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로마서 › 다시 복음으로!' (5)"복음 앞에서 웃다"

김영봉 목사 | 2015.07.12 23:54:1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롬5:1-11
설교자
김영봉 목사
참고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4년 4월 6일 주일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다시 복음으로!' (5)"복음 앞에서 웃다"
(Laugh Before the Gospel)
로마서(Romans) 5:1-11


1.
얼마 전,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제자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요즈음 제 설교를 꾸준히 듣고 있다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설교의 방향성이나 목회의 방향성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제가 맞게 보았나요?"
아마도 여러분 중에도 지난 몇 주일의 설교가 그렇게 들렸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제대로 알고 보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에 대해 심도 있게 말씀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북하게 느낀 분도 계셨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주제들을 기회 있을 때마다 다뤘습니다. 그럼에도 뭔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면 적어도 두 가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가 '하나님의 위엄'(the majesty of God)이고 다른 하나가 '죄의 심각성'(the severity of sins)입니다.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엇인지, 그분이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지,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2.
우리는 지난 주에 다윗이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고 하나님께 올린 회개 시편(51편)을 읽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죄의 속성에 대해 새롭게 깨닫고 그로 인해 진정한 회개를 경험할 수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다윗은 자신의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구합니다.


첫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구한 것입니다. 죄는 가장 먼저 하나님에게 상처를 줍니다.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1절)


둘째, 죄를 씻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죄는 지은 사람의 영혼을 오염시킵니다. 죄의 행동은 이미 끝났어도 그 영혼은 여전히 더러운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오염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면 그대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구합니다.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2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7절)


셋째, 자신의 영혼을 새로 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죄 씻음을 받는다 해도 또 다시 같은 죄를 짓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결심하고 결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외부로부터의 능력을 입지 않으면 우리의 죄성은 치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합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10절)


다윗은 이 기도 제목들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절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이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자 땅 바닦에서 자면서 금식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용서의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했을 것입니다. 속죄를 위한 제사도 부족함 없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차츰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만큼 흡족하게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음에 분명합니다. 그것이 율법종교의 한계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을 전제하고 주어진 삶의 지침입니다. "너희는 죄인이니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지켜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제사는 이미 범한 죄를 해결하는 도구로 주어졌습니다. "율법에 따라 살다가 실패하여 죄를 지으면 이렇게 해결하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제사로써 하나님의 용서와 죄 씻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음과 영혼이 새로 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인들은 율법과 제사만으로 만족하고 살았지만,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뭔가 더 깊은 해결책이 없이는 진정한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실한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린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메시야가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시켜 주기를 기대한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인간 본성의 문제를 꿰뚫어 본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3.
바로 그것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죄의 결과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까지 해결 받습니다. 다윗이 회개 기도를 통해 구한 세 가지의 변화가 십자가를 통해 완전하게 일어납니다.


첫째, 다윗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즉 용서를 구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보증입니다. 십자가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롬 5:8--9)


둘째, 다윗은 죄로 물든 자신의 영혼을 씻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우슬초로 씻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슬초(hyssop)는 제물을 드릴 때 피를 찍어 뿌리는 데 사용한 '에조브'(ezov)라는 식물입니다. 우슬초 자체에 씻는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슬초에 묻은 짐승의 피로 죄를 씻어 달라는 뜻입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죄 제사를 드리면서 짐승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었기에 다윗이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을 받습니다. 속죄 제사를 드릴 때는 "이 피가 내 죄를 씻어 주리라"고 믿고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으니, 그 의식을 행하면 씻겨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실제로 우리의 오염된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씻어 줍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은 지금도 흐르고 있고 또한 살아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할 때 그 보혈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하여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9:12-14)


셋째,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새롭게 지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램일 뿐, 율법 종교는 결코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못합니다. 반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심령으로 지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거룩한 피 즉 보혈로써 죄 씻음을 받을 때, 주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부어 주시어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롬 6:4-7)


4.
이 즈음에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볼 질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질문을 한 번도 안 해 보신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걸려 넘어져서 아직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분도 계실 것이고, 믿음의 도약을 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유대 청년의 죽음이 어떻게 인류 전체의 죄에 대한 속죄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나의 죄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저 자신도 이 질문과 오래도록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이 질문도 역시 논리로서는 절대로 설명하여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눈을 뜨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 알 수없듯, 십자가의 그늘 밑에 피하여 그곳에서 은혜를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 질문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성에 대해 너무 과신한 나머지 이해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다 이해하고 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매일같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 중에 그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복용하는 사람 중에 그 약의 효능을 다 이해하고 먹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허다한데, 일상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 신비에 대해서까지 이해되는 만큼만 믿겠다는 태도가 과연 옳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십자가의 신비에 대해 마음을 열만한 작은 단서라도 있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신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아, 그렇구나!"라고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십자가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해 줄만한 단서들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단서들 중 하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신 이야기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주간 목요일 밤에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입구에 이르셔서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하신 다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때 주님은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마 26:37)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늘 가까이에 두셨던 세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 26:38)


복음서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이 지점에서 커다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떤 두려움의 감정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죽을 것을 알면서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죽음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고,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의심없이 믿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아무 거리낌 없이, 두려움 없이, 담담하고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 깊은 곳에 들어가 기도하기 전에 갑자기 패닉 어택을 받은 것처럼 두려워 떱니다. 세 제자를 따로 두고 홀로 가셔서 오랫동안 기도하시면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천사들이 내려와 주님을 도왔고,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정황은 그분이 경험한 두려움의 깊이를 말해 줍니다.


이게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이제까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억압하거나 외면하고 있다가 여기서 무너진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못한 보통 사람들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같은 분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이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을 친단 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두려워 떤 것은 당신이 겪게 될 개인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고 결론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뭘까요? 무엇이 예수님을 그토록 두렵게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그 죽음은 예수님 혼자의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혼자의 죽음이었다면, 그렇게 두려워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죽음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기에 주님은 그토록 몸서리를 친 것입니다.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것 외에 어떻게 이 특별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5.
십자가에 대해 마음을 열게 해 줄 또 다른 단서는 '부활'입니다.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단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인정한다면, 십자가는 전혀 다른 무게와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십자가에 대해 가장 자주 제기되어 온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2천 년 전에 일어난 한 유대 청년의 죽음이 나의 구원이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이 다만 '한 유대 청년'의 죽음이었다면 나의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그분이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세상 끝날에 일어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한 유대 청년'이 아닙니다. 인간의 차원을 뛰어 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것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는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입니다. 그런 분의 죽음이라면 십자가가 달리 보이지 않겠습니까?


'2천 년'이라는 시간적인 간격도 문제로 느껴집니다. 그 장구한 시간의 간격을 넘어서서 그 죽음이 오늘 나에게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부활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재고의 여지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2천 년은 한 순간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보면 지구는 한 점에 불과합니다. 영원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신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역사를 넘어서는 사건이며,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역사 속에서 한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결코 모든 인류의 구원 사건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알고 믿을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서 그 능력을 알아가는 대상입니다.
부디, 예수님의 겟세마네 이야기와 부활 사건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고, 십자가가 단순한 인간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라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인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쳐다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진지하게 무릎 꿇고 기도해 볼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을 때 십자가를 쳐다 보고 보혈의 은혜를 구할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십자가를 부정했던 사람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선전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예수 쟁이들이 말하는 십자가의 복음이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렸는데, 부활을 믿고 보니 십자가가 달리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고는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1:23-24)


6.
작년 여름, 강단에서 기도하다가 업드린 자세로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제게 십자가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 때, 적은 글이 있습니다. 목회칼럼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다시 읽어 드립니다.


십자가 아래서기도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다 아래서 보니 십자가는 두 팔을 활짝 벌린하늘이다 저 품에 안기면 걱정 없겠다 아래서 보니 십자가는 하늘로 난 길이다 저 길을 걸어가면 하늘에 닿겠다 아래서 보니 십자가는 하늘을 나는 날개다 저걸 잡으면 하늘로 비상하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아십니까? 십자가의 신비와 능력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십자가의 활짤 벌려진 팔을 통해 "두려워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셨습니까?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보혈의 능력으로써 마음과 영혼이 말갛게 씻음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옛 사람을 못박고 새 사람으로 거듭 났습니까? 십자가로부터 흘러 넘치는 주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부디, 그 신비와 그 능력을 늘 힘 입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그 신비와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체험으로 증언하는 많은 증언들에 귀 기우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며 또한 한 청년의 죽음도 아니라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인생의 곤고한 때가 이르기 전에 십자가 밑에 무릎 꿇고 그 은총에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언제라도 좋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다 싶을 때,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그곳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비로소 복음 앞에서 활짝 웃는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고개 들어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마음 열어 십자가를 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용서와 사랑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보혈로써 죄를 씻음 받고
성령으로써 거듭나게 하소서.
십자가 그늘 밑에서
사랑과 희망과 새생명을 찾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4년 4월6일 주일 설교 '다시 복음으로'(5)
"복음 앞에서 웃다"(Laugh Before the Gospel)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143장(통 141)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로마서 5장 전체를 읽으십시오.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이 있으면 나누십시오. (10분)
4. 말씀의 요약 (웹싸이트에 있는 말씀 요약을 읽습니다. 10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두 가지 단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3) 십자가를 통해 죄 문제에 대한 해결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십시오.
4) 십자가의 은혜가 늘 살아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의 생각을 나누어 주십시오.
6. 기도
1) 십자가의 신비에 마음을 열도록 기도하십시오.
2) 십자가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하도록 기도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415장(통 471)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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