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궁극이 | 2024.04.14 09:18:0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6:56-58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656-58: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당신의 언행심사 전부로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사람이 영원히 안 죽는 교훈은 하늘의 것이라야 된다. 말씀 속에는 하늘의 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신과 사상이 들어있으니 믿는 우리가 말씀 속에서 이것을 발견해서 하늘의 가치판단 이해타산 평가성을 가지고 살 때 이룰구원이 된다.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예수를 믿는다면 하늘의 지식으로 바뀌고 하늘의 정신이 들어가야 하는데 현재 예수 믿는 자기는 하나님의 것으로 얼마나 바꿔졌느냐? 자기가 의사나 소원 목적이 하나님과 단일이 되는 게 주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가 되는 거다. 이게 믿음생활이요, 이룰구원의 생활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주님의 사랑권 애정권 치리권 생명권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이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 속에서 실질적으로 되어지는 성령님의 역사다.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이건 인간의 용어로는 주님과의 결합이다. 결합은 하나가 된 것을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고 결합이 되어야 했는데 이게 안 되니 인류에게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 그래서 결혼은 진리사상으로 결합이 되어야 한다. 뜻이 같지 않으면 같이 못 간다. 사람을 물질의 조건을 보고 취하면 안 된다.

 

기독자의 가정은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다르면 주님의 의사단일로 결합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이룰구원이 있기 때문에 자녀들의 결혼이나 늙은 부모가 재혼을 할 때 지혜를 써야 한다. 주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기를 때 주님의 눈에 합격이 되게 길러야 한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이것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 인격적 결합을 말한다. 사람을 만날 때 한 쪽은 믿는 사람이고 한 쪽은 안 믿는 사람이면 잘 안 통하고 대화가 힘들다.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이라도 어느 한 쪽이던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아니면, 소원 목적이 다르면 서로 안 통하고 대화가 힘들다. 믿는 사람이 늘 물질을 우선으로 하고 살면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진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는 거다. 그런데 수십 년을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녔어도 예수 믿는 목적을 모르는 교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집사, 권사, 장로, 목사라는 직분을 가졌으면서도 예수를 안 믿는 이방 불신자보다 못하면서 남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가 자기 쪽으로 향하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을 했다는 거다. 예수님께서 나의 아버지라고 할 때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하시는 거냐? 예수 믿는 나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하시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에게 아버지라고 하실까? 1: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려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인간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을 하는 거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거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지만 속성적으로 아버지의 속성을 입을 수 있다는 게 전제가 된 말이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듯이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그 정신으로 살면, 즉 주님과 의사단일로 인격적 결합이 되면 그 성질은 생명이고 영생이니 이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이룰구원으로 계속 성장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계속해서 배우고 듣고 자라야 한다.

 

우리는 믿을 바에야 주님으로 닮아지고 실력자 영광자 존귀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믿는 우리에게 이렇게 되게 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고 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이런 마음의 소원도 없고, 말씀으로 자체화 되는 것도 없이 자꾸 말로만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하고 있으면 안 된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라고 하면서 애달파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말씀의 이치를 깨닫는 족족 자기 것으로 삼으면 뜻대로 사는 것은 자동적으로 된다. 그 생각을 하고 그걸 먹으면 자꾸 그 마음의 살이 오르게 되는 거다.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늘로서 내려온 떡은 구약의 조상들이 먹은 만나와 같지 않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가 다른 점이 무엇이며, 같은 점이 무엇일까? 만나는 모세가 만들어서 준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왔고, 예수님도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니 하늘에서 온 것이 같다. 다른 점은 만나는 먹었어도 죽었지만 예수님을 먹으면 생명이요 영생이다.

 

만나도 매일 먹어야 살 수 있고, 예수도 매일 먹어야 사는 건데, 만나는 자기 입맛대로 굽기도 하고, 찌기도 하고, 볶기도 해서 먹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인격자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자기 입맛대로 먹을 수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변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이니 인간은 이 분과 의사단일로 인격적 결합을 해야 한다. 예수님을 먹으면, 즉 예수님의 정신 사상을 먹으면 주님과 인격적 결합이 되고 예수님으로 닮아지지만 구약의 만나는 아무리 먹어도 이렇게 되는 게 없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이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매일 아침 일찍 내려주셨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늘에서 주신 이 만나를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먹었지만 다른 백성들은 육신의 생각과 욕심을 가지고 육신의 배가 부르기 위해 먹었다.

 

만나를 육신의 배가 부르기 위해 먹었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을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자기의 세상적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에 모인 무리들에게 이적의 떡을 먹였는데, 이 떡을 먹은 사람들은 떡을 만드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안 붙잡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배가 부르겠구나. 세상적인 소원 목적을 이룰 수 있겠구나라고 하면서 육신을 목적으로 따랐는데 이것도 여기에 속한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람들도,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도 다 죽었다. 이것은 예수 믿으면서 육신의 축복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죽는다는 거다.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고 하는 것은 먹으면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들어있는 말이다. 또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는 것은 영적인 말씀의 이치를 육적으로 먹으면 먹고도 영인성장 면이 죽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가 말씀을 먹고 소화가 잘 되면 영인성장 면이 자라고, 내 속에 예수가 살고, 내 속에 예수가 살면 나는 안 죽는다. 죽어도 안 죽는다.

 

우리가 진리본질에 정확한 옳은 신앙이 되려면 구약과 신약을 가르지 말아야 한다.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약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말씀이고, 신약은 메시아가 오셨으니 주님과 의사단일로 결합을 하라는 거다. 그래서 구약 때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성경인 모세오경을 보면서 미래적으로 하늘로부터 오실 메시아를 깨달아야 했는데 이들은 하늘의 만나를 먹으면서도 오실 메시아와 연결이 되지 못하고 잘렸다. 이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거다.

 

이런 신앙의 원리는 신약 안에도 있다. 예를 들면 세례요한을 못 만나면 예수님을 못 만난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세례요한을 못 만났더라도 예수님이 자기 앞을 지나간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거지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당신보다 먼저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미리 길을 닦으라는 것인데, 이것을 영적, 계시적, 신앙 질적으로 보면 지금도 세례요한의 신앙사상을 가지지 않으면 예수님과 인격적 결합이 안 된다는 거다.

 

이걸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마음의 질이 예수님께서 들어올 수 없는 세상 길, 넓은 길로 되어있으면, 즉 세상 소원 목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안 오시는 거다. 교훈적으로 보면 세상을 외치는 비진리적인 가르침에는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고, 못 깨닫고, 못 만나는 거다. 이런 종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종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망하느냐, 흥하느냐?’가 들어있다. 예수 믿는 속에는, 교회의 설교 속에는 자기의 성패가, 죽고 사는 문제가 들어있다.

 

시대적 시간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은 2천 년 전에 이 땅에 왔다가 갔지만 그 교훈의 질은 지금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이런 신앙의 질이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를 하시니 지금도 우리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고 영특하고 높이 올리는 역사를 하고 계시는데 이 역사를 따라 사는 교인들이 거의 없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깨달음이나 만들어짐이 세상에 속한 목사보다 훨씬 위에 있어야 한다.

 

세상의 역사 속에만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무엇을 할 때는 항상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니 이걸 볼 줄 알아서 악령의 역사에 동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악령의 운동에 동원이 되면 자기의 일생이 다 날아간다. 자기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런 게 항상 있는 것이니 오늘도, 내일도, 다음 주도 항상 성령의 운동과 악령의 운동을 구별 분별하면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지만 질적으로 보면 지금도 성경에서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다. 그래서 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했으니 마리아가 신앙의 족보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갔다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거다.

 

그러면 메시아가 어디서 오느냐? 구약의 선지자들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것은 지리적인 장소만 말하는 게 아니라 신앙의 질을 말해주는 거다. 글자대로 보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으니 우리가 베들레헴으로 가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신앙의 질적으로 보면 다윗이 어떤 정신으로 살았기에 그곳에서 메시아가 나오게 되었는지 다윗의 그 사상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나올 수 있는 그 사상, 그 정신, 그 신앙이 어디서 살아나오는 거냐? 베들레헴, 즉 떡집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어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생명의 떡이 아니면 먹지 말라는 거다.

 

구약의 신앙의 인물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믿음의 사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이분들의 신앙사상을 받아 가지면 인격적으로 예수가 만나지는 거다. 그러나 구약 때건, 신약 때건, 지금이건, 미래적으로건 육적인 생각으로 예수를 믿으면 이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그 믿음은 자라지 않고 죽는 거다. 이러면 사단 마귀가 원하는 사람이 된다. 사단 마귀는 교회에서 이런 역사를 한다.

 

네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세상 것을 구하라라고 하는 게 마귀의 수법이다. 오늘날 세상적인 종들이 교회 안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런 말을 듣고 그렇게 믿어 나왔다면 이 사람이 반석 위에 세워진 게 있겠느냐? 믿음이라고 할 게 있겠느냐?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살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바른 믿음을 가졌더라면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바른 선택이 나오는 건데 아브라함 옆에 살면서 믿는 시늉만 했기 때문에 자기가 평소에 가진 믿음을 따라 소돔 고모라 쪽을 선택을 해서 불붙는 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살면서 딸들이 장성을 하자 롯의 처가 롯에게 요단평야에는 빌딩도 있고 물질도 풍부하니 그곳의 총각에게 시집을 보내자고 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시집을 가서 믿음으로 잘 살았느냐?

 

장인이 내일 성에 불이 떨어진다라고 하는데도 사위가 이 말을 농담으로 들었다. 믿는 사람인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길 정도의 사위인데 롯이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딸을 시집을 보낸 건지? 롯의 아내가 딸을 소돔의 총각에게 시집을 보내자고 할 때 롯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안된다고 분명하게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로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에 녹아버렸고,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다. 롯은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 죄악을 짓는 자들을 보고 늘 속이 상했다. 그러면 얼른 그곳에서 나와야 했는데 왜 거기에 있었느냐?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

 

1:에서 첫날에 빛을 만드셨는데, 이건 햇빛이나 달빛이 아니다.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마음속에 조명적 각성적 영감이 비춰진다. 이러면 창조의 목적을 깨닫게 되고, 모든 성경에서 구원이치가 보이게 된다. 어느 성경을 봐도 구원이치가 들어있다. 이걸 발견하고 시편의 시를 지은 거고, 이걸 발견하고 잠언을 지은 거고, 이걸 발견하고 전도서를 쓴 거다.

 

1:에서 계:까지 세상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들어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만든 목적은, 그리고 세상의 역사를 진행시키는 것은 인간의 구원 때문이다. 여기에서 빗나간 것에는 온전의 구원이 없다.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성도의 온전이 아닌 세상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해서 성도들을 넓은 길, 사망 길,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마귀에게 속한 거짓된 종들이 많아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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