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역대상 › 다윗이 받은 복

김창인 목사 | 2015.08.29 07:03:0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대상14:1-12
설교자
김창인 목사
참고

다윗이 받은 복

역대상 14:1-12

김창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4장 1절에서 1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다윗이 받은 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갈라디아서 3장 9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섬기던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기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 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은 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믿음 나의 믿음, 아브라함의 복이 곧 나의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믿고 섬길 때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길 때는 복이 없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복 받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윗이 만났고 다윗이 알고 믿고 섬겼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그 믿음대로 우리가 똑 같이 믿으면 다윗이 받았던 복과 같은 복을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라 다윗이 받은 복이 무언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깨달음의 복 (1-2)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깨달음이 없으면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깨닫지를 못하고, 선생님께 한시간 열심히 배웠어도 깨달음이 없다면 이것처럼 안타깝고 괴로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와 반대로 선생님한테 배우고 책을 읽어 깨달음을 얻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러다보면 공부에 재매가 붙고 책을 읽는데 재미가 붙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공부로 성공을 합니다. 깨달음이 그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조상 삼대째 예수를 믿어 왔든, 내가 30년 50년 평생을 믿어 왔든지간에 우리의 믿음에는 체험적인 신앙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머리로 헤아려 믿는 사색적인 신앙, 사변적인 신앙, 지식적인 신앙은 어디에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맥빠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절대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활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생활은 반드시 체험이 뒤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체험이어야 합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백부장의 종이 젊음을 받치고 온갖 충성을 다 하다가 나이가 지긋해서 중풍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중풍병은 못 고치는 병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종을 섬겨 주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 이 문제를 해결할 분은 주님밖에 없다 생각하고 주님께 나와 간구를 했더니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말씀을 한마디 듣고 돌아갔더니 그렇게 고통 당하고 괴로워하던 종이 깨끗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종이 앓다가 어느 순간에 깨끗이 병이 나았다면 계속 누워 있을 이유도 없고 장기를 두고 놀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주인 백부장이 돌아갔더니 중풍병에 걸렸던 종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가르쳐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능력이 그 집에 와서 벌써 일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축복이 자기 집구석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주인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름 없는 종 하나까지 챙겨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지금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이나 주님의 축복이나 능력을 배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배워서 무엇하겠습니까? 내 생활 속에 나타나 내가 체험을 할 수 있을 때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체험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 귀로 듣고 배우는 것 보다 더 확실한 지식이 되고 오래 오래 지식으로 남는 것이 실험하는 것 아닙니까? 실험을 하면서 지식을 익혀 놓으면 오래가고 확실히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귀로 듣고 배워서 믿는 믿음도 안 믿는 것 보다 귀하지만 체험적인 신앙이 귀한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어떠하다, 주님의 사랑은 어떠하다, 주님의 축복은 어떠하다는 체험의 신앙은 어디에 가서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배울 필요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체험입니다. 나이가 많아 머리가 희어지고도 ‘어머니’하게 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감격하는 이유가 바로 체험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머니’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감격해 하겠습니까? 물어 보면 대답은 잘 해도 그 사람에게는 절대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 체험이 없다면 십자가와 부활에의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기까닭에 우리의 믿음은 체험을 할 때, 배워서 깨닫지 못했던 것을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체험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2절을 보면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석수와 목수를 보내어 그 궁궐을 건축하게 하였더라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줄을 깨달았으니 이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진흥하게 하셨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깨달았음이니라’하고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말씀을 사무엘하서 5장 12절에 ‘알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서 5장 12절에 나오는 ‘알았다’고 하는 말과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깨달았다’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말하면 ‘야다’라는 말입니다. ‘야다’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앓다, 깨닫다’라고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을 오늘에 와서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깨달았다’라는 말은 귀로 들어서 깨닫는 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가서 배워 깨달아 알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은 반드시 체험과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을 때 ‘야다’라고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알았다, 깨달았다’라고 할 때는 체험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광성교회를 시무한지 35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35년 동안을 같이 교회를 섬기면 믿음 생활을 한 사람들도 있고 25년을 함께 신앙 생활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김창인 목사에 대해서 물어 보면 그 분들은 “내가 김창인 목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김창인 목사를 잘 알면 얼마나 잘 알고 있겠습니까? 저의 겉으로 나타나는 면 외에는 모르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나타나는 면도 있지만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숨은 면이 오히려 더 많이 있습니다. 그 나타나지 않는 면을 누가 알겠습니까? 제 아내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제 아내는 저와 함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마누라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 아내는 저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알고 또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겉으로 나의 나타나는 면밖에 알지를 못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쓰는 ‘야다’라는 말은 이처럼 체험을 통해서 알다 또는 깨닫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로 하여금 왕으로 세우신 것을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뒤늦게 깨달았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시어 이새의 아들 중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예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가서 여덟 아들을 보는 중에 막내 아들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 때 ‘다윗이 내 마음에 꼭 들었으니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너를 왕으로 세워야 네가 내 뜻을 다 이루겠다’하여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들 딸에게 무조건 높은 자리, 왕의 자리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자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자리만 절대 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곧바로 왕이 되었습니까?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에 고난을 겪었습니까? 그 당시에는 사울왕이 살아 있었습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여야 나의 왕의 자리가 안전하겠다’생각하고 얼마나 다윗을 죽이려고 이 잡듯이 뒤졌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고 숨을 곳이 없어 외국으로 도망을 가기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토벌하는 것이 뜸해지면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가 다시 토벌이 심해지면 다시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그러기를 몇 해를 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예선했다’고 하는데 도망을 다닐 수 밖에 없었던 다윗에게 깨달아졌겠습니까?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사울왕이 죽은 후에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열 지파를 거느리고 왕이 됩니다. 열두 지파 중에서 남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서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 때만해도 다윗은 하나님이 왕으로 기름을 부어 세웠다는 사실이 깨달아 지지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열 두지파가 되는데 그 중에 작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의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다윗은 생각할만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다윗에게는 확실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 뒤 7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이 왕으로 있는 그 열 지파에서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내란이 일어난 뒤 그 열 지파가 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우리도 당신을 왕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하고 열두 지파가 함께 다윗을 통일 왕국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 때 다윗이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내가 하나님의 세움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삶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깨달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까닭에 우리들에게는 믿음의 체험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삶의 체험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은 배워서만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배우는데서만 끝내면 여러분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배운 그 성경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사랑으로 나타나고 축복을 나타날 때 ‘배운것 이상으로 진리가 있었구나’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체험이 믿음생활에 살이 되고 여러분의 생활에 능력이 될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체험적인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퀴쉬너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아들을 하나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들이 태어난지 3개월만에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 보았더니 ‘조로증’이라는 병이었습니다. 조로증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부터 성장이 멈추고 노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3개월 된 아들이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이제부터 늙기를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가막힌 일이겠습니까? 이 병은 고치지 못하는 병입니다. 이 병에 걸리면 오래 살아야 10년을 살수 있습니다. 3개월 된 아이가 늙기를 시작해서 10년을 살고 죽을 때는 100살을 살고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늙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말을 하겠습니까? 밥 한 숟가락을 자기가 떠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십년을 키우다가 그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 그 목사님 내외분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아이의 장래 치르고 와서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왜 착한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 있는가?’ 거기에서 네가지 해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가만히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악한 사람 또는 안 믿는 사람들만 고통을 당하는 아니라 믿는 사람 그리고 믿는 사람 중에서도 충성을 다 하는 사람까지 고난을 당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고통이라는 것은 보편적이어서 누구에게나 똑 같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고통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누구에게나 100% 복을 주시는 법이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행복하다’하는 사람의 집에 가 보았더니 그 사람의 집에도 불행한 면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셋째, 반드시 그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 고통이 변하여 복이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빨리 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복이 되고 성공이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넷째, 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해 보지 않았을 때에는 교인들의 고통에 대해서 위로하는 말을 건성으로 했었고 가슴으로 닿는 위로가 아니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상대방을 구체적으로 이해를 하고 같은 입장에서 위로를 베푼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다 자기가 고통을 당하고 보니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고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뒤 퀴쉬너 목사님은 목회에 크게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런 고난 속에서 온갖 것을 체험하고 체험을 통해서 그 목사님은 너무 큰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고난이 닥쳐 올 때 그 고난을 고난으로만 끝내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시고 거기에서 많은 것을 깨달으시면 그 고난은 여러분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기회의 복 (8-11)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에서 11절을 보면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방비하러 나갔으나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를 침범하였는지라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이에 무리가 바알브라심으로 올라 갔더니 다윗이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하나님이 물을 흩음 같이 내 손으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함으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7년 동안 다윗이 조그만한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왕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온 이스라엘이 전부 다 돌아와서 기름을 부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지금 대관식을 합니다. 얼마나 기분이 들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 위험은 발 밑까지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이 온 이스라엘 즉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기반을 잡기 전에 죽이려고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범해 온 사실을 다윗은 대관식 끝에 알고 나아가 보았더니 르바임 골짜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꽉 차 있었습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의 경계에 있는 깊은 골짜기입니다. 거기에서 올라오기만 하면 예루살렘입니다. 즉 예루살렘 발 밑에까지 침범해 와 있었습니다.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가서 진을 쳐야 할 자리에 블레셋 사람들이 먼저와서 진을 쳤습니다. 난감하지 않습니까?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렇게 큰 위기에 처한 다윗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자기의 할 일이 기도 뿐이요, 하나님의 도움 뿐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 어찌하면 좋습니까? 내가 저들에게 나아가서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그래 나가라, 저 사람들을 너에게 붙여 주리라” 기도의 응답을 받고 다윗은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붙여 주시는데 못 이길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과 싸우는데 생각 밖에 쉽게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친 그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이렇게 생각 밖에 쉽게 저들을 물리치고 이긴 것은 물 흩음같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저들을 물리쳤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자기가 싸워 승리하고도 전부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부 그래야 합니다. 내가 돈을 벌고도 내가 벌었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벌어 주었다고 해야 합니다. 내가 성공해서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도 내가 잘 나서 차지했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이 자리를 잡아 주고 나로 하여금 앉게 하셨다고 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축제에 들 떠 있을 때 발 밑까지 위기가 닥쳐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위기가 닥쳐 왔다는 사실을 다윗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기쁨에 들 떠 있을 때 위기는 발 밑에까지 올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가보니 난감합니다. 이런 위기 때 다윗이 할 일은 기도뿐이었다는 것도 새겨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를 했더니 위기를 하나님이 바꾸어 주시는데 승리하는 기회로 삼아 주셨습니다. 다윗이 받은 기회의 복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기에 닥칠 때가 한두번입니까? 난감한 일을 당할 때가 한두번입니까? 그 때 우리가 할 일은 기도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순간 반드시 사태를 역전시키고 위기를 좋은 승리의 기회로 만들어 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복이 바로 이 기회의 복입니다. 여러분들의 위기가 오히려 성공하는 좋은 기회의 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믿음의 복 (12)

 

 본문으로 돌아가서 12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그 우상을 그곳에 버렸으므로 다윗이 명하여 불에 사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단번에 다윗을 해치우려고 다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시니 물을 흩음같이 다윗이 쉽게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쳤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고 르바임 골짜기로 뒤를 쫓아가 보았더니 길가에 버려진 것마다 그들이 가지고 왔던 우상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민족의 신, 나라의 신으로 섬기는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곤이라고 하는 신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이라고 하는 우상을 전부 주머니에 넣고 왔습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그런 신을 섬겨서 무엇합니까? 분명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블레셋은 다곤이라는 신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은 그 이전에 하나님과 다곤신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기 좋게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만났고 그 하나님을 믿고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얼마나 큰복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이 복중에는 최고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가서 세미나에 참석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을 받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친정 아버지 이상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까닭에 이 믿음은 복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영국 대학의 교수 중에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교수가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려고 흑판에 "no where is God"라고 썼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때 독실하게 믿는 학생 하나가 “교수님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나와서 해봐요” 그 학생이 앞으로 나가더니 그 글자를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는 앞에 있는 'no'에다가 뒤에 있는 'w'를 가져다 붙였습니다. 그러면 ‘now'가 됩니다. 뒤에 있는 'where'에서 ‘w'를 빼면 ’here'가 됩니다. 그렇게 하고 보니 “now here is God”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뜻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말인데 글자 하나를 뒤에 놓으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가 되고 글자 하나를 앞에다 놓으면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다가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살고 있고 나와 함께 일하고 있고 지금 나와 함께 싸우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그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주일이 돌아오면 광성교인들에게 예배를 받아야하겠다고 손을 꼽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나와 함께 전쟁에 나가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싸우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하나님과 함께 앉아 있는 믿음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런 믿음을 복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믿음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가 함께 싸웠더니 함께 승리했다는 믿음이 여러분들의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다윗은 체험을 통해서 깨달음의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체험적이어야 합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생활이기 까닭에 체험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깨달음이 가장 복된 것입니다. 둘째, 다윗은 기회의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위기를 당했으나 기도를 통해서 사태를 바꾸어 승리의 기회, 축복의 기회, 성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기회의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위기 속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 위기가 여러분들에게 오히려 성공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복을 받았습니다. 나와 함께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함께 싸우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입니다. 다윗의 복이 여러분들의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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