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궁극이 | 2015.07.01 12:23:39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막2:16-17
설교자
김경형 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2장 16절-17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가정에서 부모의 말을 어기면 가정에서의 죄인, 국법을 어기면 국가의 죄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국법을 어기면 국가에서 형벌을 내리고, 좋은 일을 하면 상을 주기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법을 어기면 그게 자기는 복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물을 가지고 그 자기에게 재앙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능력의 분이시다. 국가든 개인이던 가정이던 하나님 말씀의 법을 어기면 모든 사건 환경을 전부 들어서 그 사람에게 재앙이 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가정이던 국가이던 하나님의 법에서 어그러지게 만드는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대적하는 거다.


또 일반적으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대표 아담과 하와가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먹는 것이니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는 거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는 깊은 뜻도 잘 모르고 산다. 그래서 세상에서 잠깐 동안 먹고 마시다 가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부모의 태를 빌려 부정모혈로 만들었는데, 그 만든 목적이 ‘하나님 말씀의 기준대로 살아라’ 하는 본뜻이 있는 건데 안 믿는 사람들은 이걸 모른다.


그러면 인간이 그걸 모른다고 해서 그 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물질세계에 살지 않는 거냐? 아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혜택 정도이니 그런 정도로 말할 것 같으면 짐승도 그런 정도는 다 혜택을 받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 너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너는 하나님의 입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간이다. 그리고 죽어서 하늘로 올라갈 존재이다. 그러니 너는 세상에 있으면서 예수 믿으면서 말씀의 인격과 성품으로 지혜지식으로 너를 만들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도 연관을 시켜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그 목적대로 살게 하는 그 영능의 실력을 네가 잘 만들어 오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바로 가르쳐 줘야 한다. 그래야 사건도 바로 처리할 수 있고, 크고 작은 여러 가지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죄를 안 짓고 바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으면 그 자의 마음은 ‘고생 않고 천국처럼 만들어진 곳이 어디냐’ 하고 자꾸 세상에서 찾게 된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바로 가르쳐 주고, 누가 나를 만드신 인간의 목적대로 가르쳐 주느냐’ 하고 찾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많이 있지만 그런 곳을 바로 찾아야 한다.


‘우리 궁극교회에서 바로 가르쳐 준다’ 그 말 이전에 할 수만 있으면 대한민국의 교회를 다 다녀보고, 또 경제가 허락하면 세계적으로 다 다녀보고, 그래도 바로 가르쳐 주는 곳이 없다면 이곳으로 와라.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설교 딱 들어보고 ‘사람을 바로 세우는 교훈이냐?’ 알 수 있는 것이고, 또 교회에 다녔으면 ‘이 교회가 성경의 이치를 나에게 깨닫게 해 주느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치는 영원한 것이라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교회 다니면서 자기가 성경을 안 읽었다면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도 안 읽고 ‘믿음이니 뭐니’ 한다거나 ‘교회가 어떻네 저떻네’ 해도 네 머리통은 썩는 거다. 네가 저주를 받는 거다. 실력이 없고 모르면 부지런히 묻고 배우고 터득해서 자기의 실력화가 돼야지 실력화 되지도 않고 아무 것도 모르고 맹탕인데 잘 믿는 사람을 욕하고 손가락질 하면 너는 저주의 인생이다. 저주의 인생으로 살지 말라.


사람이면 똑바로 양심을 가지고 똑바로 생각을 해서 살아있는 동안에 자타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이라면 국가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돼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면 그같이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남에게 유익도 못 주고 자기도 바로 못 다스리고 인간 말종이 되면 그게 뭐가 되느냐? 대학교를 다니면 뭐하고, 학박사가 되면 사람이 못됐는데 뭐하겠느냐? 사람이 돼먹지 못했는데 세상만사가 자기를 붙들어 줄 것 같으냐? 예수 믿는 정신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학교를 가나 사회를 가나 어디를 가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지도를 받고 배우고 터득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하는 그게 사람이다. 그게 배우는 태도고. 그런데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깨달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어느 사회단체에 간들, 어느 교회에 간들 누가 자기를 높여주겠느냐?


17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누가? 예수님이. 그러니까 죄인은 주님 앞에 와야 한다. ‘내가 의인이다. 하나님 앞에도 의인이고, 세상에서도 의인이다. 나처럼 잘난 사람 없다’ 라고 한다면 뭐 하러 예수 믿고 배우느냐?


세상살이가 모든 면에서 그렇다. 알아야 뭘 하든지 한다. 아닌 말로 처음 서울에 올라오면 길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서울역을 어디로 갑니까’ 하고 길을 물으니 어떤 사람은 동대문 쪽으로 가르쳐 주고, 어떤 사람은 의정부 쪽으로 가르쳐 주더라. 그렇게 되면 길을 헤매게 된다. 길을 모르면 남에게 속는다. 알아야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 줄 수가 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르면 물어라.


그런데 나는 모르지만 남이 보기에는 내가 아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그래서 그런 내가 남에게 물으면 촌놈처럼 보일까봐 묻지도 않고 한참 가다 보면 다른 길로 간다. 그러면 자기만 고생이다. 모르면 묻고 배워야 한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마귀의 자식들이라’ 하고 책망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속을 고쳐야 하겠는데 속을 고치지 않고 자기들이 성경구절을 늘 달달 외우니까 굉장히 옳은 사람처럼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저주를 했다.


자식이 공부 잘한다고 부모에게 효도하느냐? 공부 잘해도 부모 말 안 듣는 자식이 부지기수이다. 불효자가 많다. 부모는 고생 고생 해서 키워놨더니 머리가 크면 제 멋대로 돌아간다. 그러면 부모가 고생한 그 길을 그 자식이 또 밟게 된다. 사람이 안 된다. 조금 힘든 일은 견디지도 못한다. 그래서 심한 훈련을 좀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교인들을 향해 여러 말로 책망을 했고, 그러나 그들은 고치지 않았고, 그리고 옳은 소리를 하는 예수님까지 죽였으니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죽인 그들을 의인으로 보고 있느냐, 죄인으로 보고 있느냐? 죄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했다.


그 때 가룟유다는 성경을 안다고 하는 율법사 바리새교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겼으니 이 가룟유다가 지옥에 갔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면 그런 사실을 다 알고서 판단을 하는 지금의 나는 우리는 자기를 보는 눈이 희미하거나 자기 속사람을 보는 눈이 감겨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 쉽게 말하면 남이 작은 죄를 지은 건 크게 보이고, 자기가 지은 죄는 작게 보이거나 아주 없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 약간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죄인처럼 보지만, 그러나 주일을 까먹는 자기를 의인처럼 생각을 하더라. 그런 사람이 많다.


예수 믿는 자기가 충성봉사를 하는 그 자체를 믿음으로 안다거나,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도록 가르친다거나, 신유의 은사적 활동을 많이 하면 천국에 가서 큰 상을 탄다거나 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이는 예수님과는 정 반대다.


아무리 안수하고 돌아다녀도 사람 못된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걸 잘 못 본다. 세상에 속한 목사들은 그런 교인들을 성경을 가지고 아예 세상 쪽으로 몰아가 버린다.


세상은 불붙는 곳이고 세상은 썩는 곳이고 세상은 변질되는 곳이다. 예수 믿는 정신이 이런 세상 쪽으로 자꾸 가면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올라가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그것을 너희들은 구하지 말라’ 했는데 이런 자들은 그 정신이 자꾸 세상을 구하고 세상 쪽으로 간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밥을 해서 먹고 있으면 그 정신이 세상을 먹는 거냐, 천국을 먹는 거냐? 예수 잘 믿으려고 밥을 먹는 거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에게 물으면 돈 잘 벌고 부자로 살려고 먹는다고 한다. 어느 것이 믿음의 소리냐? 전자다. 사람의 마음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전체의 목적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 하나님의 속마음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속마음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그 면을 알지 못하면 안 된다.


가령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려고 한다고 하면 부모의 입맛 귀맛 부모가 뭘 좋아하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모르면 효자노릇을 못한다. 옛날 부모들은 술 담배 잘 먹고 피웠는데 효도하려면 술 담배를 잘 사다 드려야 한다. 그래야 효자라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잘 섬기려면 예수님의 입맛 코맛 눈맛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기가 피곤한 게 아니라 자기가 그만큼 올라간다. 존귀 영광스럽게 올라간다.


마귀의 종합적인 세 가지 시험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다 걸려 넘어졌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걸려 넘어진 줄을 모르고 있다. 걸려 넘어지면 죄인인데 자신들이 죄인인 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걸려 넘어진 건지 아닌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다 걸려 넘어져 있다. 죄 아래 놓여져 있다. 본인들은 자신들이 죄 아래 있는 줄을 모르나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죄 지으면 죽는 거다.


‘너희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영생으로 영원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자기가 날마다 참 사람으로, 주님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 닮는 사람으로 잘 성장이 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거다.


우리는 그 면을 잘 못하면 죄 의식이 든다. 그런데 안 믿는 자들은 그렇게 안하고 있으면서도 죄의식을 못 느낀다. 우리가 성경을 중심해서 사람을 볼 때에 사람은 참 사람으로 자꾸 만들어져 나가야 한다.


처음에 출생해서 어린아이는 어디를 가던 과자를 달라고 한다. 젊은 학생들은 맨날 놀러가자고 하고, 젊은 청년들은 짝지어 놀려고 한다. 노는 가치관이 자꾸 달라진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늙어서도 어찌하든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고 병들면 못 노나니’ 한다. 그러니까 어릴 때 놀기 좋아하던 그 정신이 늙어서도 하나도 안 변한 것이다.


늙어지면 맨 놀고 먹고 마시는 그걸 항상 그리워한다. 그러니 일생을 돈 벌어서 먹고 마시고 놀고 한 그것밖에 더 있느냐?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사람 사는 가치를 알게 해준다. 성경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의 생각을 통째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게 있다.


예수 믿으면서 도덕성적인 가치관이, 취미성적인 가치관이, 지혜지식적인 가치관이 성경처럼 돼야 할 텐데 예수님처럼 닮아가야 할 텐데 예수 믿으면서 어째 그 모양이냐? 그러니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이거 못 쓰겠다. 쓰레기 같구나’ 해서 이따금씩 정신을 차리라고 사건을 들고 와서 두들겨 패는 거다.


사람이 일반적으로도 도덕적으로 저질이면 인간세계에서 대우를 못 받는다. 성격이 급하거나 성질이 못 돼 먹으면 인간세상에서 대우를 못 받는다.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대우를 못 받는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대우를 못 받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도덕성적으로 차원이 올라가야 한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적 도덕성적으로 하나님의 신적 도덕성적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그래야 사람이 가치가 있다.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이 사람 됨됨이가 가치가 있다. 이게 훌륭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높이 올린다. 성경에 그런 사람이 많다.


일반사회의 직장에서도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일반적으로 봤을 때 사람 됨됨이가 좋으면 그 사람 진실하다고 자꾸 올려준다. 그러나 사람이 못 돼 놓으면 부하들에게 싫은 소리 듣기 마련이고 왕따 당한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의식을 알지 못한다는 면에서 죄인처럼 생각하라.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면에서 죄인처럼 생각을 하고 부지런히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믿음이다.


신체 육적인 미모성이 있듯이 심적인 면에서 마음의 아름다움이 있다. 눈에 보이는 얼굴의 미모성이 있듯이 심적인 면에서도 미모성이 있다. ‘마음이 참 곱다. 얼굴은 못 생겼는데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고울까?’


어느 게 좋으냐? 얼굴은 예쁜데 마음이 더럽고 고약한 사람이 있고, 얼굴은 예쁘지는 않은데 마음이 참 고운 사람이 있다. 총각들, 고르란다면 어느 여자를 고르겠느냐? 얼굴은 예쁘고 마음이 고약한 것은 고치기가 참 힘들다. 그러나 예수 바로 믿으면 고쳐진다. 마음 수술이 들어간다.


요즘은 얼굴이 조금 미워도 성형수술을 곧 잘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뜯어고칠 줄은 모른다. 마음을 가꿀 줄은 모른다.


일반적으로 보면 신체의 육적인 미모성이 있고, 좀 더 들어가면 일반적으로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심적인 미모성을 찾는다. 마음의 아름다움. 교양과 덕이 있는 그 아름다움을 찾는다. 예수님은 영적인 미모성을 찾으신다. 영모의 미모성. 이게 주님이 찾는 미모성이다. 일반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다.


성경 66권은 이 영적인 미모성 면에서의 병을 말하고 있고 이 면에서의 죄를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러니 고쳐주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죄인이다. 의인이다’ 하고 흉을 잡고 늘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실속 없이 팽창하고 있는 것이 이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회의 외식운동임을 알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한 것이다. 껍데기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속사람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껍데기 운동을 한다.


오늘날 안 믿는 사회가 또 그렇다. 교회는 교회대로 그렇고, 안 믿는 세상은 안 믿는 사회대로 그렇고. 그러니 이 마지막 인간세상이 어떻게 될까? 불바다가 되는 거다. 그런 와중에, 그런 역사적 진행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


‘말세에 믿음 보겠느냐’ 하는 게 누구보고 하는 소리냐? 자신보고 하는 소리다. 그걸 알아라. ‘이 말씀을 무시하면 자기의 결과가 어떻게 되나’ 하고 스스로가 자기를 지켜봐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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