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목사가 왜 이래

허태수 목사 | 2016.04.27 23:54:4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25:31-40
설교자
허태수 목사
참고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목사가 왜 이래  
마25:31-40 
2016.2월14일 11시 설교 원교입니다.

신학대학의 교수인 목사가 딸을 패 죽인 다음에 이불을 덮어 놓고 1년을 지낸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항의합니다. “이게 뭡니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목사가 왜 이러는 겁니까?”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발뺌하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최후의 심판>이라고 해석되는 성서 본문에서 이 감당키 어려운 질문에 답해 보려는 겁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최후심판은 개인의 도덕적 죄를 응징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당하는 이들이 도덕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뭡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심판은 오직 어떤 사람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좌우될 뿐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힘없고 가진 것 없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는‘작은 사람들’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마 18:6“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 깊숙이 잠기는 편이 낫다.”

시쳇말로“비오는 날 먼지 나게 팬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심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더 심합니다. 소가 돌리는 연자 맷돌을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큰 돌덩어리인지 알 것입니다. 그냥 물에 빠져라 해도 독설인데, 그 큰 연자 맷돌을 달고 빠지라니, 이보다 더 심한 독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작은 사람 하나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죠.

바울은 이런 사람을‘약한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들 간에 제사에 바친 고기를 먹으면 되느냐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은 음식일 뿐 문제가 안 된다고 했지만 어떤‘약한 성도’들은 그 음식이 걸림돌이 되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경우에는 형제를 걸려 넘어지지(죄 짓지) 않게 하려고 평생 고기를 안 먹겠다고 한 것입니다. 약한 신도들은 대개 배우지 못하거나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18장의 잃은 양의 비유도 작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18:10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작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업신여기기 쉬운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못 배우고 못 가지고 옷도 잘 못 입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그들의 천사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천사들이 늘 아버지의 얼굴을 뵙고 있으니, 우리가 작은 사람들을 업신여기면 즉시 천사가 아버지에게 보고한다는 뉘앙스 아닙니까? 잃은 양 한 마리는 바로 이 ‘작은 사람들’을 찾는 비유인 것입니다. 비유의 끝에서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막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여기선 지극히 작은 사람 대신에 어린이가 들어간 셈입니다. 그 당시에 어린아이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으니 가장 약한 사람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하나님과 일치시키는 것은 잠언이나 유대문헌에도 나옵니다.  

잠19:17“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나의 아이들아, 너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면, 나는 너희가 마치 내게 먹을 것을 준 것처럼 여길 것이다”(신 15:9에 관한 미드라쉬적 해석)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최후의 심판에서의 선언과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내용만 비교하면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먹을 것,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병 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는 것은 유대문헌에도 나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는 것만이 마태복음에만 독특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잠언이나 유대교 문헌은 교훈적이지만, 최후의 심판에서는 종말적이라는 것입니다. 교훈적이라는 것은 내가 이런 선행을 하면 복을 받을 것임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종말적인 경우에는 아무도 그것이 심판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가장 큰 특징도 그것입니다. 심판 때에 의인이나 의롭지 않은 사람이나 하나같이 그 심판 선언에 대해서 펄쩍 뜁니다.“주님, 우리가 언제.” 이 말이 그들이 쉬지 않고 하는 말 아닙니까? 그게 상 받을 일이라는 사실도, 그게 심판받을 일이라는 것을 전혀 예측도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작은 사람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께서 현존하신다는 파격적인 사고는 우리에게서 매우 감상적인 우화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추운 겨울날 거지에게 옷을 벗어주었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화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또는 자매가 있는데 평범해 보이는 이웃집 남자에게 언니는 쌀쌀맞게 대하고 동생은 친절하게 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재벌2세였다는 식의 연속극들이 있습니다. 평소에 누구에게나 잘 해주면 복을 받게 된다는 거죠. 마치 흥부가 한낱 미물인 제비에게 잘 해 주었더니 나중에 복을 받는다는 식의 우화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은연중에 오늘 우리들은 이 최후의 심판 이야기도 그런 우화적, 감상적인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는 것은 도덕적 교훈뿐이겠죠. 최후심판이 흥부놀부 이야기와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긴장도 없고 나의 실존을 뒤흔드는 도전도 없어집니다. 최후의 심판은 그런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우리가 언제?”하는 예측불허의 심판,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발휘되는 심판입니다. 어떤 법칙도 적용되지 않는 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 앞에서는 나의 도덕이나 상식도 나의 실존이나 신앙도 업적이 되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이 종말적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마7:21-23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여기서 온갖 종교적 고백이나 행위 또는 이적까지도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못됩니다. 구원은 보장될 수 있는 저금이 아닙니다. 종말적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구원의 관건이 되는데, 그것은 인자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죠. 그런데 의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들이 그런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도 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어떤 보상을 받거나 천국 가기 위해서,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이유에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알지 못했던 겁니다. 그냥 그들이 불쌍해서, 마음이 움직여서, 아무런 대가나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작은 사람들을 먹이고 마시게 하고 입히고 영접하고 감옥을 찾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말적 삶이요 주 앞에서 상을 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가장 왜곡된 상은 심판을 염라대왕 앞에서 지옥행이나 천국행 판결을 받는 장면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인지는 몰라도 예수의 최후의 심판이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인자의 최후의 심판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도덕적 업적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접근입니다. 자기가 의인인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하고 최고의 칭찬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떠도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업신여김 받고 소외되어 있던 사람, 그래서 자기는 운 없고 재수 없고 저주 받은 생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입니다. 인자가 자기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크나큰 은혜의 선물이겠죠. 분명 그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의인인 줄도 모르고 의롭게 사는 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심판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것을 다 갚고도 남는, 하나님의 정의요 구원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값없이 은혜로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큰 집단의 종교나 위대한 현인이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어떤 종교나 큰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지독히도 속만 썩이는 애물단지 같은 사람들이 자기를 구원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작은 사람들, 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하나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고, 나를 구원하게 해 주는 예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린 그동안 이걸 ‘놀부흥부 이야기’로 취급하면서, 구원의 본질과 최후심판의 현재성을 깔보며 믿었습니다. 내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는 되레 약한 사람들을 짓밟고 우뚝 서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 열매가 부끄러움과 수치의 불화로가 되어 우리의 머리위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복음의 본질이며, 믿음의 현재성인 ‘약한 사람’을 통해서만 나의 구원이 실현됨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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