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궁극이 | 2024.03.03 09:08:1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6:45-50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645-50: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아버지께서 보냈다고 했으니 아버지는 아들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잘 아신다. 아들은 충성봉사를 잘 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밝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이렇다하고 가르친다.

 

교회의 목사가 아버지의 궁극적인 뜻은 안 가르쳐 주고 충성봉사를 열심히 하라고 하면 안 된다. 또한 목사를 잘 섬기면 축복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도 안 된다. 목사를 잘 섬기라고 하는 말에는 교인들을 얼마든지 착취할 수 허점이 들어 있다. 참 종들의 세계에서는 충성봉사를 강조하면 안 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말씀대로 순종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성도에게 이룰구원의 축복인 하나님의 온전을 입혀주시고, 모든 지식적 도덕적 차원을 신적인 것으로 높이시고, 세상만물을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주신다.

 

부흥회 때나 교회의 집회에서 부흥강사가 목사님을 잘 섬겨라.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라. 그러면 하늘나라에 가서 큰 상을 탄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돈 많고 건강한 사람은 그 말대로 할 수 있지만 시간이 나지 않거나, 몸에 병이 들거나, 가난한 사람은 못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그런 게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파도 구원, 살아도 구원, 부자도 구원, 가난해도 구원이다. 이 구원은 힘쓰는 것만큼 들어간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자로 잘 만들라는 거다. 이게 우리의 구원이다. 여기서의 구원이란 지옥에서 천국 간다이런 의미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잘 닮고 영능의 실력을 가져서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게 세상을 살다가 가는 나그네로서의 보람이다.

 

말세가 되면 세상에 거짓 종이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성경을 바로만 보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가 참 종인지, 거짓 종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거짓 종들은 허영심 허욕심 허풍성 영웅심이 많다. 이런 허욕심으로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가겠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는 것은 이사야가 나를 보내소서라고 한 정신과는 다르다. 사람 속에 영능의 실력이 있어야 나가라고 하시는 거지 무장도 안 된 상태인데 나가라고 하면 100% 죽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나가라고 하시겠느냐? 오늘날 이런 교회, 이런 목회자, 이런 교인이 많다. 이건 속에 교만이 든 거다. 세상교회는 이런 사람을 알아주지만 주님은 안 알아주신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아버지께 배운 사람마다 예수님께로 온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언제 가르치셨느냐?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라고 했는데, 선지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글씨만 써놓고 사라진 게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믿음의 선조들도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가르쳤다.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게 부모공경이다. 주님께서 주 안에서 너희 자녀를 노엽게 말라라고 하셨으니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의 이치가 바로 들어가도록 가르치면 이 자녀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고, 사람을 바로 알게 되고, 이러면 부모 공경성이 바로 된다.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면 부모도 모르고, 사람도 모르고, 이러면 하나님을 바로 못 섬기게 된다.

 

기독교의 신앙은 공을 들이거나, 자학을 하거나,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 가운데서 성경대로 정확하게 대신, 대인, 대사, 대물관계성을 짓는 거다. 이게 믿음의 사람이다. 교회 안에서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자는 이단자이고, 스스로 우상노릇을 하는 자다. 이건 외식 외모의 신앙형태들이니 우리는 옷을 입은 것이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옷을 입는 것이나 먹는 것에 자유롭다. 그런 것에 매이면 안 된다. 다만 사회에 범죄성을 유발하지 않게 처신을 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언행을 해야 한다.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이 말은 하나님을 직접 본 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렸다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누구냐?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으니 아버지를 보았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믿는 자에게 아버지의 약속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자는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적중성이어야 하는데, 이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어설프게 알아서 자기 꿈에 뭐가 나타나서 내가 예수다라고 하면 그냥 넘어가게 된다. 자기의 신앙을 외모 모양 형태적으로 꾸미고, 보이게 하고, 이런 것으로 신앙을 판단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거다. 우리는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아서 자기의 인격이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거다.

 

47-5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진실로 진실로라는 것은 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참 믿는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로 믿는 것을 말한다.

 

이란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소원 목적적으로 하나님의 것, 하늘의 것, 아버지의 것을 말한다. ‘참 본질로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너는 참 영생을 가진 믿음이냐?’ 하고 묻는 거다. 영생을 가진 믿음이라야 참 믿음이다. 그러면 영생을 가졌다는 것을 왜 강조하는 거냐? 믿는 사람들에게 물으면 다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데 영생이 아닌 임시 것, 세상 것, 불탈 것을 믿는 거짓된 믿음이 있다는 거다.

 

세상에 속한 것은 믿어봐야 전부가 불타고 썩고 변질되고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세상에 속한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라서 주님께서 믿음으로 봐주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음이라고 봐주느냐? 너는 영생을 가지고 있느냐? 쉽게 말하면 영생이신 주님을 가지고 있느냐? 또 너는 주님의 인격과 성품과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것에 신경을 쓰고 세상 것을 달라고 하면 이 사람 속에는 주님이 아닌 세상이 들어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거짓 믿음이다.

 

자기 속에 주님이 계신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 당신의 이 땅에 오심도 그렇고, 이 땅에 사심도 그렇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의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불타고 썩을 세상 것을 구하느냐? 이건 참 교회도 아니고, 참 성도도 아니고, 참 주님의 종도 아니다.

 

참과 거짓은 덩어리로 나누는 게 아니라 질로 나누는 거다. 금은 크기가 작아도 금이다. 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믿음도 일을 한 양이나 이뤄놓은 종교적인 업적을 놓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질을 두고 말을 하는 거다. 그리고 믿음이란 인격과 성품에 속하는 거다. 일을 한 양을 가지고 믿음을 논하는 것은 세상 속화된 교회다.

 

거짓 종들,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 이단자들 등의 거짓된 것을 따르는 교인들은 참 믿음이 아니라 거짓된 믿음이다. 거짓된 것은 영에 속한 게 아닌 전부는 눈에 보이는 세상물질에 속한 신앙이다. 눈에 보이는 게 기준이 되어 있으면 이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다.

 

예수님을 죽인 당시의 유대 바리새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된 믿음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오경의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부활도 믿었고, 천사도 믿었고, 하늘나라도 믿었지만 물질적인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신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의 신령성의 질을 보지 못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고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라. 너희들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육의 개념으로 물었고, 예수님은 영의 개념으로 대답을 하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육의 뜻으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 나가게 된 거다. 기독교의 영생은 위로부터 오는 거지 땅의 것, 세상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영생을 가졌다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체, 그 인격 자체, 그 삶 자체를 가졌다는 거다. 예수님은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타락된 요소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맞게 사셨다. 따라서 당신의 모든 언행심사가 영생이다. 당신의 움직임 자체, 활동 자체, 우리에게 향한 마음 자체가 전부 영생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때는 죄로 나오고, 어떤 때는 속임으로 나오고, 어떤 때는 미움으로 나오고, 자기 마음에 들면 좋다고 하는데, 이런 것은 다 육에 속한 거다.

 

믿는 사람이 육에 속한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살게 되면 외식 신앙자가 된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을 따라 사는 것이라서 사람이 안 바뀐 거다. 이런 자신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했는데, 영생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을 가지게 된다는 거다. 영생의 미음을 가진 자는 자기의 전 인격, 전 삶을 전폭적으로 천국에 두고 산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언제까지 과거처럼 살 수는 없다. 믿어갈수록 모든 면에서 올라가야 한다. 자기가 구원을 안다면 모든 면에서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살아라. 나의 구원을 남에게 빼앗기지 말아라. 늘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살면 자기의 영능의 실력이 커지고, 자기의 이름이 나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정복한다. 이게 구원정복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생명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목사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나는 생명의 떡이로다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학계와 종교계와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생명의 떡이 아니다. 이들의 이력과 업적도 생명의 떡이 아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런 자들의 지력과 이력과 업적을 자기의 떡으로 먹으려고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한 조각을 먹어도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생명의 떡이 아니다.

 

생명의 떡은 한 분밖에 없고, 예수님을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먹으라는 것인데, 우리가 이 생명의 떡을 먹을수록 안 죽고, 안 죽는 요소로 성장이다. 이 안 죽는 요소는 신령성이라서 생명의 떡을 먹을수록 내 속에서 안 죽는 것이 점점 커진다. 영능의 실력이 커지면서 강해진다. 세상과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는 게 가장 강한 건데, 이렇게 강한 것은 하나님의 것밖에 없다. 또한 강한 것은 눈에 안 보이는데, 눈에 안 보이는 이것이 많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정복한다. 그리고 생명의 떡을 먹을수록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진다.

 

세상에는 생명의 떡이 아닌 게 많다. 교회에도 생명의 떡이 아닌 게 많다. 이게 마지막 교회의 현상이다. 생명의 떡이 없는 교회에서는 사망의 떡을 주게 되어 있으니 이런 교훈은 독극물이라서 교인들이 이것을 받아먹으면 영의 성장성이 죽게 된다.

 

땅에서 난 모든 인간은 하늘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의 생명의 떡이 없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할 자가 없고, 신학계의 어떤 사람도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의 떡으로 여길 자가 없다. 교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사람을 생명을 떡을 찾는 데 있어서 참고를 할 수는 있지만 우상시하거나 절대자처럼 여기면 안 된다.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이 있을 수 있는 건데 어느 사람의 말이나 글을 성경 이상 높이면 이건 우상이다. 나를 온전케 만들고 완전케 할 성경을 보고 확인을 하고 확신을 해야 하는데 성경은 안 보고 사람의 말이나 글을 성경 이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런 면으로 우상을 섬기는 게 많다. 우리는 사람이나 건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자랑할 게 아니라 성경 깨달은 것을 자랑해야 한다. 사람을 자랑하면 자랑을 받는 그 사람은 우상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인간이라도 절대자가 없다. 우리는 성경을 절대로 놓고, 기준으로 하고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구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이질적, 육적, 세상적인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따른다. 오늘날 교회 안에 생명 길, 좁은 길, 하나님의 의사단일 길로 가는 자는 적고, 사망 길,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믿은 후에는 믿기 전과는 달리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떡을 먹게 된다. 생명의 떡을 먹으면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자기가 달라지게 되어 있다. 시각의 시감성의 차원이 달라지고, 도덕성의 차원이 달라진다. 달라지면 자기의 차원이 그만큼 올라간 것이라서 올라간 것만큼 기쁘고 즐겁다. 사람은 어떤 면으로 건 자기의 차원이 내려가면 슬프고 고달프고 힘들다. 자기의 차원이 올라가는 건지, 내려가는 건지를 자기 양심이 증거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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