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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목사 | 2015.09.25 12:31:0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20:11-18
설교자
김경재 목사
참고
http://www.saegilchurch.or.kr/157819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과 신앙

(요한복음 20장 11-18절)

2013년 11월 17일 주일예배

김경재 목사(삭개오작은교회,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1.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 사랑

 

오늘의 본문은 성서신학자들이 ‘빈 무덤 및 부활현현 증언 설화’라고 부른다. 네 개 복음서마다 조금씩 증언내용이 다른 것은 원체험자들과 그들의 처음증언을 받아 간직하다가 후대에 전승시킨 신앙공동체의 삶의 자리가 각각 특징이 있고 달랐기 때문이다.

 

네 개 복음서 증언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위에서 처참하게 십자처형 당하시고 난 후,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는 용기 있는 경건한 자의 호의로 돌무덤에 시신을 안치한 후에, 안식일이 끝나가는 안식일 후 이른 새벽 미명에 이르기까지 약 삼일 간, 실재적으로는 48시간정도 지나가는 시간 안에 일어난 일들을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맨 처음 예수신앙공동체의 대표자 격이었던 베드로가 세상을 향한 첫 설교(사도행전 2:22-36)에서 증언한대로, 나사렛 예수는 3년간의 공생에 동안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힘 있게 펼쳤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당시 정치적 실권체인 로마제국 당국에서 보면 위험한 정치선동가요, 유대교 당국자들이 보면 “성전을 헐고 율법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자였다. 두 당국자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그리고 진리의 참사람 소리가 그들의 양심을 찔러대기 때문에, 그 두 세력은 합작하여 처참하고 무서운 ‘십자가형’이라는 방법으로 예수를 죽였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참혹했던 그 당시 상황을 직시한다면, 이 세상 권세자들의 위세 앞에 예수 선생을 따르던 제자무리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국자들이 역적자 예수와 같은 패거리라고 연좌제로 잡아갈까 염려하여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고”(요20:19) 숨죽이고 비탄과 절망 속에 있었다. 그것이 현실적 상황이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실패로 판정 났고, 예수님이 부활한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무 힘없고, 배운 것 없고, 그야말로 “빽 없고 돈 없고 연줄” 없는 민초들 무리였던 그들은 달리 어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리마대 마을 출신 경건한 유대인 요셉이 뜻이 평소에 서로 통했던 니고데모와 힘을 합쳐, 숨 끊어진 예수를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아 놓은 채 독수리나 들개가 시체 훼손하도록 방치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용기를 내서 로마 당국자에게 요청하여, 예수 주검을 인계받아 돌무덤 하나를 구하여 매장했던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비록 식민통치하에 있는 유대국이지만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기 때문에, 빌라도 당국자가 예수 시신을 가져가겠다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준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받고 죽은 예수시신은 그를 따르던 제자나 지지자들에 의해 무덤에 안장된 것이 아니라, 경건한 유대인 두 사람 에 의해서 였다. 베드로 이하 열두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 현장에도 없었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마태복음 27:57-61, 마가복음 15:42-47, 누가복음 23:50-56, 요한복음 19:38-42) 십자처형의 살벌한 형장 가까이에서 울며 마지막 최후를 지켜보던 사람들과 무덤에 안치할 때 무던 장소에 현존했던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선생을 늘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여인들 몇 사람 뿐 이었다. 특히 그 여인들 중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십자처형 형장과 무덤에 매장할 때 끝까지 항상 현장을 지켜보았다고 복음서는 증언한다.

 

오늘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특별한 예수님 사랑을 주목하려고 한다. 아리마대가 유대 지방 시골 마을 이름인 것처럼 막달라도 그랬다. 막달라 마을 출신의 마리아 였던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성장 배경과 집안내력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나음 받았다는 걸 보면 지독한 심신의 갈등과 고통에 시달렸던 여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녀가 예수를 만나 성한 몸과 맘을 되찾아 치유 받게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죄 많은 여인’ 곧 당시 유대풍습으로는 몸 파는 창녀로서 뭇 남정네들의 성희롱에 몸과 맘이 걸레처럼 찢겨진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십자가 사건을 예상하면서 예수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접근해 오시던 어느 날 저녁, 어느 바리새인 식사자리에 당돌하게 나타나 아끼던 향유를 예수의 머리와 발에 붓고 여인의 머리털로 예수 선생을 발을 감싸며 말없이 흐느껴 울던 그 여인과 동일인 일수도 있다. 성서학자들도 확인 할 길이 없다.

 

막달라 마리아의 과거와 그의 신분에 자세한 지식이 중요한 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그녀의 독특한 행동에 우리는 새삼스럽게 놀라고 주목해야 한다. 유대인 안식일이 끝나고 새 주일이 시작되려는 이른 새벽 미명에, 그녀는 두세 명 여인들과 함께 용감하게도 예수 시신이 놓여있는 무덤을 찾아갔다. 세마포에 거칠게 둘둘 말다시피 하여 급하게 장사지낸 장례현장을 지켜보았던 마리아로서는 선생님 시체를 감고 있는 세마포 위에라도 향유를 발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무덤은 비어있고 분명이 약 48시간 전에 자기 눈으로 보았던 예수의 주검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 한 것이다. 너무나 놀란 마리아는, 달려가서 베드로 이하 여러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유대당국자들의 위협이 두려워 숨죽이고 숨어있던 제자들도, 예수 시체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와서, 돌무덤 안에는 더렵혀진 세마포만 어지럽게 흩어져있고 선생 예수의 시신은 없어진 것을 확인 했다. 기가 막혔을 것이다. 분하고 억울하고 죄송했을 것이다. 분명히 어떤 패당이 도둑질 해갔거나 시신훼손을 했거나, 무덤자리 다시 되팔아 먹으려는 장삿속으로 ‘역적 도당괴수요, 하나님 저주받아 십자처형 받은 무명인 시신’을 다른 곳으로 적당히 처치해버렸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 사실을 밝혀낼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는 신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더 큰 비탄 속에서 그들이 묶던 집으로 모두 되돌아갔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행동 외에 달리 어찌하겠는가? 이미 끝난 일인데, 모두 포기한 일인데, 예수 선생 시체를 기어이 찾아 모셔야 한다는 당위성을 그들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단 한사람 여인이 홀로 뒤에 남아 빈 무덤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돌무덤 밖에서 울다가 또 와서 무덤 안쪽을 몸을 구푸려 드려다 보고 울고,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는 막달라 마리아 였다. 그녀는 예수가 부활하리라고 생각이나 상상을 한 적이 없었다. 부활체로서 영화롭게 변용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 혹은 공동무덤 관리인인줄 알고 “여보셔요. 주인장 님!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말해주세요. 내가 가져가겠어요”(요 20:15)라고 애원하다시피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시신처리를 동산지기가 관여했거나 적어도 그 없어진 이유를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음을 성경본문이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간 성경이야기를 떠나서 오늘날의 믿는자들의 마음을 점검해보자. 솔직하게 말해서, 충성된 믿음을 말하고 굳센 신앙을 말하고,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려고 교회에 다닌다고 자부하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세상인심 이다. 자기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이익이 되면 믿음생활 하고 교회도 다닌다. 막달라 마리아 처럼 아무조건 없이, 아무런 대가나 장래 희망도 없는데, 남이 알아주지도 않을 뿐더러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예수 주검 시신 거두기를 그렇게 끈질기게 우리가 자청 할 수 있었을까? 왜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하여 뭇 남자신도들과 동료 여신도들마저 포기하고 집으로 되돌아갔는데, 예수 주검이 48시간 안에 없어지고 말았다는 이 기막힌 사건을 막달라 마리아는 ‘영구미제사건’으로 포기하고 되돌아갈 수 없었을까?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면 그녀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이라고 말 할 밖에 없다. 자신의 몸과 맘이 걸레처럼 찢기고 더러워지고 병들었을 때, 자기를 찾아오셔서 이해해주고 치유해지고 사람답게 똑바르게 살도록 세워주신 선생님을 주검 시체일지라도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다. 창녀였던 여인이 성자를 맘 속으로 애모하고 사랑했을 수 도 있다. 성욕으로 더러워진 요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숭고한 사랑으로서 말이다. 그런 상상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라고 열 올리며 말하는 신학자와 성직자가 도리어 문제가 아닐까?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위기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 진솔한 ‘인간 예수 사랑’이 없거나 시어져 버리고, 그 자리에 교리와 신학과 속죄론과 부활신앙으로 겹겹이 싸인 소위 학문적으로 말하는 ‘케리그마 그리스도’만이 너무나 강렬하게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지배하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따뜻하고 뜨거운 심장을 지닌 신앙이 식어져버렸기 때문이 아닐가? 학문적으로 ‘역사적 예수 탐구’운동이 20세기에 일어났지만, 어디까지나 신학적 학문탐구와 논쟁에 머물렀고,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 사랑’ 심장박동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2. 사랑고백을 넘어서 신앙에로 나아가야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인격과 삶에 대한 동경과 추종과 애모에 그친다면 그리스도교는 기껏해야 300년 정도 지나다가 시들어지고 살아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흔히 정통신학자들이 말하듯이 그런 신앙은 인본주의 신앙이요, 휴머니즘적 감상주의 신앙이요, ‘육을 따라 예수 믿는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철저하고도 진솔한 사랑과 존경심 없이 ‘케리그마 그리스도’로서만 너무 쉽게 도약해 버린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리주의 신앙, 관념주의 신앙, 소위 가현론적 기독론이라고 교리사가 경고한 더 위험한 신앙형태로 변질될 위험이 매우 크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요한복음 20:11-18)을 깊이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부활하시고 병용하신 예수의 영체를 만지려고 하자 주님께서는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한복음 20:17)고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부활 현현의 사실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공4원의 세계 안에서 사랑하고 절망하는 ‘세계-내-종교’를 넘어서서, 더 높고 신령한 진리와 생명의 차원을 갖고 있음을 고백하는 요한 공동체의 증언이다.

 

교회는 바로 예수 사랑의 뜨거운 경험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그 경험을 가지고 모여들되, 인간적 심리나 윤리적 차원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한 구국 결사대’가 아니라, 성령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영의 임재를 신비하게 경험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몸 공동체’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표현으로 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유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충만”이다. (에베소서 1:23)

 

이 구절에서 말하는 ‘충만(Pleroma)’이란 어휘는 물이나 공기가 어떤 용기 그릇에 채워진 수량정도를 말하는 형용사적 어휘가 아니다. ‘성령 충만, 은혜 충만, 말씀 충만’을 교회부흥회에서 부흥사가 강조할 때, 그 단어 ‘충만’은 다분히 양적 개념으로 오해되고 있다. ‘충만’은 성자들 초상화에서 보듯이 그들의 얼굴과 몸주위에 감싸고 나타나는 '아우라'(aura)처럼, 하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신령한 영적 에너지요 은혜의 햇살이며 존재를 창조적 새로움으로 고양시키는 존재의 역동적 힘인 것이다. 이 ‘충만’이 밀도 깊게 머물며 체험되는 성소가 교회인 것이다. 교회가 ‘제자직을 훈련받는 하나님의 학교’임을 넘어서 ‘영혼의 어머니 품과 같은 성례전적 신비실재’라고 역대 교부들은 항상 강조해왔다.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예수 사랑과 예수 신앙은 둘이 아니고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서는 예수 사랑을 거쳐서 예수 신앙에로 비약하는 것이었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그리스도’, 다른 말로하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피폭력자 무능한 예수’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는 둘이 아니고 우리가 고백하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이름은 호칭이 아니고 “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도 온전히 사랑했던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온전히 드러내고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되셨던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가장 짧은 신앙고백문’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에 못지않게 우리들도 한 번 더,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더, 인간으로서의 참사람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리에 들어가도록 하자. 그래야만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고백문’이 빈말처럼 되지 않게 되기 때문이며, 교회를 ‘내 영혼의 어머니 품’(칼빈) 처럼 더 사랑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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