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로마서 › 바울의 영성, 이 시대를 따라 살지 않는 것

허태수 목사 | 2021.01.19 22:02:2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롬12:1-2
설교자
허태수 목사
참고
2019.4.12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바울의 영성, 이 시대를 따라 살지 않는 것

롬12:1-2

 

바울의 영성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어떤 신비한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영성은 세상 속에서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에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세상을 거부하고 저항하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넘쳐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말할 때 우리는 이와 같은 바울의 영성을 지나쳐서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하길, 지중해 연안과 유럽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권능 때문이었다(롬15:19)고 말합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영성을 세상에 펼쳐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던지 계시를 따라 했다고 말합니다(갈2:2). 자기가 받은 계시가 엄청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면 과대평가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을 교만하게 하지 못하도록 가시를 주었다(고후12:7)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가시란 몸을 콕콕 쑤시는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의 가장 큰 자랑은 자신이 예수를 뵈었다(고전9:1, 15:8)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예수를 뵈었다’는 말은 그의 의식에 지평이 열렸다는 말이고, 넓어졌다는 말이고, 그로 인해서 삶의 가치와 방향성이 바뀌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른바 대각(大覺)즉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고, 커다란 전환(컨버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이런 모든 일들은 그의 복음적 삶(이방에 복음을 전하는)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갈1:16). 신비체험이나 입신의 체험을 강조하던 고린도 교우들이 바울을 비난하자 바울은 고후12:2-4 으로 대응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낙원까지 다녀온 이야기를 합니다. 이 정도면 바울은 영성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으로 자신의 신앙의 높낮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그에게 그런 것은 신앙의 표준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반대로 그의 약점 즉, 영성이라고 할 수 없는 비난 받을 만한 것들을 자랑합니다(고후11:30, 12:5).

 

바울이 표적과 기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롬15:19, 고후12:12, 행16:18)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런 은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타내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는 일(롬15:19)에만 헌신했습니다. 방언, 예언도 했던 바울이었지만 방자하게 사용하면 허공에 대고 하는 헛짓이라고 했습니다(고전14:7-11). 바울은 영으로도 기도하고 이성으로도 기도했다고 합니다(고전14:15). 바울은 성령의 온갖 은사에 두루 충만한 선교적 삶을 살았지만 그의 글들은 얼마나 치밀하고 논리적인지 여러분이 그의 서신들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빠져들고 미칠 줄 아는 영성의 사람이지만, 교우들을 대할 대는 가장 이성이며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들이요,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이다”(고후5:13). 영성에 사로잡힌 뜨거운 사람이면서 삶에서는 차가운 이성을 가진 사람, 이것이 바울의 실체입니다.

바울의 영성은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롬8:19-22에 보면, 창조세계의 피조물들이 내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당하는 아픔을 아는 영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자연을 동시에 고통에서 건져내는 것이 그의 영성의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성은 인간의 해방과 구원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반면 오늘날 우리의 영성이나 구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국한된,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영성이요 구원론입니다.

 

바울의 기도에 대한 생각을 보더라도 우리의 신앙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롬8:26-34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바울의 기도는 이런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성령을 대상으로 청구를 합니다. ‘성령님, 이런 저런 것을 해결해 주세요. 들어 주세요’. 아니면 ‘이런 거 저런 거를 하나님께 요구하는데 거들어 주세요’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는 분’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령께 간절히 기도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는 겁니다. 이게 참 묘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이 성령께 기도를 할 때 그 내용은 인간의 필요를 기도의 내용으로 삼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령이 인간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 인간들의 필요를 그가 기도하는 게 아니라 그의 필요 즉 하나님의 필요를 인간들을 위한 기도내용으로 갖게 됩니다.

 

이렇게 바울의 영성이라고 할 만한 모든 신령한 체험과, 소유들은 모두 나를 위한 하나님의 간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고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세상을 따라 살지 않는, 세상에 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새사람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바울은 그의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사람이 되었고(완성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다가 목숨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영성인데, 이 영성은 곧 예수를 따라 살았던 삶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바울도 그렇게 살다가 죽었던 것입니다. 이 길을, 이 삶을 우리도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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