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계시보기)성령충만은 진리충만.

궁극이 | 2023.02.24 14:08: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7:55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악령이 충만해서 이를 갈며 내가 죽어서라도 너희들에게 원수를 갚겠다라고 했느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말씀의 이치에 충만해야 한다. 말씀의 이치는, 생명의 이치는 죽어가는 것도 살리고, 죽은 것도 살리고, 귀신 들린 정신을 바로 교정시키고, 귀신을 쫓아낸다. 귀신 들린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보면 멀쩡하게 보이지만 견딜 수 없는 사건과 환경에 부딪히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친 짓이 나온다.

 

 

충만이라고 할 때 몸을 덜덜 떨고 방언 예언을 하는 것으로 아는 것은 잘못된 거다. 진리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충만이다. 진리이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지식적으로만 진리를 알고 있으면 사람이 교만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자기를 쳐다보고 자기를 해부해서 성격과 성질과 성분적으로 진리와 배치되는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야 한다.

 

 

스데반이 순교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되 네 목숨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기라고 한 말씀에 충만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는 게 성령충만이다. 가만히 있다가 이게 나오는 게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혀 살면 순교의 사건이 닥치면 능히 순교하게 되는 거다. ‘내가 순교를 하련다가 아니라 그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건이 오면 순교를 하게 되는 거다.

 

 

순교의 정신은 말로 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로 통해 진리이치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순교의 정신을 가지면 다 순교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고 사람에 따라 주시기도 하고, 순교는 당하지 않더라도 전 생을 순교의 정신으로 살게 하시기도 한다. 이것은 순생애다. 복음의 정신도 없이, 진리본질도 없이 순교하겠다는 것은 네 생각이다.

 

 

구약에 믿음이 좋은 조상도 있고 하나님 앞에 원수노릇을 한 조상도 있는데, 왜 이것을 성경에 기록해서 지금의 나로 보게 하는 것일까? 남의 나라 조상을 왜 나에게 보여주는 거냐? 지나간 일을 왜 나로 보게 하는 거냐? 나와 무슨 상관이냐? 성경에 조상들의 일을 기록한 것은 남 얘기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말해주는 거다. 그리고 우리 조상 중에는 예수를 믿은 사람도 있고, 우상을 섬긴 사람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는데, 구약 때의 사람이나, 신약 때의 사람을 성경으로 엮어서 지금의 나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달 수 있는 저울이고, 천국의 저울이고 잣대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기준으로 놓고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소원과 목적을 비교하면 이 사람이 임시성으로 살았는지 신령계 천국을 목적으로 살았는지 다 나온다. 그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살았는지 냄새로도 나오고 색깔로도 나온다. 쉽게 말하면 우리 주님이 사람을 모르시겠느냐?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고 역사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모르시겠느냐? 이분을 기준해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거다.

 

 

주님을 기준해서 인간을 보면 우리의 장단점이 다 나오기 때문에 주님에 비해 잘못된 것을 깨닫고 고칠 수 있다. 주님을 날마다 따른다는 것은 날마다 주님의 정신으로 산다는 거다. 믿는 정신에서 이걸 빼버린다면 무엇을 믿는 거냐? 우리가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들로 죽 올라가면 이 조상들로부터 자기에게 내려온 것이 분명히 있는 건데, 무엇을 물려받았느냐? 믿는 정신에서 벗어난 것을 받았으면 단호히 버려라.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하나님의 족보에 인간이 끼어들었고, 인간의 족보에 하나님이 끼어들었다. 이렇게 기록한 것은 지금의 우리로 하나님의 족보에 끼어들 수 있는 신앙을 받으라는 거다. 가지라는 거다. 그러니 생각을 해도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아라.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생각을 앉고 살지 말아라. 이런 게 자기를 늘 지배하면 어두운 사람이 되지만 옳고 바른 것을 생각하면 정신이 맑아진다. 사람이 밝고 명랑하고 진취적이고 발전적이고 하나님과 쉽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이치다.

 

 

성경에 네 가지 밭의 비유가 있는데, 자기가 마음을 쓰는 것에 따라 자기 마음이 가시밭이 될 수도 있고, 길가 밭이 될 수도 있고, 옥토가 될 수도 있다. 자기의 마음 밭은 자기가 가꾸는 건데, 어떤 마음 밭에서 신앙의 열매가 30, 60, 100배가 나오겠느냐? 이 세상은 시험이 있는 곳이니 자기가 시험에 들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지 말아라. ‘자기가 평소에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열매가 열린다.

 

 

:에 예수님께서 나타난 모습이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눈은 불꽃 같고,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다고 했는데, 주님의 머리털을 자기 머리와 비교해 봐라. 자기가 평소에 무슨 일을 할 때 주님의 마음으로, 진리정신으로 하면 이 사람은 말씀이 자기를 지배하는 거다. 주님이 이 사람 속에 들어있는 거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특히 하나님의 백성의 영능의 실력을 위해 주권적으로 세상을 창조, 보존, 섭리하신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자연만물을 보면서 영적인 면에서 보는 신앙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믿는 우리가 이 땅을 살다 보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도 하고, 시절이 좋은 때도 있고 안 좋은 때도 있고, 환난 핍박을 받는 때도 있고, 시련의 때도 있고, 부요한 때도 있고, 곤고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는데, 이런 일을 겪으면서 영적인 면을 깨달아야 한다. 이 면에 둔감한 사람은 영적인 면을 준비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일반사람들과 똑같다.

 

 

다른 사람은 부요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자기는 고통 가운데 산다면 자기는 한겨울을 사는 거다. 믿는 우리는 이런 상태를 겪으면서 영적인 면을 감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팔자타령, 남 원망, 하나님 원망을 하며 헛세상을 살게 된다. 이런 것을 통해 영적으로 못 깨달으면 이 사람은 육 기준으로 사는 것이라서 주님 맞을 기름준비가 안 된다.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서 우리 속에 영이 있는데, 영은 신령계에 속하고 육은 물질계에 속한다. 그리고 영육 결합체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하나님을 닮은 닮아갈 수 있는 존재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영인이 재창조되어 나갈 수 있는 우리다. 이런 인간이 영을 무시한다면 이 사람은 짐승처럼 사는 거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영적인 이치의 말씀을 깨달아 나가면 영특해지고, 지혜로워지고, 똑똑해지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게 되고, 이러면 육신은 마음의 다스림을 따르게 된다. 이러면 몸은 의의 병기가 된다. 육신이 마음의 다스림을 따르지 않으면 치매에 걸린 사람과 같아진다.

 

 

성경이 아니면 인간이 인간을 못 깨닫는다. 성경이 아니면 만물의 이치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못 깨닫는다. 세상에 속한 학문에는 학박사요 영리하고 똑똑하다고 해도 영적인 면을, 이룰구원을, 창조의 목적을 모르면 이 사람은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심판이다.

 

 

세상사람들은 문물의 발달만 생각하지 인간의 기준을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이걸 알게 하는 게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할 일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당신의 종들이 할 일인데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으면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모르는 거다. 이치가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한 사람이 마음을 볼 수 있으면 모든 사람의 마음도 볼 수 있는 거다. 이것에 따라 사람이 지혜롭게 되거나 바보가 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자가, 진리 앞에 바로 선 자가 자기를 바로 세운다.

 

 

다 같이 예수를 믿어도 빨간 말을 탄 교인이 있고, 흑 말을 탄 교인이 있다. 잘못된 신앙지식을 받으면 사람이 잘못된다. 중이 자기감정으로 산에서 사는 게 아니라 잘못된 지식에 의해 그렇게 사는 거다. 그들의 도는 생로병사 해탈인데,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앞으로 겪을 고통을 죽기 직전까지 다 겪어야 해탈이 된다는 거다.

 

 

사람이 앞으로 살면서 하루 세 끼씩 한 평생 먹을 것을 오늘 하루에 다 먹어 치울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게 안 되는 것처럼 현재에서 앞으로 겪을 고통까지 다 겪어야 해탈이 된다고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미련한 거다. 이런 자들은 귀신에 붙잡힌 거다. 그래서 이방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으나 사회적으로나 자기 개인적으로 뭐가 있느냐? 생산이 있느냐? 이웃이나 사회에 유익을 주는 게 있느냐? 사람이 못 깨달으면 이렇게 살게 된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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