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궁극이 | 2015.08.30 17:06: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막4:10-20
설교자
김경형 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4장 10절-20절: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찐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10절-12절: 본문말씀을 어떻게 들으면 하나님께서 안 되게 만들어 버린다는 그런 말씀으로도 들린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외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의 실상을 말씀해 주신다.


그러면 외인들이 누구냐? 외국사람들? 주님은 천국으로부터 오셨고 천국의 분이고, 그러니까 천국의 사람이 아닌 자들은 외인들이다. 따라서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자들이 주님이 보실 때는 외인들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방인들처럼 세상의 것을 소원 목적하는 자들이 또한 외인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것은 다 외인들로 들어간다. 주님의 말씀에 의사단일성이 아닌 것은 외인들로 다 치부해 버린다.


이 외인들은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영적 실상을 못 듣고 비유로만 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듯이 세상에 속한 것, 눈에 보이는 것, 임시성적인 것 전부는 비유요 비유적인 존재요 비유적인 사건인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시의 사건이고 계시의 말씀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가 비유인데, 성경 전부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인간의 말을 빌려서 가르쳐 주는 비유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 전쟁, 이사 가고, 노래 부르고 하는 게 전부는 비유다. 전쟁, 사건 그런 걸 들고 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고, 존재를 들고 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의식을 하고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뜻을 못 깨닫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아는 자는 영적인 것은 보이지 않으니 영적인 것을 무시하고 부인하고 부정하고 알아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돌이켜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하는 말씀이 되는 거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세상의 것을 소원 목적하던 것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는 것으로 목적이 바뀔 때 죄 사함이 되는 건데, 말씀을 듣고도 이것이 안 되니 결국 말씀을 비유로만 아는 것으로는 죄 사함이 안 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줄을 알면 이거는 죄 사함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영적 면으로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영적 면으로 들어가야 바꿔지면서 죄 사함이 들어가는 건데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줄만 알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 쪽으로는 못 들어간다. 그러니까 죄 사함이 안 된다. 예수를 믿어도 눈에 보이는 세상 것만 목적을 하고 나가면 역시 성화구원 면에서의 죄 사함이 안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속에 진짜가 들어있는데 주님께서는 그 진짜를 깨닫게 해 주려고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온다. 안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할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을 비유로 말씀을 해 주실 때 그 말씀을 비유로만 알고 있으면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인간이 안 만들어진다.


성경에서 자기 구원의 실상을 모르면 인간 삶의 존재목적의 의미가 없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나를 분명한 목적 하에 만들어 놓은 건데 내가 하나님의 그 목적을 모르고 살면 목적이 없는 사람인 무목적적으로 살게 된다. 이게 참 기가 막히는 거다.


13절-15절: 씨를 뿌리는 자란 천국복음의 말씀을 뿌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살면서 그 말씀을 잘 붙잡고 잘 이용 활용을 하면 영원한 소득을 많이 얻을 수 있다. 이 참 소득을 알게 해 주려고 눈에 보이는 농사짓는 거, 사시사철, 동식물의 생태계 등을 비유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거다.


네 가지 밭은 현재 자기의 정신과 마음상태를 말한다. 여기 있는 분들도 자기 마음 밭이 이 네 가지 밭 중에 하나는 다 들어간다. 안 그러면 세 가지 밭이 다 들어있다든지.


첫째로 말씀이 길 가에 뿌려진 사람은 어떤 신앙상태의 사람이냐? 뿌리운 말씀을 사단에게 빼앗긴 자인데, 왜 받은 말씀을 사단에게 빼앗겼느냐? 사단이 억지로 빼앗아 갔느냐, 자기가 마음을 안 쓰고 있으니까 사단이 빼앗아 갔느냐?


자기 인생행로에서 말씀을 주격으로 붙잡고 나갔다면 안 빼앗을 것인데 씨가 길 가에 뿌려진 것처럼 말씀을 등한시 하고 하찮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니 사단이 ‘너 같은 사람에게는 백 배의 결실이 필요가 없다. 백 배의 소득이 있는 구원이 너에게는 필요가 없다’ 하고 빼앗아 갔다.


이걸 가만히 생각해 봐라. 나만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안 뺏어간다. 그런데 인간 자기가 말씀을 하찮게 여기니 속된 말로 ‘너 같은 놈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가 없다’ 하는 것이다. 자기가 생명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니까 사단이 인간 자기를 무시한다는 말이다. 말씀무시는 자기무시요, 말씀을 귀히 높이면 자기의 존귀 영광이 된다. 그런데 말씀의 가치를 몰라서 말씀을 무시하니 결국 자기가 무시된 자가 참 많다.


일반적으로 볼 때도 사람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돈 많은 사람이냐, 인격이 고상한 사람이냐?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이냐? 그걸 좀 볼 줄 알아라.


처녀총각들, 앞으로 시집장가 갈 텐데 사람 보는 눈을 똑바로 가져라. 하나님이 보시는 눈, 주님이 사람을 보시는 눈으로 보는 게 틀림이 없다. 그런데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구나. 그 다음에 조금 더 들어가면 네가 네 성격 성질을 못 고쳤구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자기 성격 성질을 고쳐나가면 웬만하면 험난한 세상을 다 이기고 갈 것인데 그런 사람은 볼 줄 모르고 상대가 돈으로 자기를 위하면 그게 그만 사랑인줄 안다. 그러니 돈 떨어지면 딴 데 돈 있는데 가서 또 붙게 된다. 사람이면서 그게 뭐냐? 이건 사람은 인격자인데 인격을 모르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좋게 말해서 인간의 지정의를 인격이라고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구체적인 면을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적인 인격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임시적인 것에 대한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만을 한다. 그러니 그건 모두가 세상 것이라서 항상 돌고 돌고 바뀐다. 그러니 그것에 따라서 자기 마음도 항상 바뀐다. 그래서 주님의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나쁘게 말해서 세상에는 개 같은 사람이 참 많다.


성경에 보면 귀먹고 벙어리 되고 어눌한 자를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무리들이 보는 데서 고치는 게 아니라 무리를 피해서 고쳐주신다. 무리들이 있는 데서 고치면 예수님의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무리들 앞에서 고치게 되면 딴 소리를 하게 된다. 지금 이게 영적인 면으로 보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딴 데로 데리고 가서 양쪽 귀를 막고, 그 다음에 손에 침을 뱉어서 혀에 대니 귀가 뻥 뚤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이 분명해진다. 이렇게 되니 하나님 뜻을 알아듣고, 그 다음에 표현하는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분명히 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적으로도 보면 무리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말하는 교회가 많다. 이러면 귀도 안 열리고 눈도 안 열린다. 이게 귀먹고 벙어리 된 자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아듣고 다른 사람에게도 말의 이치가 분명해야 한다.


인간을 볼 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두고 인간을 보면 거의가 정확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 성격 성질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취하고 버리고 하니 큰 고통이다. 부부도 인격적 결합이 돼야 하는데 고깃덩어리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런 부부 사이에서 자녀를 낳으면 자녀의 자람이 인격적으로 돼야 하는데 그렇게 돼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성경을 깨달았으면 성경대로 바로 하려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하는 게 옳은 건데 마음에 사상적 담이 없는 사람은 담이 없는 집에는 오만 잡동사니 벌레가 드나드는 것처럼 그 사람 속에는 세상의 여러 사상과 정신들이 들락날락하게 된다. 그거 못 쓴다.


자기가 몰라서 말씀을 무시하던 알면서도 무시하던 어쨌든 생명이치의 말씀을 무시하면 너는 저질이 되고 밟힌다. 속성적으로 가치가 없다. 모양 피부 골각은 사람인데 안에 든 질이 사람의 가치가 없다. 모양 피부 색깔 골각은 사람인데 안에 들어있는 질이 가치가 없다. 사람이 가치가 없다.


16절, 17절: 돌밭에 뿌려진 씨는 어떤 마음상태를 말하는 것이냐? 아까 첫째 밭인 길 가에 뿌려진 씨는 어떤 마음상태냐? 말씀을 등한시 하니까 길 가에 씨가 굴러다니면 새가 보고 와서 주워 먹는 것처럼 마귀가 그 말씀을 집어먹는다.


이걸 인격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심고 기르고 농사를 잘 지어야 하는데 네가 그 말씀을 등한시 하니 너에게는 말씀이 필요가 없다. 백 배의 소득, 수많은 소득이 너에게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씀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안 받으면 그 사람은 골백 살을 먹어도 그 자의 아는 수준은 자기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말씀이 그냥 흘러가 버리면 아무 유익이 없다. 역사가 자기에게 왔을 때 그걸 이용 활용해야 자기에게 유익이 있는 것인데 그게 없다.


자기가 세상을 붙들면 세상이 붙들리느냐? 아니다. 세상은 자기에게 붙들리지 않는다. 세상 것은 다 지나가는 거다. 다만 자기가 있는 동안에 이용 활용 사용하는 것이다. 자타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고 갈 것뿐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것을 이용 활용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지혜로운 사람이요, 그렇게 하면 먹고 마시는 건 다 있는 거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안 믿는 사람처럼 사니 이게 얼마나 힘이 드느냐?


돌밭에 뿌려진 씨는 어떤 마음상태냐?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으나 그 말씀 때문에 환난 핍박이 오니 그만 시들시들 하다가 넘어진다. 이유는 그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서이다. 왜? 흙이 얕았다. 흙이 얕은 이유는 그 밑에 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치적으로 말하면 그 돌을 캐내야 할 것이다. 그 돌은 그 전부터 그 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기 전부터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것, 즉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부터 가지고 있었던 세상 중심적 소원 목적, 사망적인 성격 성질, 저주받고 타락된 것으로 되어있는 자기의 이해타산, 옛사람적인 자기의 주장의 주관성을 진리이치의 생명과를 먹으면서 돌을 골라내듯이 골라내야 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만 말고 말씀의 씨가 자기 마음 밭에 떨어질 때 자기 마음 밭에서 말씀과 배치되는 것을 캐내버려야 한다.


그러면 믿음도 없는 사람이,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 육덩이로 가르치는 목사의 말을 어떻게 골라 먹느냐? 기준도 없는데 어떻게 골라 먹느냐? 그런데 교인들 중에 건방진 교인이 참 많다. 아무 교회나 가서 내 마음에 맞는 것만 골라서 먹지? 아따, 이 사람이 하나님이로구나!


성도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것을 정확하게 계속 받아야 하는데 거짓된 목사는 맨 세상 판이다. 그런데 그 목사의 설교 중에 골라먹을 게 뭐가 있겠느냐? 그런 걸 골라 먹는다면 예수 안 믿는 이방 신을 섬기는 그런 데 가서도 얼마든지 골라먹을 게 있다. 그러니 그게 복음이냐? 세상을 기초하고 세상 일반 사회 윤리도덕적 개념으로 말하는 데서 골라 먹을 게 뭐가 있느냐? 사람이 정직하게 사는 것이 옳은 것임을 몰라서 ‘정직하라’ 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느냐? 선하게 살 줄을 몰라서 ‘선하게 살아라’ 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느냐? 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보면 자기의 본바탕은 모르고 말씀만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시험이 오면 자기가 세상 육적으로 바탕이 된 고로 그만 세상으로 기울어진다. 또 지혜롭지 못한 자기의 성격 성질 때문에 환난 핍박을 받는 자도 있다. 이런 사람은 환난 핍박이 올 때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 자기 마음 밭이 옥토가 되도록 말씀을 붙잡고 자기 마음의 돌을 골라내고 잘 갈아 엎어야 한다.


돌이 없는 밭의 열매는 충실하게 잘 여물지만 돌밭의 열매는 커지기는 해아 하겠는데 돌에 쥐어 박혀서 그 돌을 감싸고 열매가 자라니 모양새가 기형이 된다. 돌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다. 그런 것처럼 자기에게 옳은 것이 떨어져도 성격을 못 고치면 이상하게 성격이 틀어진다.


우리 교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성격 성질, 자기의 인격의 도덕성을 생각해 볼 때 즉,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볼 때 다 좋으냐, 내가 나를 생각해도 미운 게 있느냐? 그런 게 있다면 ‘내 힘으로 안 됩니다. 당신의 의롭고 선한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고쳐주옵소서. 내가 나를 생각해도 참 더럽습니다. 그러니 남이 나를 볼 때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향기가 나가고 덕이 나와야 할 텐데 이 더러운 성격 성질 때문에 덕이 안 되고, 전도도 안 되고, 친구도 없고, 사귀자고 해도 도망가니 이 못된 나를 고쳐주십시오’ 해야 한다. 이거 고쳐야 한다.


표면적 인물이야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 놨지만 말씀을 따라 자기의 심성을 영모의 미모성으로 잘 가꿀 수가 있다. 표현을 하자면 남자들은 실력적으로 의로운 성품으로 잘 만들어야 한다. 여자들은 영모의 미모성의 심성을 잘 만들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사람이 좀생이가 된다. 그래야 생명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는 이게 돼 나갈 수가 있다.


18절, 19절: 말씀이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과 같은 마음 밭의 상태는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서 말씀이 결실치 못하는 신앙이라. 그러니까 일상생활의 염려, ‘어떻게 살아가나? 주일날 돈 못 벌면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거. 또 교회 목사님들의 경우는 사람 욕심, 물질 욕심, 덩어리 키우는 욕심, 자기의 존귀 명예 부귀 영광성의 욕심이 생기는 것. 이것은 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다. 이런 사람은 말씀의 사람으로 결실이 안 된다.


생활염려로 목회를 하는 자도 있는데 그 안에는 종교 사역적인 목적도 포함돼 있다. 또 외식운동자들도 있고, 물질을 의식하는 자들고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질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그리스게는 갈라디아로 나갔다.


세상으로 나갔다는 말은 예수를 안 믿는다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과 세상 것을 위치적으로 순서적으로 바꾼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을 더 사랑한 것은 세상으로 나간 것이다.


누구는 세상을 사랑하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정확하게 두고 나가는 신앙이 아닌 세상을 목적하고 나가는 신앙은 세상으로 나간 거다. 교회가 온통 세상 판이면 그 교회는 명칭이 교회지만 주님 앞에서 나간 거다. 그걸 잘 봐라.


20절: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은 이 믿음은 물질적 세상적인 이해타산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인데, 말씀을 주는 자도 말씀을 받는 자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목적에 둔 것이다.


그리고 30배 60배 100배의 차이가 난 것은 자기의 힘씀에 따라 차이가 난 것이다. 30배도 알곡이고, 60배도 알곡이고, 100배도 알곡인데 어느 쪽이 더 좋으냐?


여기서 결실이 안 된 자는 어디로 가느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결실이 되면 천국에 가고, 결실이 안 된 자는 지옥에 가는 거냐? 그러면 불택자는 결국은 결실이 안 되는 거니까 그래서 지옥에 가게 되는 거냐? 이건 말 자체가 어폐가 있다. 이치에 안 맞는 말이다.


또 예수 믿는 자가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안 된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러니 말이 안 된다. 말의 이치가 아니다. 이건 이룰구원 면에서 생각하는 거지 ‘믿는다. 안 믿는다’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그 자체가 교훈이니 이 말씀을 우리에게 가치판단 평가적으로 들리게 해서 최고의 좋은 것으로 선택하여 힘써 구원을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네 가지 밭을 다시 보면 첫째는 말씀 무관심이요, 이건 인생 헛사는 것이다. 지옥 갔다는 말이 아니다. 두 번째는 말씀을 듣고 자기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 세 번째는 예수 믿는 것을 물질 이해타산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질 이해타산에 두면 많은 시험에 빠진다. 네 번째 밭은 자기 인생을 말씀으로 온전히 키워라. 그러면 소득이 엄청나다.


첫째 밭은 어떤 사람? 말씀 무시, 무관심. 둘째 밭은 자기 마음 밭을 갈아엎어야 하는데 안 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예수 믿는 것을 세상 물질 이해타산에 두면 안 된다. 그러면 많은 시험에 빠진다.


좋은 마음 밭은? 마음바탕이 좋은 성도는? 마음바탕이 고약한 성도는? 자기 밭은 어느 밭이냐? 자기 마음 밭을 알겠느냐? 알면 좋은 밭으로 만들 수 있다. 좋은 밭을 만들려면 자기 노력에 달려있다. 자기가 노력치 않으면 좋은 밭이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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