 그 믿음과 신앙을 더욱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아삽은 왜 그의 신앙이 흔들렸으며 그는 어떻게 다시 견고한 신앙으로 감사를 회복하고 행복한 인생이 되었는지를 함께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앞서 1-1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아삽은 악인을 보면서 낙심했던 경험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악인들이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사는데 형통할 수 있나?  너무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돈도 잘 벌고 몸도 건강하고 고난도 없고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고, 오만방자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데도 잘만 된다는 겁니다.  

 

12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반면에 자기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고난이 많다는 겁니다.  13-14절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그러다 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 계신 것인가?’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것인가?’ ‘하나님은 과연 공의로우신 분인가?’ 이런 저런 신앙의 갈등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래도 나름 신앙생활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악인만도 못하니 영 체면이 서질 않습니다.  그렇죠? 당연히 의인이 악인보다 잘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악인이나 의인이나 비슷하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악인은 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데 비해서 의인은 고난만 당하고 있다면 정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신앙생활을 그만둘까’ 이런 마음에 굴뚝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습니까?  사실 그런 생각이 없다면 거짓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해야 성숙한 성도입니다. 다행히 아삽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을 회복하고 감사 찬양합니다. 
 

16-17절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아삽은 갈등이 너무 심했었는데, 성소 즉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악인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으면 결국은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18-19절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아삽은 이 때 영의 눈이 열려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악인의 형통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의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한 마디로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눈이 열릴 때에 우리는 비교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건이 똑같아도 그 해석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조건이나 환경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에 따라 행복과 불행 사이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눈으로 달라지게 될까요? 
 

첫째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면 육신보다 영혼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육신의 조건만 보면 악인들이 훨씬 더 나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의 없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과 영혼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조건만 충족시켜서 아무리 편리하고 안락하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관해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조건 부자가 되고 형통하고 건강하고 잘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가 되셔서 우리의 의식주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특별히 주시는 것은 육신이 필요보다 영혼의 필요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요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물을 길러 갔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하심으로 육신을 위해 마시는 물은 필요하지만 잠시 육신을 만족시켜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 즉 영생은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계속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영생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영적인 기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그 기쁨이 극에 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입 생수 중에 ‘에비앙’ 이라는 생수가 있습니다. 에비앙은 프랑스 동부의 작은 시골 마을의 이름인데 알프스의 빙하가 녹은 물이 로잔 호수로 흘러 들어가 호수 주변의 마을 사람들은 공짜로 마음껏 마십니다.  지금 여기서는 병에 들은 생수를 제한적으로 마시지만 그곳에 가면 원하는 만큼 마음껏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영생의 기쁨을 맛보지만 우리 내면의 죄성과 외적인 고난 등으로 인해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영생의 기쁨을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자 은총입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신령한 기쁨과 평안을 맛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도 이 평안의 힘이 얼마나 큰지 거친 환경과 조건이 짓누르는 염려와 근심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영생을 얻고 정말 맛보기 시작하면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기쁨과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 속의 천국’ 인 것입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는 이와 같은 영의 눈이 열려 육신의 것보다 영혼의 기쁨과 평안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부분보다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인간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눈앞에 보이는 작은 부분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은 마치 퍼즐의 한조각만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중에 정말 큰일이 날 일인데도 좋아하고, 어떤 경우에는 나중에 큰 축복이 될 일인데도 괜히 슬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까지 때로는 고난이나 역경이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를 보는 눈이 있으면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를 보는 눈이 없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기 바쁩니다.  여성분들은 십자수를 많이 하시는데 사실 십자수는 완성되기 전까지는 무엇을 만드는지 잘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뒤판을 보면 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뜸 한뜸 수를 놓다 보면 아름다운 작품이 완성됩니다.  바울은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이 종합되어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매년 때가되면 한반도에 태풍이 지나갑니다. 태풍은 모두가 피해가를 원하지만 알고 보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풍이 몰려오면 바다를 뒤집어버리고 대청소를 하여 바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때로는 뒤집어져야 잘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의 일만을 보지 마시고 보다 멀리 보다 높이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세 번째로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순간보다 영원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순간만 좋은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좋은 것을 원하십니다.  순간만 보면 하나님이 왜 이러시지? 하고 의심하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해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24절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아삽은 의심하고 실족할 뻔 했지만 결국 영원한 영광 즉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감사 찬양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긴 것 같지만 찰나와 같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우리 인생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안개가 얼마나 쉽게 사라집니까? 바로 우리 인생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 내가 영원히 어디로 갈 것인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모든 사람에게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고, 그에 따라 각각 영원한 내세로 들어갑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믿든지 안 믿든지, 좋든지 싫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간 스스로 죽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원치 않지만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에 상관없이 심판과 내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상에서 아무리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고 살았을지라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셨으며 눅16장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거지였지만 나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천국에 올라 갔지만 부자는 자기 마음대로 세상의 욕심만을 위해 살았던 불신자로 음부 곧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대로 믿고 있습니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이 실존한다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고한 일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일이 최고의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할렐루야! 
 

이 모든 사실들을 깨달은 아삽은 고백합니다.  25-26절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전부이시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만 계시면 인생에 부족한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함께 고백해 보겠습니다. “나의 전부이신 하나님!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할 일은 한가지입니다.  아삽이 결심한 그대로입니다.  28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더욱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며 다시한번 우리의 감사를 돌아보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신가? 말로만 그런 것은 아닌가?’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는 신앙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아삽처럼 과거에는 비록 신앙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결코 흔들리지 아니하며 ‘나의 전부이신 하나님’ 을 굳게 믿으며 날마다 감사하고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 7. 7. 맥추감사주일예배말씀. 이영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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