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 다시 복음으로(2)- "복음 앞에서 떨다"

김영봉 목사 | 2015.07.12 23:54:1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시29:1-11
설교자
김영봉 목사
참고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4 년 3 월 16 일 주일 예배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다시 복음으로'(2)"복음 앞에서 떨다"
(Tremble Before the Gospel)
시편(Psalm) 29:1-11


1.
종교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신에 대한 생각과 믿음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많은 이들이 묻는 질문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 사회의 공통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의 아버지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아버지상'(a father image)에 대한
욕구로 인해 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고,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같은 사람은 '이상적 인간'(a
idealized person)을 보고 싶어하는 욕구로 인해 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합니다. '의존에 대한 욕구'(desire for
dependence)로 인해 신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하는 슐라이에르마하(Friedrich Schleiermacher) 같은 학자도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몇 개의 예입니다. 그 외에도 그동안 수 많은 이론들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동의를 얻어낸 이론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종교학(Religious Studies)의 최근 추세는 종교의 기원 문제를 덮어 놓고 종교 현상을 다루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 백년
동안의 연구로 밝혀지지 않았다면 더 이상 노력해 보아야 헛수고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종교학자들이 집요하게 외면하고 부정하는 단순하고 명쾌한 답이 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어떤 욕구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신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는 답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답입니다. 학자들은 이 대답이 복잡한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해결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해 왔습니다. 지난 2 백년 동안 그들은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해결하려다가 결국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에 대한 믿음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 아주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 '하나님'이라고 번역한 것을 잠시 '신'으로 바꾸어 읽어 보겠습니다.


신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신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신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롬 1:19-20)


의역 성경 <메시지>(The Message)를 펴낸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이 구절의 뜻을 더 명료하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신이 실재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근본 사실입니다. 그저 눈을 떠 보기만 해도 보이지 않습니까!
신이 창조하신 것을 찬찬히 그리고 유심히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언제나, 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


2


이를테면, 그분의 영원한 능력이나 신성의 신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변명할 수없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신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의 원인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첫째,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신이 자신의 흔적을 피조 세계 안에 흩뿌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면 작가의 싸인도 보이고 특징이 보이듯, 피조 세계 안에 신의 싸인들이 숨어 있고 그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도 기억할만한 말씀이 나옵니다.


신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4:6)


세상 모든 만물에 신이 있다고 믿는 '범신론'(pantheism)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시계공처럼
우주를 만들어 놓고 멀리서 지켜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운행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 역사 안에서 신의 존재를 알만한 것들이 숨어 있습니다.
둘째, 인간의 마음 안에 신을 알아 볼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3 장 11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절은 개역개정으로 읽습니다.


신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신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찬히 그리고 주의깊게
자연과 역사를 관찰하면 신의 흔적이 보이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신에 대한 싸인이 매우 단편적이고 모호합니다. 그래서 싸인에 대한 해석과
결론이 다 각각입니다. 그것은 마치 독수리 그림의 500 피스짜리 퍼즐 조각 몇 개를 발견한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퍼즐 조각 몇 개를 이리 저리 맞추어 보고는, 어떤 사람은 물고기처럼 생겼다고 추측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무처럼 생겼다고 추측합니다. 그것처럼, 피조 세계와 인간 세상에 숨어 있는 신의 싸인을
발견하고는 어떤 사람은 모든 물질에 신이 붙어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여러 신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물론, 참된 신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해석하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유교나 불교같이 체계화된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하늘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른 새벽이면 깨끗이 목욕재개하고 정갈한 물 한 그릇 떠 놓고 하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그 하늘님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초월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 종교가 중국 땅에 들어가기 전에 중국인들은 '상제'(上帝, Shang Ti)라는

초월자를 믿었습니다. '황제'보다 높아서 '상제'입니다. 상제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제각기 생각이
달랐지만, 그런 초월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같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든, 초월자 혹은
창조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절대 다수가 인정합니다. 다만, 그 창조자에 대한 생각이 다 각각이어서
문제입니다.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에 처음 교회 다니기 시작한 우리 교회 교우가 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에는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지만,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에 나간 것입니다. 누구의 전도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참 흥미롭습니다. 부부가 합의하기를, "뭔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는 것 같으니, 한 번 확인이나 해 보자"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까지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연과 역사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에게는 신의 싸인이 보이게 되어
있으며, 그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경배하고 섬길만한 신은 오직 한 분 뿐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신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으며 온 우주의 운행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그 신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당신의 모습의 일부를
드러내셨고 당신의 뜻을 알려 주셨셨습니다. 그것을 '계시'(revelation)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모든 민족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그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계시조차 충분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주 창조주를 우상으로 변개시키고 신의 뜻을 왜곡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창조주에 대해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히브리어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는 신'(God with us)이라는
뜻입니다. 창조주이며 초월자인 그 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분의 인격, 그분의 성품,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적,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분의 승천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성령을 통해 그분이 하고 계신 일들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 신에 대해 부족함
없이 드러내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신을 계시하신 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 자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어떤 존재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답합니다. 인류가
그동안 짐작하여 믿어오던 신이 그분을 통해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인간은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심각한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충분할 정도로 신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한 설교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는 아테네
시를 둘러본 소감을 말하면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행 17:22-23)


4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이유는 그분을 통해 알지 못하고 섬겼던 신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주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선교사이면서 종교 현상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단
리처드슨(Don Richardson)은 Eternity in Their Hearts: Startling Evidence of Belief in the One True God in Hundreds of Cultures Throughout the World 라는 책을 썼습니다.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견된다는
연구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중국과 한국의 선교 역사를 비교합니다. 그는 중국보다 한국의 복음 전도가 더
효과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를 신의 이름에서 발견합니다.


처음 중국에 들어간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이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던 '상제'(上帝, Shang Ti)라는
이름 대신에 '천주'(天主, Tien Ju)라는 생소한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상제'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염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라는 생소한 이름이 중국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반면, 한국의 경우에는 선교사들이 한국인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던 '하늘님'을 약간 변형하여 '하느님' 혹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국인들에게 복음은 "당신들이 믿던 신은 가짜다. 여기 진짜 신의 이야기를 들어 보라"는
뜻이었고, 한국인들에게 복음은 "당신들이 알지 못하고 믿던 그 신이 누구인지, 예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라는 뜻이 된 것입니다.


3.


이제부터는 '신'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말을 바꾸겠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고 믿던 '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만나고는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소문자로 god 이라고
사용하다가 대문자로 God 이라고 사용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새롭게 눈 뜨는 순간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그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운행과 인류 역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위대함만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과 성품도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그분의 정의로우심, 그분의 정결하심, 그분의 아름다우심, 그분의
밝음이 너무나도 강렬하여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한 번은 하나님에게 그 영광을 보고 싶다고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출 33:20)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영광이 지나 갈 때 바위 틈에 숨어 그 뒷모습만
보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아무도 살 수 없습니까? 너무도 크고 깊고 높고 빛나고
아름다워서 감당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밤하늘에 가득한 은하수를 보고도 때로 숨이 막힐듯한데, 그
창조자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본다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영혼이 맑고 깊은 사람을 만나도 자신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날까 두려운데, 하나님 앞에 섰다 싶으면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오늘 읽은 시편 29 편의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지은 시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하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자연 현상을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폭풍이 불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며 그로 인해 산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퍽퍽 쓰러지는 모습을 빗대어 하나님의 위엄과 광채와
능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5


주님의 목소리가
물 위로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큰 물을 치신다.
주님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주님의 목소리는 위엄이 넘친다.
주님께서는 목소리로
백향목을 쩌개고,
레바논의 백향목을 쩌개신다.
레바논 산맥을
송아지처럼 뛰놀게 하시고,
시룐 산을
들송아지처럼 날뛰게 하신다.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튀긴다.
주님의 목소리가 광야를 흔드시고,
주님께서 가데스 광야를 뒤흔드신다.
주님의 목소리가,
암사슴을 놀래켜 낙태하게 하고,
우거진 숲조차
벌거숭이로 만드시니,
그분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영광!" 하고 외치는구나. (3-9 절)


상상이 되시지요? 그런 무시무시한 폭풍을 한 두 번쯤 경험해 보셨지요? 폭풍이 심하게 불고 지나간
뒷자리의 그 음산한 모습을 기억하시지요? 거대한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엄청난 페허를 기억하시지요? 그
페허를 보면서 자연의 힘에 두려워 떨었던 적이 있지요? 다윗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능력을 생각하며
그런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달라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전도사로 봉사할 때의 일입니다. 어떤 교우가 주일 예배에 한
동안 보이지 않다가 모처럼 나왔습니다. 그분에게 여쭈었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 동안 못
뵈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대답합니다. "예, 저는 전도사님을 못 뵈었지만, 하나님은 주일마다 뵈었습니다.
그동안 초원교회에 다녔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초원교회'가 정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골프장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저는 잔디 밭에서도 하나님을 만납니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 때는 농담으로 지나쳤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분이 정말 진담으로 그렇게 말했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하나님은 잔디밭에 내리 쪼이는 햇볕같은 분이기도 하지만, 번개나 천둥같은 혹은 지진이나
해일같은 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창문을 통해 내려 쪼이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했다는 분도 계십니다. 함박눈이 내린 풍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제 곧 시작되겠지만, 봄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도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그러니 잘 가꾸어진
잔디밭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대개는 공과 구멍만 보고 말지만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자연의 여러 가지 조화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라면, 천둥과 번개, 폭풍과 지진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시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따뜻하고 자비롭고 아름답고
고운 분이기도 하지만, 천둥과 번개와 지진과 폭풍같은 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어찌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처음으로 눈을 뜨는 것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는 순간, 십중팔구는 눈을 감고 땅에 얼굴을 박고 두려워 떨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은 먼저 우리를 떨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복음입니다.
진짜 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너무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을 종이 호랑이처럼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망각하기 쉽습니다. 과거에 교회는 진노와 심판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추가 그 반대 방향으로 너무 쏠려 버렸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말하기를 즐기지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두려워 믿게 하는
것이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좋아서 믿게 만드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노와 심판과 지옥에
대해 꼭 필요한 만큼만 말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제가 하나님의 사랑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을 너무 작게, 하찮게, 쉽게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어떻게든 외면하고 축소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요즈음의
추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심판하고 징벌하시겠는가?
우리가 이생에서 잘못했으면 얼마나 잘못했다고 그 몇 십년의 생애를 두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최악의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셔야 옳다." 이런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그런 것
같고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추론한
것입니다. 이 논의에서의 하나님은 실제 하나님이 아니라 가정된 하나님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본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눈이 열려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절대 거룩의 광채를 가지신 분의 영광을 보는 순간, 내 존재가 그 광채로 인해 타버려도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는 순간, 그분이 나를 심판하셔도, 징벌하셔도,
영원한 형벌에 처하셔도 달게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용히 물러 앉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인류 역사를 주관해 오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깊이 묵상할 때, 문득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그분의 그 위대하심과 눈부신 광채와 거룩한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분 앞에 심히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그 단계를 거쳐야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으로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보고 나면 세상 질서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류가 코페루니쿠스(Copernicus)의 발견 이후에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힌
것처럼,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나면 세계관이 뒤집히게 됩니다. 그 전에는 나를 위해 신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합니다. 과거에는 신에게 자신의 요구를 구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믿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됩니다. 세계의 중심이 하나님이요, 인생의 중심이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만났는지의 여부는 바로 이같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유치한 감정과 혈기로 좌충우돌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 심술을 부리다가 자신에게 치성을 드리면 잠시 놓아주는 잡신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운행하고 계신,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절대 거룩, 절대 진리, 절대 정의로 가득한 분입니다.


모름지기 신이라면 그래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신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말 믿고 의지할만한 참된 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그분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때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스운
분으로 만듭니다. 때로, 교회가 그 하나님을 옹졸하고 편협한 분으로 묘사합니다. 우상이나 점쟁이들이 믿는
잡신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 그 찬란하심, 그 심오하심, 그 거룩하심, 그
아름다우심, 그 뜨거우심, 그 차가우심, 그 밝으심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신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이 아직도 여러분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해 스스로 만든 가설을 붙들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부디, 자연을 통해서든, 사건을 통해서든, 환상을 통해서든, 기도를 통해서든, 깨달음을 통해서든,
말씀을 통해서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두려움에 압도되어 무너져
엎드리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복음 앞에서 떨어야만 복음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그런 경험을 거친 분들이 많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안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자애로운 아버지로 모시고 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혹시나 하나님의 사랑에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분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친숙해진 까닭에 혹시나 그분을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과연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섬김이 그분의 위엄에 합당한지를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모습이 온 우주의 창조자를 아버지로 둔 사람에게 어울리는지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시편 29 편의 첫 두 절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을 모시는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돌려드리고
또 돌려드려라.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려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리라. (1-2 절)


부디, 저와 여러분의 믿음 안에 하나님의 위치가 회복되고 또한 그분의 크기가 원상태로 복구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편안한 크기로 축소된 하나님은 우상이며, 그 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온 우주의 하나님, 때로는 번개와 천둥, 지진과 해일과 같은 모습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두렵지만 또한 살맛 나게 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위대하신 주님,
높으신 주님,
깊으신 주님,
빛나는 주님,
강하신 주님,
저희로
주님을 주님으로 알게 하시고
주님을 주님으로 믿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4 년 3 월 16 일 주일 설교 '다시 복음으로'(2)
"복음 앞에서 떨다"(Tremble Before the Gospel)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70 장(통 79)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시편 29 장 전체를 읽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묵상합니다. (10 분)
4. 말씀의 요약 (웹싸이트에 있는 말씀 요약을 읽습니다. 10 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 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 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창조주 혹은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거나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가장
기억에 남은 경험을 말해 보십시오.
3) 과거에 믿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안 하나님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한 두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4)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적이 있습니까? 지금 당신의 하나님은 얼마나 큽니까?
6. 기도
1)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2) 하나님의 위엄에 합당한 예배와 삶을 살도록 기도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67 장(통 31)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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