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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6 추천 수 0 2021.07.18 21: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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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3:14-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3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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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사순절 넷째 주일, 2021년 3월14일

 

사도신경의 마지막 문장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입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이 무슨 뜻인지는, 개인에 따라서 생각이 다를 겁니다. 죽은 다음에 천당에서 지금과 같은 삶이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가족과 친구를 만나 즐겁게 지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한편으로 소박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고상해 보이지만 기독교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저는 죽음이라는 고지가 멀지 않은 이들만이 아니라 청년들에게도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운명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의 삶만 해도 팍팍한데 어떻게 죽음 이후를 생각하냐고 대답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의 삶을 의미 충만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을 버려두면 안 됩니다. 오늘 설교는 그 질문과 직결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요 3:14~21절의 주제는 영생입니다. 15절과 16절에는 영생이 직접 언급되었습니다. 요 3:16절은 어린이 교회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외우기도 하고 노래로 부르기도 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에서 키워드를 추리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 각각의 단어가 기독교의 본질에 닿아 있습니다. 이 다섯 단어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알면 영생 개념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십시오. 두 개의 사실이 적시된 문장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1) 하나님의 존재론적 근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기준으로만 대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으로, 또는 사랑의 능력으로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려면 일단 자신이 사랑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농사꾼이 있다고 합시다. 많은 수확으로 소득을 올리는 것만을 생각하는 농사꾼은 농사 행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흙과 날씨와 계절과 자신의 땀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는 농사꾼은 농사 행위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농사 행위를 통해서 충만하게 사랑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눈이 열린 사람은 농사 행위의 사랑을 받는 농사꾼처럼 세상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표현은 기이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그것도 외아들이 있다는 말은 그리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에서 나옴 직한 이야기입니다. 외아들은 어떤 궁극적인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전형적인 은유(메타포)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 신성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유일무이한 현상이라서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 최고 도공과 제자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그 도공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그 도공의 제자만이 그 도공의 예술 세계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도공과 제자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자기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제자가 도공의 아들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은 순전히 혈연관계에서만 아버지와 아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요 3:16절은 이어서 믿는 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믿는 자는 요한복음을 받아볼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인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즉 하나님의 신성이 유일하게 나타난 인물로 믿었습니다. 여기서 그 신성이 뭐지, 하고 질문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에 비춰서 대답한다면 영원한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신성입니다. 또는 사랑을 신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는 뜻입니다. 좋은 아파트를 산다거나 연봉 높은 직장을 얻었다는 사실에 운명을 거는 게 아닙니다. 아파트와 연봉도 우리의 일상에서 소중하기는 하나 생명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끝없기에 그런 조건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만족할 수 없는 일에 운명을 거는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 3:16절은 ‘멸망’에 대해서 말합니다. 멸망할 사람이 있고, 멸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합니다. 지나치게 독단적인 표현으로 들리긴 합니다. 18절에 노골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멸망이나 심판이라는 단어도 은유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병이 난다거나 사업이 망하지 않습니다. 18절에서 보듯이 믿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심판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절대적인 생명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빠져보지 못한 사람이 사랑의 능력에서 제외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더 불행한 일은 이 절대 생명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심판을 받지 않을 사람입니까,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까.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겠지만,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돌아보면 어느 정도 답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세상에서 출세하거나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지 보십시오. 너무 뻔한 질문인가요? 사실은 자녀의 신앙 문제도 부모 마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저처럼 전업 목사로 사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힘으로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일단 기독교인 부모로서 자녀들의 인생에서 무엇이 절대 생명인지는, 즉 무엇이 영생인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요 3:16절이 말했는데, 그 영생은 실제로 무엇일까요? 무조건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본래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아주 짧게 살다가 모두 죽습니다. 영혼은 죽지 않고 육체만 죽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죽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죽는 겁니다. 우리가 죽으면 살아있던 우리의 모든 조건은 없어집니다. 더는 목사가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니고, 남편이나 아내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하는 우리의 뇌는 가장 빨리 그 기능을 상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한한(endless) 삶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어떤 이들은 죽으면 천당에 가서 천년만년 잘 먹고 잘 마실 것을 기대합니다. 거기서 다시 가족을 만나고 교회 교우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표상이 은유라면 괜찮지만, 사실로 생각한다면 코미디가 됩니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천당에서 만나면 어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죽음 이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여기에서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이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버텨낼 수 있지 영원히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버텨내기 힘듭니다. 다른 사람은 백 살이 안 되어 죽는데 자기만 3백 년쯤 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 사람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구원입니다. 오래 산다고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시간의 연장이 아닙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나는 영생을 믿는다』(Auferstanden in das ewige Leben)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 누리는 생명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생명을 늘리려고 애쓰는 오늘날의 의학적, 생물학적 활동은 종교가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영원은 무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1쪽). 한군데 더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러한 원천에 도달하는 것은 생명의 시간적 길이가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생명의 순간적인 깊이이다.”(22쪽). 사람에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긴 합니다. 저는 100살 넘겨 사는 사람의 인생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런 장수가 영생과 직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급 뷔페식당에서 무한정 오래, 그리고 많이 먹는 게 먹는 즐거움의 충만과 직결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전체로서의 생명 경험


다시 물읍시다. 영생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완전한 대답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누가 거기에 더 가까이 갔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 질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학문과 종교와 예술과 시와 문학, 그리고 법과 의술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 완전한 대답을 모릅니다. 거기에 가까이 갈 뿐입니다. 저는 제가 다가간 정도 안에서 영생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의 설명과 비교해보기 바랍니다.


저는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생명의 전체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전체를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것이 곧 영생 경험이라고 말입니다. 전체는 처음과 마지막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사건에서부터 종말에 완성하실 사건까지 전체를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의 한 부분에만 참여합니다. 이 부분적인 생명도 물론 생명입니다. 그러나 전체 생명은 분명히 아닙니다. 개인의 인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머니 자궁에서 우리는 씨앗 같은 생명체로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자궁 속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시작과 마지막에 전체적으로 걸쳐 있습니다. 어느 순간만을 자신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인생을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해 보십시오. 현생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시간은 지구 전체 나이에 비해서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앞으로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잘 모릅니다. 지금 한순간만으로 인류가 누군지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침팬지와 공동조상에게서 갈려 나왔으니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 공동조상 너머까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만 보면 난자와 정자가 우리의 시초라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오늘의 인류를 그 이전의 생명체와 연결해서 상상하기 어렵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의 뿌리가 아득한 세월로 소급한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인류와 지구 생명 역사의 전체성 안에 들어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저의 설명이 너무 현학적이라거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유가 없이는 성경이 말하는 그 영생의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편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다만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기억해두십시오. 절대 생명에서 소외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이런 사유는 공부를 많이 하거나 시간이 넉넉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린아이만 아니라면 누구나 이런 근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생 농사만 짓거나 막노동만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시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끔 별을 보다가, 또는 꽃을 보다가,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다가, 혹은 가족과 단란하게 밥을 먹다가 불현듯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깊어지면 다른 일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다시 요한복음이 전하는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정말 신비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생명 현상의 전체 역사 안으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질문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영생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을 때와 죽어서 땅에 묻힐 때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살면 될까요? 조금 더 넓혀서 인류 조상인 유인원이나 수십만 년 이후 우리 후손의 미래까지 생각하면서 살면 될까요? 이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과 관심은 물론 필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저는 성경의 대답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창조와 부활의 실체(reality)가 된 분을 믿는 것이 대답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요 3:16절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 10:28절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 예수님이 영생을 준다고 말하며, 요 11:26절도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이 옳은가요, 헛소리인가요?


저는 요한복음의 진술을 진리(요 3:21a)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요 14:9b).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와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경험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의 능력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염려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만을 갈망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연민인 죄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 해방 경험이 부활 경험이며, 그 부활 경험이 영생 경험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오늘 여기서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얻은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 있게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외쳐도 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남은 한 가지 숙제는 이 세상에서 영생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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