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전 › 부활의 신앙

신실 | 2013.08.26 14:42:0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고전15:51-57
설교자
이영화 목사
참고
당진 함께하는 교회 http://tgchurch.hompee.com

부활의 신앙  

고린도전서 15 : 5 1- 57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아침입니다. 모두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 나누실 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인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참으로 복된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오늘에 이 감격과 기쁨이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개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으로, 청년의 때에는 앞으로의 꿈으로, 나이가 들어서는 세상의 명예나 돈의 힘으로 산다고 현실적으로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을 사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힘으로 사느냐? 고 묻는다면 우리는 부활의 소망 때문에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두 주간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지면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라는 주제로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는 길입니다. 억울해도 죽어야 되고 손해를 보고도 죽어야 되고 모함을 당해도 죽어야 되는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죽어야 됩니까? 그것은 부활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 주님의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명한 약속임을 믿으십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내가 고난을 받고 죽은 뒤에 삼일만에 살아날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10: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고 또 우리에게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 죽음 앞에 좌절하거나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를 재패하였던 알렉산더 대왕은 3번을 울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페르시아 원정에서 고레스 왕의 묘비를 보고 ‘인생이 아무리 위대하여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 개의 무덤밖에 남는 것이 없구나. 참으로 허무하다’ 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인도를 정복하러 인더스 강까지 왔는데 부하 장병들이 다시 돌아가자고 하여 ‘저 인더스 강만 건너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라고 하면서 돌아 가다가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부하와 함께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다가 넘어졌는데 그 넘어진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린 부하가 무안하여 “왜 우십니까?” 라고 물으니 그가 하는 말이 “내가 넘어져서 우는 것이 아니라 모래 사장에 넘어진 내 자국을 보고 운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내가 지금은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마는 나도 죽으면 이렇게 무덤하나 표시만을 남겨놓고 사라질 존재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니 인생이 무심하여 울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천하를 호령했던 알렉산더도 열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자신은 세상에서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만큼 죽음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민족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큰 건물에 가면 대개 4층이 없고 F층이라고 표시합니다.  특히 병원에 가면 4층은 없고 3층에서 5층으로 건너뛰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4라는 글자가 한문의 사와 음이 같아서 불길하다는 생각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단 한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2,000년 전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 55-57절에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여러분 인류 역사상 죽음을 이기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으십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절은 교회의 가장 큰 기쁨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말하기에 앞서 과연 죽음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는 말씀처럼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왜 죽음을 원수라고 하였습니까? 죽음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죽음은 단절시켜 버립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와 단절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과 형제와 부부와 친구와 이웃과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리고 모든 삶의 의미를 파괴시며 소망과 우리의 꿈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류의 원수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썩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53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썩는다’ 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본래 흙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썩는 것입니다.  천천히 썩으나 급하게 불에 태우나 결국 남는 것은 뼈만 남는 것입니다.  무덤에 썩어서 장사지내는 것이나 화장하여 장사를 지내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허물어져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까운 사람들이 아무리 좋아도 죽으면 관에 넣어서 빨리 무덤에 묻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 아니라 죽음은 ‘쏘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고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찔러서 파괴시킵니다.  그런데 쏘는 것의 본질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죄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음부요 지옥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햇빛을 보고 삽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햇빛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햇빛을 볼 수 없으며 캄캄한 곳으로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무덤은 어둠의 세계요. 그곳은 빛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우리를 애통하게 만들고 비참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분명한 사실은 인류역사 이래로 아무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능력을 입게 되어서 그 분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예를 든다면 물고기는 물에서 삽니다. 그러면 물고기의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공기로 호흡을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공기에 있습니다.  공기가 끊어지면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성도의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도 그 분 안에 있고, 죽어도 그 분 안에 있습니다.  부활도 그 분 안에서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은 바로 부활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 부활에 모두가 함께 참여하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부활하게 될 부활은 어떠한 부활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부활한 것과 같은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부활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까지만 하더라도 제자들은 두려움에 집안에서 문을 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놀라며 혹 ‘유령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유령은 살도 없고 뼈도 없다. 그러나 너희들은 본 바와 같이 만져 보아라. 뼈가 있고 살이 있다. 먹을 것도 가져오너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령한 몸의 부활은 무엇과 같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신비를 세상 곳곳의 이치를 통해서도 숨겨 놓으신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저는 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그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나비가 애벌레 때에는 기어 다니다가 커서는 나비가 되어 날아다닙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여러분 마치 우리의 육신의 부활도 그와 같아서 신령한 몸의 부활 즉 금세에서 내세로, 유한에서 영원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축복인 것입니다.  이 때에는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천국은 영원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곳에는 썩을 것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계21장을 보면 천국은 금, 은, 보석으로 지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12대문이 있는데 문마다 한 진주요. 길도 수정같이 맑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재질로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라에 들어갈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영원히 죽지 아니할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지키시고 있는데 우리도 그 날에 그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 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40일 동안 세상에 계실 때에 금방 엠마오의 마을에 나타나셨다가 금방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가, 금방 제자들에게 오실 수 있었고 제자들 앞에서 음식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과는 다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부활을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층천에 올라가서 보았을 때에 그 세계가 너무나 좋아서 세상의 말을 가지고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문제를 초월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의 특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로마에 ‘카타콤’ 이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 초대교회시대에 지하 무덤을 파 놓고 살았던 성도들의 유적입니다.  그곳에 있는 통로들은 미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통로 사이사이 마다 관을 넣어 놓았습니다.  이런 카타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당시 많은 성도들이 숨어서 예배를 드리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지하에 숨어 살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성도들은 이 부활의 신앙 하나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원하기는 이 믿음 잃지 않고 주 앞에 끝까지 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부활에 대해 어떤 이들은 지금도 ‘부활이 무슨 소리냐? 그것은 거짓말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짓말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속담에 풍문은 칠십일도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2000년 동안이나 이 사실이 전해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고 변화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파스칼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허위로 선전했다면 제자중의 한 사람만 사실을 고백했어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교를 해 가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변화되었습니다.  도마는 ‘내가 만져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 라고 말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도마야, 나를 만져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주님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도마는 인도까지 선교를 가서 그곳에서 순교자가 되었다고 교회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의 삶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겸손과 인내를 본받아 살아 가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 도망간 제자들을 만나서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배신하고 도망갈 수 있느냐? 그럴 수 있느냐? 섭섭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를 보시고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내가 잘못해도 부활하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격려를 해주시는 분이신 줄을 우리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것이 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인 줄을 믿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에 감사가 있고 기쁨의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가치관이 전환됩니다. 내 중심의 삶이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바뀌어 집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업하신 분들도 단순히 돈을 벌려고 사업을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업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자 하던 이들도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 초점이 맞추어 헌신하게 됩니다.  원하기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이와 같은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여러분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모시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어떠한 일을 만난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한 부활의 약속의 소망을 바라보는 그것 때문에 내가 날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될 때에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부활의 날 부활의 약속과 소망 가운데서 승리하여 진정한 감사를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 3. 31. 부활주일 예배말씀. 이영화 목사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