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데살로전 › 그분 앞에 서기 위하여"(To Stand Before the Lord)

김영봉 목사 | 2013.09.16 17:36:5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살전2:19-20
설교자
김영봉 목사
참고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3년 3월 17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14)
"그분 앞에 서기 위하여"(To Stand Before the Lord)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데살로니가전서(1 Thessalonians)  2:19-20

1.

지난 주에 저는 재림에 대해 아주 어려운 설교를 했습니다. 많이들 어려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다행히 평소에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해 하고 또한 혼란스러워하던 교우들께서 고마움을 표해 주셨습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최후의 심판'입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다시 오실 주님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사도신경'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도 재림의 주제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처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자세히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고 또한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떠한 일과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예언들을 기초로 추론할 수밖에 없는데, 그 예언들도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재림에 관한 예언처럼,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예언은 실제 사건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암시일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심판의 주제는 모두가 피하고 싶어합니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시스틴 성당(Sistin Chapel)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라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그림에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겪을 참혹한 고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도 그려져 있지만,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심판에 대해 생각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심판에 설교하는 것도 좋을 것이 없고, 그것을 듣는 것도 유쾌하지 않습니다. 물론, 입만 열었다 하면 심판을 설교하는 설교자들도 있습니다. 교인들을 위협하려는 불순한 동기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설교자의 마음에 쌓인 분노가 그렇게 표출되기도 합니다. 대개 심판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심판에서 면제되었다고 믿습니다.

듣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심판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하면 예배 출석률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만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심판에 대해 설교를 하면 발길을 돌립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성서적인 믿음에 바르게 서려면 용기를 가지고 이 주제를 대면해야 합니다. 비록 마지막 심판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기가 어렵고, 학자들마다 그리고 교파마다 이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심판에 대해 큰 줄기만이라도 확인해야 합니다.


2.

역사를 훑어 보면, 시대 사조가 두 극단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봅니다. 질병이나 전쟁 혹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세상 살이가 어려워지면 보수적인 경향이 강해집니다.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강경파가 득세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는 사회적인 필요 때문입니다. 반면, 전쟁이 그치고 질병이 줄어들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되면 자유주의가 득세합니다. 이것을 '진자의 법칙'(the law of pendulum)이라고 부릅니다.

심판에 대한 대중의 생각도 진자의 법칙을 따릅니다. 보수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지면 심판에 대한 설교가 많아집니다. 1차와 2차에 걸친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경제 공황이 지속될 때 보수주의가 득세했고 교회에서는 심판에 대한 설교가 자주 들렸습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지던 시기에 그러했습니다. 그 시대에 교회에 다니셨던 어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선교사들은 늘 심판에 대해 설교했고, 교사들도 항상 '불의 심판'을 경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계 대전이 끝나고 경제적으로 부흥하면서 보수주의가 밀려나고 자유주의가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없는 시기가 길어지면서 인류는 머지 않아 지상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의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모든 질병을 퇴치할 것만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자유주의가 득세하게 되었고, 교회에서는 심판에 대한 설교가 증발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설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지난 반 세기 동안 교회는 희망의 복음과 긍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판에 대해서는 침묵했고, "지옥은 없다"는 말이 신학자와 설교자의 입에서 자주 들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의 주제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싫어합니다.

심판의 주제를 싫어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악의 현실을 심각하게 대면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을 살면서 이런 저런 악의 현실을 경험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 관계 문제가 쌍방에 잘못이 있게 마련이고, 웬만하면 며칠 혹은 몇 주일 괴로움을 당하고 끝날 일입니다. 삶의 경험이 그런 사람들은 마지막에 심판을 받고 그에 따른 형벌을 받는다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잘 했으면 얼마나 잘 했고 못 했으면 얼마나 못했다고, 그 크신 하나님이 쩨쩨하게 먼지만도 못한 인간을 앞에 세워 두고 심판을 하시겠느냐?'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악의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엮이면 봄날같던 일상이 하루 아침에 칼바람 부는 겨울날처럼 변해 버립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문제가 되었던 초등학생 성폭행범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이가 내 아이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면, 이 땅에서 다 받지 못한 심판을 저 세상에서라도 받아야 옳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무고하게 희생 당한 사람들은 회복되어야 하며, 오직 악밖에는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이 심판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청년 시절에 읽었던 신문 칼럼이 기억납니다. 당시에 전라도에서 어느 경찰이 총을 들고 나와서 여러 사람을 죽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범행이 아주 악했습니다. 그 때 저는 조선일보의 주간이었던 고 선우휘 선생의 컬럼을 좋아했는데, 그분이 그 사건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의 말미의 한 구절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확히 암기하지는 못하지만 기억에 의존하여 되살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이런 사건을 볼 때마다 심판은 있어야 하고, 지옥도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3.

저는 아직 재판정에 서 본 일이 없습니다만,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자신의 무죄를 확신한다 해도, 담당 변호사가 아무리 유능하고 또한 승소를 장담한다 해도, 재판정에 서는 사람은 불안하게 마련입니다. 그 불안감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재판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재판관도 인간인지라 언제나 진실을 완벽하게 가려내지는 못합니다.

얼마 전, 잘못된 판결로 인해 10년 동안 징역을 산 사람이 무죄로 밝혀져 풀려났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법원에서는 정부가 그 사람에게 1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배상하도록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잘못된 판결로 인해 10년이 아니라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둘째, 자신의 다른 죄가 드러날까 싶어서 두렵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문제가 전부라면, 그것에 대해 만반의 준비만 하면 되는데,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잘못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낭패입니다.

셋째, 자신의 죄로 인해 받아야 하는 대가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마지막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영원한 재판관이 어떤 얼굴로 나타날지, 그 자리에 섰을 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죄가 드러나지는 않을지, 드러난 모든 죄에 대해 내가 당해야 할 징벌이 어떤 것인지--이런 염려로 인해서 마지막 심판에 대해 생각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심판하시는 사람은 무당이나 점쟁이가 섬기는 잡신처럼 자기 기분대로 결정하는 존재도 아니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처럼 원칙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심판자는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피에 굶주린듯한 충혈된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저승 사자가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요 18:37)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기분대로 판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의로운 재판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의 최종
심판에는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분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항상 바르게 판단하시는 재판장 앞에 선다는 것으로 일단 안심입니다. 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정당한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잘못된 판정으로 10년을 감옥살이하는 것도 억울하지만, 잘못된 심판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만큼은 제대로 된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4.

하지만 심판의 결과를 생각하면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우리가 자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뻔하지 않습니까? 혹시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만하면 나는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꿀릴 거 없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거울에 비추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광선으로 영과 혼과 육 모두를 스캔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임재 앞에 서면 자신의 모든 죄를 깨닫게 되고,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게 됩니다. 그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어느 기독교 월간지에서 근위축증(muscular dystrophy)으로 46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 정태두 박사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빠의 선물>이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장차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로 사역할 것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학위 과정을 8개월 남겨 둔 시점에서 불치의 병을 얻습니다. 이 병은 발병하고 나면 보통 3년 안에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병세가 깊어지면서 남편이 불러주는 대로 아내가 타이핑을 하여 학위 논문을 썼다고 합니다.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 잠시 신학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미국으로 들어와 치료를 계속합니다.

희망이 없다 싶을 때,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해보고 싶다"면서 3일간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불행하게도, 금식 때문인지 몸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에 말은 하지 못했지만 희미하게나마 의식은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냅니다. 마침내 그는 "이제 당신 앞에 갈 준비가 되었으니, 제 영혼을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자신을 맡깁니다. 그 때, 그의 눈 앞에는 스크린 같은 것이 펼쳐지고 어릴 때부터의 삶의 모습이 슬라이드 쇼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태두 박사는 그것을 보는 동안 심히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만 보여주세요. 너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병원에서는 장례식을 준비하라고 할 즈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회개하며 다시 기도합니다. "저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 때,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33일만에 병세가 급속도로 호전된 것입니다. 물론, 근위축증이 치료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그 때로부터 5년 동안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주위의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주님의 임재와 사랑을 증거합니다. 식물 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면서 그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천국은 반드시 있어. 잠시 사는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갈 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해!" 

꼭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진하게 경험할 때 우리는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몸서리칩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성을 자각한 사람들은 바울 사도와 함께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

이렇게,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고 나면, 아무리 공정하고 정확하게 심판을 받는다 해도,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영락 없이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실 재판관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그분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 인류를 품으시고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가 겪을만한 모든 유혹과 고난과 아픔을 겪으신 분입니다. 부활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라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그분을 우리는 지금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5.

그분은 당신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 죄를 용서받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매일 그분과 함께 동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재판관으로 서 있을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재판정에 설 때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죄가 드러날 것 같아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까지도 다 아십니다. 내 무의식의 바닦까지 다 보셨고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주님께서는 그분의 투시하는 광선으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모두 스캔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분에게 드러났고,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모든 죄와 악을 아시지만 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에 대한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심판은 영원한 형벌로 가는 길목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을 확인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따라서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하거나 그로 인해 질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다만, 우리는 앞에서 소개한 고 정태두 박사의 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죄에 대한 심판은 면제 받지만 우리의 삶에 대한 결산 절차는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그 때, 주님 앞에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빈 손으로 주님 앞에 이른다면, 주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준 그 모든 은혜를 어떻게 했느냐? 내가 너에게 준 은혜로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재물입니까? 지상에서 쌓은 업적입니까?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정과 존경을 내놓겠습니까? 교회에서 얻은 직분을 내놓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주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심판의 불에 타지 않고 남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 (고전 3:13-15)

 이것도 '사실 언어'가 아니라 '비유 언어'입니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룬 일 중에서 영원히 남을 것이 있고 유한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돈은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업적과 훈장과 명예와 직분은 심판불에 모두 타버릴 것입니다. 그런 것밖에 없는 이들도 은혜로 구원을 받기는 하겠지만, 마치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겨우, 간신히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나를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된 영혼들입니다. 나의 사랑과 헌신과 수고와 희생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고 변화받은 영혼을 말합니다. 또한 주님의 교회를 위한 거룩한 헌신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친 희생도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기쁨이나 자랑할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살전 2:19-20)

이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과연 지난 세월동안 나로 인해 주님을 알고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주님의 능력을 변화받은 영혼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주님의 교회를 위한 거룩한 헌신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한 사람의 영혼을 품고 신음으로 기도한 일이 있습니까? 혹시 나의 인생은 오직 물질만을 위해 혹은 나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허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모든 것이 다 타버리고 "불을 헤치고 나오듯" 알몸으로 서게 되지는 않겠습니까?

지난 세월 그리고 지금,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신앙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이 말씀을 통해 힘을 얻기 바랍니다. 부모에게 억지로 끌려 와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믿음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자주 지치고 실망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의 영혼입니다. 또한, 새로 시작하는 성인 신앙교육반의 교사들 그리고 속회를 섬기는 분들도 이 말씀을 통해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섬기는 것은 곧 주님의 교회를 위해 섬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꼭 영혼을 직접 대하는 사역이 아니더라도 주님의 교회에서 섬기는 모든 일들은 영혼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내놓을만한 영원한 일입니다.

교회에서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주님 대하듯 하면 됩니다. 누구를 대하든, 피상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도 모르는 순간에 우리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때, '아, 나는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네!'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주님께서 "너로 인해 변화받은 영혼들을 내가 알고 있다.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 없다고 생각하고 외면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리고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끝내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는 것이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심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 제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 심판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는 심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옛 사람을 장사지내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심판대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과 환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다만, 그분 앞에 빈 손으로 서게 되지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우리의 구원이 "불을 헤치고 나오는 듯" 겨우 받는 구원이 아니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사랑과 봉사와 섬김과 희생을 통해 주님을 알고 변화받는 영혼이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 몸에 난 상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기쁨으로 그분에게 나아가 그분과 함께 영원한 기쁨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
심판자로 오실 주님,
그 날이 오기 전,
저희로 주님 앞에 서서 심판받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에 죽게 하소서.
주께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
주님의 뜻을 받들게 하소서.
주님 앞에 설 때
빈 손으로 서지 않도록
저희를 사용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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