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산상 변모

최주훈 목사 | 2023.02.20 07:38:3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17:1-9
설교자
최주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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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루터교회

(교회력설교)20230219 산상변모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출 24:8-18/ 마 17:1-9

산상 변모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입니다. 교회력 말씀인 시편 2편은 거룩한 산에 왕을 세웠다는 찬송이고, 구약의 말씀인 출애굽기 24장은 시내산 이야기, 그리고 복음서 말씀인 마태복음 17장은 변화산 사건으로 알려진 본문입니다. 모두 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시내산

 

힘들게 산에 올라보신 분들은 그 기분을 잘 아실 겁니다. 산 위의 경험은 일상을 치유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산 정상은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건, 올라가면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이지요. 산꼭대기에서 어떤 감동을 했든지 그것은 순간일 뿐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산 이야기도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가르칩니다. 

구약의 말씀인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과 단둘이 40일간 독대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계명이 적힌 두 개의 돌판을 받게 됩니다. 모세의 이 경험은 하나님의 약속과 보호하심이 얼마나 강력한지 소름 돋게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평생을 산꼭대기에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명은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계명을 받은 시내산이라해도 그곳은 모세와 백성에게 여행의 종착지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경유지일 뿐입니다. 산꼭대기의 경험은 전체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올라가면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오늘의 복음서 말씀도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 예수님이 산 위에 올라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인 마태복음 17장에서도 주님은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보통 ‘변화산’이라고 알고 있지만, 복음서 어디서도 산 이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저 ‘높은 산’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왜 산에 올랐는지, 얼마나 걸렸는지, 올라가면서 어떤 대화를 했는지 아무런 설명도 안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는 대뜸 산 정상에 오르자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변형”되었다고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17:2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들 앞에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여기서 ‘변형’(metamorphosis)이라는 말이 참 특별합니다. 원래 그 뜻은 ‘맑아진다, 투명해진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눈이 어떻다 코가 어떻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투명하고 맑아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감히 예수님의 변한 얼굴을 묘사할 수 없어서, 아니면 인간의 말로는 그걸 표현할 수 없어서 ‘맑아졌다 투명해졌다’라고 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신비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는 뜻이겠지요. 

계속 보도록 하지요. 3절입니다. 이렇게 눈이 부시게 변형된 것으로도 충분치 않았는지,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율법의 수여자이고, 엘리야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꼽히는 인물이라 이스라엘 백성에겐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이걸 보고 베드로가 흥분합니다. 그래서 뻔한 말을 불쑥 내뱉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는 불필요한 사족을 덧붙이지요. ‘여기가 참 좋으니, 예수님꺼 하나, 모세와 엘리야 꺼 각각 하나씩 이렇게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곳에 편안하게 자리 잡고 예수님, 모세, 엘리야와 살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 봐도 산위의 이 체험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신비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분위기가 바뀝니다. 5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빛나는 구름이 이곳을 덮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엎드려 두려움에 떱니다. 이 두려움은 순전한 공포일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마귀의 산

 

여하튼 분명한 것은, 산 위에서 제자들은 신비한 체험을 했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그렇게 ‘산’을 신비하고 거룩한 장소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전체를 읽어보면, ‘산’은 반드시 거룩하고 신비한 장소로만 쓰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4장을 떠올려 봅시다. 거기엔 마귀에게 시험받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가지 시험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4:8 이하를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는데, 절만 하면 천하 만물을 다 주겠다고 유혹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잘 보세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도 산에서 일어나고, 마귀의 유혹도 산에서 일어납니다. 마태복음에서 높은 산은 그렇게 하나님과 악마가 동시에 서 있는 장소입니다. 이말은 곧 악마 같은 현실 속에 하나님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거룩하게 보이는 것 안에 마귀가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섣불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옳고 그른 것, 성스럽고 속된 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혼돈스러운 현실입니다. 이렇게 기준 없는 불확실한 세계로 끝나면 우리 세상은 참담하지요.

하지만,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름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이런 혼돈에 놓인 제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17:5을 함께 읽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이어지는 6~8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제자들은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이 혼란스럽고 두렵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이후에 더 이상한 일이 하나 생깁니다. 

8절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눈을 들자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고, 예수님의 모습이 여전히 빛나는지 아닌지, 하늘의 빛나는 구름은 어떻게 변했는지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신비가 사라진 그 자리에 오직 예수님과 제자만 남습니다. 이 구절은 혼돈 속에 던져진 신앙인이 바라봐야 할 지향점이 어디인지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돈, 명예, 권력, 신비 등등. 그러나 결국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건 예수님입니다. 

산에서 내려가다

이제 오늘의 복음서 마지막 구절인 9절 말씀으로 넘어갑시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오늘 말씀의 마지막 구절은 그들이 산에서 내려갔다고 매우 담담하게 말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세 제자는 산에서 내려와 다음 목적지로 향합니다. 엘리야와 모세의 흔적이 있는 그곳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산에 초막을 짓고 거기 살겠다는 베드로의 귀여운 충동은 결국 옳지 않은 것으로 판명됩니다. 

솔직히 말해 베드로와 우리의 생각은 거의 같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장소에서 살고 싶고, 위대하고 유명한 인물 곁에 있고 싶고, 걱정근심 없는 땅이라면 작은 초막이라도 짓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살겠다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이건 베드로만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뭔가 정돈되어 있지 않고 소란하고 혼란합니다. 그래서 늘 주님이 계신 산 위에서 좀 더 높은 수준, 뭔가 다른 삶, 현실을 넘어서는 신비한 체험을 하며 살고 싶어 합니다. 신앙 생활하다 보면 실제로 그런 신비한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거기 그대로 머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올라간 것은 내려와야 한다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와야 합니다. 산꼭대기 경험은 이야기 전체에서 한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강력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명료하게 느끼고 체험하는 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체험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항상 그렇게 선명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산꼭대기 경험은 반드시 평범한 일상, 여전히 중요하지만 화려한 조명과 특별한 소리가 포함되지 않는 평범한 순간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7장은 산 위의 신비한 사건을 산 아래로 이어갑니다.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과 제자들은 원래 그랬던 대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시고, 거기서 귀신 들린 아이를 낫게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 속으로, 범상한 곳에서 일상으로, 범상한 곳에서 평범한 곳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유와 회복을 일으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예배로 모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이곳은 산위와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여기 머물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말씀과 성찬의 힘으로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배 순서의 마지막 파송 찬송때 우리가 모두 일어나 들어온 문을 향해 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일상이라는 삶의 터전으로 입당하게 됩니다. 이렇듯 주님은 우리에게 위로하며, 힘을 주시고, 산 밑으로 함께 내려갑니다. 이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산상변모와 십자가

 

오늘 설교는 여기까지 해도 되겠지만, 9절 말씀을 조금 더 풀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의 마지막 구절이 매우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갑작스럽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9) 변화산 사건과 예수님의 죽음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서 기자는 이 구절로 우리를 단박에 십자가 사건으로 돌려놓습니다. 변화산의 빛나고 영광스러운 사건은 반드시 십자가의 참혹한 사건과 함께 묵상하라는 것이지요. 이 둘은 서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톰 라이트라는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변화산 사건이나 십자가 사건 중 하나를 묵상할 땐, 반드시 다른 한 사건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산에서 영광 받으신 예수님이, 저 예루살렘 밖 언덕에선 수치를 당하십니다. 여기 산에서 예수의 옷은 하얗게 빛나지만, 거기서 그분의 옷은 벗겨지고 찢겨 제비 뽑아 병사들이 나눠 가집니다. 이 산에서 예수의 양옆엔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영웅 모세와 엘리야가 있지만, 저기 언덕 예수의 양옆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께 반항했는지 보여주는 두 명의 강도가 곁에 있습니다. 여기 산에선 밝고 신비로운 구름이 현장을 드리우지만, 거기선 땅에 어둠이 가득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놀랍다고 엉겁결에 고백하지만, 거기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곤 수치심에 숨어버립니다. 여기 높은 산에선 하나님이 직접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지만, 저기 십자가 언덕에선 이방인 병사가 ‘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놀라며 말합니다.” (인용: 톰 라이트, 『마태복음 I』, 양혜원 역, (서울: IVP, 2010), 35.) 

오늘 복음서 말씀을 돌아봅시다. 산 위에서 신비롭게 변모하는 예수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우리는 과연 어떤 예수를 믿고 있나요? 

 

갈등의 끝

 

끝으로 오늘 복음서 말씀의 맥락을 눈여겨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무작정 산에 오른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17:1은 ‘엿새 후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랐다’라는 설명으로 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마 17:1). 6일, 6일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적에 대해 마태복음은 침묵합니다.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요.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마태복음 16:21부터 훑어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처음으로 예고하는 장면이 나오고, 제자들이 당황한 모습,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곧 죽게 될 저 예수 뒤를 계속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갈아타야 하나? 줄을 잘 못 선건가? 한 편으론 예수님을 따르려는 순수한 열망이 그들을 붙잡고, 다른 한 편으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그들을 팽팽히 잡아당깁니다. 

이런 혼란과 긴장 속에 시간이 흐릅니다. 그 사이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해명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돕지 않는 깊고 무거운 시간이 제자들에게 찾아옵니다. 그렇게 6일이 지납니다. ‘엿새’라는 숫자는 유대인에게 안식이 없는 노동의 날을 뜻하는데, 여기서 엿새는 자신의 미래를 심각하게 갈등하는 제자들의 시간을 뜻합니다. 

6일은 갈등의 시간입니다. 어디 제자들만 갈등할까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순수한 신앙의 열정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이 갈등은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상입니다. 오늘 누군가 이런 갈등 속에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6일의 어디쯤 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런 갈등과 염려를 잘 아십니다. 6일 후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주님은 6일간 답을 찾지 못해 갈등하던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고, 그곳에서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시며 두려움을 거두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갈등하며 염려하는 우리 모두를 산 위에서 산 아래의 일상으로,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시간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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