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사도들과 같은 기도

신실 | 2013.08.26 14:14:2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4:23-31
설교자
이영화 목사
참고
당진 함께하는 교회 http://tgchurch.hompee.com

사도들과 같은 기도

사도행전 4 : 23 - 31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보신 본문은 사도행전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제자들이라고 하였는데 사도행전에서는 그 제자들을  ‘사도’ 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12제자를 제자라고 하지 않고, 사도라고 부를까? 이런 궁금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12제자를 ‘사도’ 라 부르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제자’ 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고 한다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예수님의 12제자가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에 ‘사도’ 가 되었고,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의 ‘제자’ 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이 사도가 되기 전 ‘12제자’ 로 있었을 때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기도는 했었지만 기도의 깊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는 너무도 차원이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습관적이고 의식적인 기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들의 기도의 수준의 차이를 느끼고 예수님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제자로 있을 때에 이들은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 하실 때에도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언제, 무엇을 계기로 해서 그들이 변하였는가 하면 바로 성령을 받는 사건을 통해서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바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은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 하고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고 그들은 기다렸고 마침내 성령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성령을 받고 제자들이 변하데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변하게 되었을까요? 먼저는 부활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보이는 세계, 물질적인 세계, 그리고 명예와 재산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의 예표다’ 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자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대단한 것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미래는 부활이 약속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의 부활이 내 인생의 마지막에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확실성이 가슴속에 와닿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고난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확신하게 되면서, ‘그렇다면 나는 그 날을 위하여 무엇을 하며,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꺼이 예수를 위한 수고와 헌신과 고난을 감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삶이 없다면 주님 앞에 너무나 부끄럽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들의 인식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언젠가는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서야 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주를 위한 모든 수고가 면류관으로 예비되어 있다면 오늘 내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바로 주님을 위한 희생과 수고와 고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면류관의 전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주를 위한 희생과 수고와 고난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위한 최고의 일로 그들의 인식이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을 통해 기도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억지로 마지못해서 기도를 했다면 이제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것이 기도이고,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실천할 능력을 얻는 것이 또한 기도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통로가 바로 기도라는 것을 알고 뜨겁게 그리고 기도에 최우선으로 힘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러한 배경 가운데 기록된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사건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사람을 향해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고 선포하였을 때에 이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알려졌고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모으고 제자들을 불러서 심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이냐? 왜 성전을 소란하게 만드는 것이냐?’ 이렇게 묻고 베드로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지금 상황은 말 한번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법정으로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가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행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 걷게 되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당신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건강케 했습니다’ 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행4: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왜 예수를 이렇게 전하는가 하면, 천하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베드로의 증언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는 너무나 증인이 당당하고 논리가 정연하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완벽하고 병 나은 사람이 앞에 있으니 거짓말이라 할 수도 없고, 그리고 특별한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의회에서는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 고 하면서 그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사건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가 전 국가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제자들은 많아 봤자 수백 명입니다. 그런데 국가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가 그것 때문에 소집되고, 그것을 심문했고 그리고 궁색한 말로 그들을 풀어주자 온 백성들의 마음이 어디로 집중되었겠습니까?  온통 사도들에게로 시선이 쏠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유대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최고로 알려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풀려난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 동료들에게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였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도들은 지금은 풀려 나왔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제 이러한 시대가 온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충만했던 사도들이 환란이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했던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27-28절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예수님을 죽였던 그들이 바로 당신의 제자인 우리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이 성에 모였다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이렇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충성을 다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있습니까?’  사도들은 고난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의 기도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28절 상반절에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다시 말하면 핍박사건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핍박이란 우연한 일도 아니고, 하나님이 날 미워해서 주는 것도 아니고, 없어야 할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의 권능과 뜻 안에서 있는 사건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다시말해 내가 만난 어려운 환경과 사건과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개 하나님의 권능은 인정하는듯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가 원하는 뜻과 계획을 더 앞세우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 가운데 모든 사건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한 고난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사도들의 기도의 특징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 안에 있는 것이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상황과 현실 가운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환경을 내게 주신 하나님! 이 속에서 지금 저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어떠한 일을 만나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내가 그 가운데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구하실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도들의 기도의 특징은 적극적인 기도였습니다.   이제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일을 감당할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이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우리 남편 사람 좀 되게 하여주세요, 사람이 확 바뀌게 해 주세요, 그래서 교회도 열심히 나오게 해주시고 돈도 잘 벌어오게 해 주시고… 우리아이들도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들 되게 해 주시고, 말 잘 듣게 해 주시고… 제 주변 내 환경도 다 바뀌게 해 주세요.’ 대개 이러한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러한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환경을 바꾸어 달라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기도입니다.    

 

어느 부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의 집 근처에 가난한 농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는 그 가난한 농부를 보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매일 식사 때 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가난한 농부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매 식사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그런 기도는 뭐하러 하세요?”  그랬더니 부자가 하는 말이 “이 기도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 기도인데 그러냐? 너도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꼭 기도해야 한다.”  그러자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하나님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지 마세요. 그냥 아버지가 창고에 있는 쌀을 한가마 농부에게 갖다 주면 되잖아요?”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주변이 변하기만을 바라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화일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적극적인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가장 적극적인 기도는 오늘 사도들과도 같은 기도일 것입니다.    

 

어떻게요? 지금의 환경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으면서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이루어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적극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결코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감을 가져야 됩니다.  정말로 진리에 대하여 도피하고 현상에 대하여 도피하는 사람은 누구냐?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입니다.  주어진 현실 속에 내가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정면 돌파하는 그 적극성이 바로 기도의 정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말씀을 전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30절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다시말해 이 말씀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순서가 우리의 기도와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증거를 주시면 나가겠습니다’ 가 아니라 ‘이것을 위하여 증거를 주옵소서’ 그런 뜻입니다.  ‘내가 잘되게 하옵소서’ 가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입니다.  ‘내가 할 일을 다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 선포를 담대히 하기 위하여, 그리고 효과적으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은사를 부어 주옵소서’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은사를 무엇 때문에 달라고 하는가 그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필요하므로 ‘내게 주시옵소서’ 이것이 정확한 순서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31절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모인 곳이 진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충만하면 나타나는 여러 현상 가운데 우리의 가슴과 몸이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몸이 떠는 진동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진동을 ‘그래 내 마음이 너무도 시원하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기도이다. 내가 너와 함께하마’ 하고 하나님께서 등을 두드려 주시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기도 가운데 몸이 떨리는 진동을 경험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들이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 가운데 이와 같은 진동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한가지 사실은 대개 기도 가운데 진동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하나님 이거 주시옵소서’ 하다가 진동을 경험한 사람들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진동을 경험했느냐 바로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주님 앞에 온전히 헌신하겠습니다. 나를 받으옵소서’ 이처럼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하는 그러한 고백 가운데 진동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도들과 같은 기도를 할 때 진동의 역사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다가 육체적으로 진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이 진동해야 합니다.  잠들어 있는 내 영혼이 진동하여 떨리고 하나님 앞에서 새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기도의 사람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동의 경험하며 주변에 악한 권세도 진동케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 5. 26. 주일예배말씀. 이영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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