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궁극이 | 2024.04.07 10:25:0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6:54-56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654-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을 글자 그대로 보면 예수님을 잡아먹으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은 예수님의 몸으로 행하신 것을 말하고, ‘는 예수님의 생명의 운동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알 것은 예수님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어떤 정신으로 사셨느냐? 세상사람들처럼 밥 먹고 죽는 정신으로 사셨느냐, 안 죽는 정신으로 사셨느냐?’ 하는 것을 알아서 그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율법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은 그대로 심판한다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틀렸다가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로, 즉 교훈과 언행심사로 율법의 정죄를 받을 사람의 죄를 없이 하고 의인으로 바꿔놓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이 예수 믿는 사람을 정죄할 수 없고,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으로 닮아갈 수 있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어려운 처지나 환경에서 구해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잡고 예수님을 닮아나가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의 성품을 덧입게 되는데 이것도 구원이라고 한다. 믿는 사람이 사건과 환경 가운데서 예수님으로 닮아가는 것도 구원이라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주님이 오신 소원 목적을, 교훈의 소원 목적을 모르면 자꾸 인간 자기의 욕심을 들어달라고 하게 된다. 하나님의 것을 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려는 기도가 금대접에 담겨서 올라가는 값진 기도인데 예수 믿으면서 썩어질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이치가 틀린 거다. 말세에 거짓 종들과 이단자가 많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세상 소원 목적으로 가르치는 자가 많다는 거다. 이건 불에 녹아진다.

 

주님께서 눅: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것에 대해 그들이 죄를 더 많이 지어서 죽었다고 보느냐?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하셨다. 재난을 받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남보다 죄가 더 많다고 하면 안 된다. 설령 그들이 죄가 많다고 해도 심판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그런 사건을 믿는 나에게 보여주는 것은 나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거다. 죄인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니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려면 어떤 모양으로 건 하시는 거고, 우리는 그런 것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고치지 못하면 그 심판이 자기에게 올 수도 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서 심판에 걸릴 자로 살면 안 된다.

 

지금 사람들의 정신 속에 세상 물질적인 생각이 가득 들어있다. 이게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환난이다. 환난에는 개인적인 환난이 있고, 교회적인 환난이 있는데, 교회적인 환난은 세상 사회적 환난과 통한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는 사회가 조용해야 예수 믿기가 편하다고 하면서 기독교인이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적으로 잘못된 거다. 이렇게 되면 누가 주인이냐? 세상이 주인이 된다.

 

말씀이 주격이 되어서 이 말씀의 실력과 말씀의 정신 하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세상을 정복해 들어가다 보면 사회가 정화가 될 수도 있다. 사회정화는 곧 사람정화다. 그런데 사람정화가 없이 사회를 정화하려고 하면 자꾸 물질을 풍요롭게 해 줘서 사람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 주면 평화로운 사회가 된다고 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건 사람을 더 못 쓰게 만드는 거다. 물질적 역사적으로 보면 100년 전, 50년 전, 10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살기가 좋아졌는데 지금 좋아진 것만큼 평화로운 사회가 되었느냐? 그러니까 세상의 평화는 물질의 풍요와는 상관이 없는 거다. 어찌 보면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은 물질 풍요와는 반대가 된다고 볼 수도 있다.

 

가정에서 부모가 물질을 좇아가면 자녀도 물질을 좇아가게 된다. 교회에서 목사가 물질을 좇아가고 물질을 구하라고 가르치면 교인들도 물질을 좇아가게 된다. 이건 넓은 길이요 멸망 길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생명 길 좁은 길이다. 하나님의 한 의사로 가는 좁은 길이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처럼 식물을 먹었지만 정신과 소원과 목적은 신령천국에 두고 사셨다. 누구를 만나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온전을 입히는 일을 하셨다.

 

어느 날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구약 때처럼 훌륭한 선지자로만 알았지 신령천국에서 오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런 니고데모가 그 날 할 일을 다 마치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니고데모의 주님을 찾는 신앙의 지식이 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로 예수님께 유대의 통일을 위해 같이 힘을 쓰자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밤에 찾아온 것과 예수님을 높이는 말을 한 것을 볼 때 그의 말에서 풍겨지는 냄새가 주님의 만능의 능력으로 로마를 때려 엎고 유대의 독립을 위해 일을 해 봅시다라고 하는 거다. 주님은 니고데모의 이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니고데모의 이 말을 듣고 네가 거듭났느냐?’ 라고 물으신 거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중에 관원이요, 엘리트 중에 엘리트요,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지도자인데도 사람이 거듭나는 게 무엇인지를 몰라서 엉뚱한 대답을 했다.

 

교인들은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교회라고 하면 목사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났느냐?’ 라고 물으신 말씀은 알고 보면 목사님들에게 먼저 주는 말씀이다. 목사님들이 거듭나지 못하고, 즉 사람이 바뀌지 않고 세상 소원 목적으로 산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산 삶을 좇지 않는 것이라서 이런 목사는 교인들에게 세상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이 말씀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으면 이 사람은 주님의 마음 안에 들어있다는 거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생명을 말하는 거고, 예수님의 살은 구원 얻을 자를 위해 활동하신 몸을 말하는 것이니, 주님은 우리의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사셨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우리가 주님의 이 마음과 정신을 따라 살면 이룰구원이 잘 이뤄진다.

 

믿는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이니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교회에서건, 어디서 무엇을 하건 세상사람들이 사는 것과 같은 정신으로 살면 안 된다. 자기의 언행심사 속에는 주님의 얼굴이 들어있고, 교회가 들어있고, 하늘나라가 들어있다. 이것을 늘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게 이룰구원의 삶이다.

 

자녀들 중에는 부모의 얼굴을 생각해서 조심하는 것도 있다. 나라의 일을 보는 사람은 자기에게 나라의 얼굴이 있고, 자기 나라의 명예가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하는 것도 있다. 이게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옳은 지도자의 정신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결국은 다 사람에 의해 된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것도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하고, 공부를 많이 했으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공부는 사람을 진정한 인격의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안 된 상태에서 지식만 많이 배우면 배운 지식으로 사람을 속이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최고로 고상하고 수준이 높은 하나님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이 성경이 깨달아지면 나라의 살림살이도 바로 하게 되고,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바른 처신을 하고 바른 일을 하게 된다.

 

믿는 우리의 삶은 이룰구원에 목적을 두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이뤄져 가는 거다. 이렇게 살면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신다고 했다. ‘마지막 날이란 세상 끝 날이라는 말도 되고, 또한 현재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악조건에 처해지고 고난과 환난을 겪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 사람에게는 그런 게 필요해서 주신 것이니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그 신앙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어떤 방법으로건 일으키신다는 거다. 그래서 의인의 자손은 망하는 법이 없다고 말씀을 하신 거다.

 

예수님의 삶은 참된 양식의 삶이다. 믿는 우리는 이 삶을 보고 그 정신을 깨닫고 그 정신을 따라 사는 거다. 예수님의 생명은 참된 생수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자는 항상 이기고 승리하게 되고, 존귀 영광성의 결과가 돌아온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그렇게 안 사는 거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정신은 천국을 점령해 들어가는 전투요 정복이다. 이게 이룰구원의 판도다. 거짓된 세상 것으로 들어가면 아무리 성경구절을 인용해도 세상이다.

 

참된 양식과 참된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에게 이것을 주시려고 하늘에서 오셨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입혀서 하늘의 것을 부어주시고, 크고 작은 사건 환경에서 주님을 닮게 하신다. 그래서 기독자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 다른 것을 먹으면 사는 법이 없다. 다른 것이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거다. 교회 인도자가 교인들에게 다른 것을 먹이면 이룰구원이 성장이 안 되고, 성장이 안 되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따르고, 멸망이 따른다.

 

예수=구원이요,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니, ‘예수 그리스도란 우리의 구원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면 가치판단 평가성이, 그리고 인격과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거다. 이게 아니면 믿는 효력이 없다.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자기에게 오면 예수냄새를 맡아야 하겠는데 예수 믿으면 너 같은 사람이 될까 봐 나는 안 믿겠다. 너 혼자 예수 믿고 천국에 가라라고 한다면 자기는 마귀 짓을 하며 살았다는 거다.

 

내가 가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면 전부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고 이질이다. 이질은 거짓된 거다. 믿는 자기가 참을 먹느냐, 거짓된 것을 먹느냐? 어떤 가르침을 받느냐에 따라 참된 사람으로 되기도 하고, 거짓된 사람으로 되기도 한다. 교훈에 따라 이렇게 된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성도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셨다. 교회의 신실한 종들도 늘 교회를 염두에 두고 교훈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를 생각하기를 사회적으로 못 살고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적으로 돕는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믿는 사람도 이런 일을 해야 하지만 이런 일이 주된 일이 되어서는 안 되고 복음을 위해 이런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영 구원을 위해 하늘나라에서 오셨다.

 

안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편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목적으로 산다. 이 목적이 바뀌게 하려면 예수를 믿고 바른 정신이 들어가게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의 교훈을 들고 이 땅에 오신 거다. 진리본질의 교훈을 듣고도 세상을 향한 소원 목적이 안 바뀐다면 이 사람에게 돈을 준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다. 사람을 바로 만들려면 하나님도 얼마니 힘든지 인간이 표현으로 성부 성자 성령님이 다 달라붙어서 구원의 일을 하시는데도 잘 안 된다.

 

주님의 옳이 종은 쉽게 되는 게 아니다.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한다. 돈 주고, 밥 주고, 예배당을 준다면 누군들 목회를 못 하겠느냐? 그런데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 이런 것을 바란다. 옳은 종이 되려면 물질초월, 인정초월, 생명초월이 되어야 한다. 이걸 안 겪으면 제대로 된 목회가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믿으려면 먼저 참과 거짓부터 알아야 한다. 주님부터, 하나님부터 바로 알아야 그 다음에 바른 판단이 들어가는 거지 기준도 안 세우고, 저울도 안 주고 무겁다. 가볍다를 판단하라고 하면 어떻게 알겠느냐? 기준일수록 근원이 반듯해야 하고, 이치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가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먼저 하나님의 것을 가져야 한다.

 

교훈적으로 참된 양식과 음료를 먹어야 소원도, 목적도, 모든 이해타산도, 가치판단과 평가성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교회에 가서 어떤 설교를 들어도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닮게 하는 설교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 이건 하나님의 옳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거다.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성격적으로나 성질적으로나 성품적으로 하나도 바꿔지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세상사람들의 마음과 똑같다. 안 바뀌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기 전의 성격, 성질,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이 달라져야 하는데 똑같다면 바로 된 게 아니다. 헛 믿었다. :에서 보면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고기잡이에서 하늘의 것을 깨닫고 제자가 되고, 그 다음에 성령의 부음을 받고 하늘의 사자로 나갔다. 이게 교회다.

 

교회에 다닌다면 교훈을 받으면서 한 이치 한 이치 깨달아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교훈을 늘 같은 말이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 무슨 말이냐? 우리 교회는 어떤 설교를 해도 늘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거다. 이 성경 저 성경, 이 사건 저 사건, 이 존재 저 존재를 들고 말을 해도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설교가 늘 같다고 하는 의미는 다른 교회들처럼 울리고 웃기면서 재미있게 예배를 하고, 노래도 부르고, 눈요기도 하게 해 달라는 거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지느냐? 안 된다. 그러니 이런 의미로 말을 하는 것은 교만이고 은혜를 못 받는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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