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궁극이 | 2022.08.07 13:08:1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1:43-46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43-46: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려고 하다가 빌립을 만나자 그냥 지나치지 않고 데리고 가려고 하셨다. 창조주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실 때 오늘날 나에게 아이고, 아무개가 있지. 아무개에게 이 일을 맡기자라고 하시겠느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이나 마리아의 집에 자주 들르셨듯이 오늘날 믿는 사람들 중에 누가 주님의 생각에 빨리 떠오를까?

 

엘리사 선지자가 누구의 집에 기거하다시피 자주 들렀느냐? 수넴여인의 집에 자주 들렀다. 이걸 잘 봐라. 우리가 이런 성경을 보면서 지금의 자기에게는 주님께서 자주 들리길 원하시겠느냐, 그냥 지나치시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신앙이 있고, 없고가 차이가 나는 거다.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은 벳새다라는 동리의 사람인데, ‘벳새다고기잡이의 집이라는 뜻이다. 어부는 산 고기를 잡아서 죽이는 일을 한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어부의 직업이 나쁘다는 뜻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신앙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느냐, 죽이는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거다.

 

믿는 사람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사람을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예수를 믿게 해서 이치를 깨닫게 해서 죽음 저 너머 신령천국에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영을 살리고, 실력을 살리고, 마음이 병든 자를 고치고, 믿음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게 교회가 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종들은 이 일을 한다. 이 일에 수종을 든다.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회는 좋은 목사의 기준을 신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많이 했느냐?’ 하는 것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게 기준이 되면 예수님이라는 기준이 없어진다. 왜냐? 예수님께서 세상학교를 다녔느냐?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했느냐? 이런 게 없이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당신의 언행심사와 모든 삶의 목적이 당신의 백성들을 하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셨으니 세상공부를 많이 한 목사님에 비하면 사이비라고 할 정도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고 죄 아래 사는 인간들에게 생명과를 먹여서 죽은 영을 살리고 주님의 성품을 입게 해 주려고 이 땅에 오셨다. ‘당신의 살을 먹어라. 피를 먹어라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과 언행심사를 먹으라는 거다. 그래야 네가 산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산 교훈이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에 대해 말을 할 때는 설교를 잘 한다. 못 한다로 보지 말고 설교 속에 누가 나타나고, 무엇을 자랑하는지를 봐라.

 

선악과 따먹은 세상은 하나님을 버린 곳이요, 저주받고 타락된 멸망만 있는 곳이요, 죽는 곳이요, 죽이는 곳이니 세상사람들은 이런 곳에 살면서 죽이는 일만 하다가 가게 된다. 성경에는 이 사실에 대해 여러 곳에 비유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거라사인 땅의 공동묘지에 거한 군대귀신이 들린 자는 무덤 사이에 살고 있다. 즉 사망계 사망권 안에 살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전부는 죽이는 일이다. 세상사람들의 삶이 이렇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죄 아래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던 그 일이 전부가 죄적인 거다. 어두운 데서 일을 하면 똑바로 되는 일이 있느냐? 빛이 있는 곳에 사는 것과, 빛이 없는 곳에 사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 사는 것과, 모든 것이 죽은 곳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이런 것에서 예수 믿는 이치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셨는데, 하늘로부터 오는 것은 전부가 산 거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것은 믿는 우리들에게 산 자가 되어서 영원히 살리는 일을 하라는 거다. 모든 좋은 은혜는 위로부터 온다. 가정에서도 부모로부터 좋은 것이 자녀에게 내려간다. 모든 좋은 것이 위로부터 끊이지 않고 내려가는 게 구원계대요, 생명의 계대요, 하나님의 축복의 계대다. 이것을 끊어놓고 먹기 위해 산다면 하루에 밥을 몇 끼나 먹고 살 것 같으냐?

 

하나님께서 인간 하나하나를 창조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 거냐? 하나님께서 자기로 통해, 자기 가정으로 통해, 자기 교회로 통해 살리는 일, 생명적인 일은 해서 사람들에게 생수를 먹여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신다. 자기로 인해 이 일이 끊어지면 안 된다. 끊으면 너는 저주다.

 

살리는 일만 하시는 예수님께서 인간 자기를 살렸다. 교훈으로 살리고 깨닫게 한다. 그래서 이 주님을 믿는 사람은 비록 믿음이 없고 육덩이 교회에 다닐지라도 아무렴 앞뒤 집 흉이나 보고 수다나 떠는 사람보다야 낫다. 그리고 일반교회는 비록 이룰구원 면에서 잘못되었을지라도 교회에 모이면 남을 돕고 사랑을 하자고 하지 도둑질을 하자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

 

교회는 믿는 사람 개개인이 자타를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게 일반과를 먹는 거다. 이게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된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에 맞는 삶인데, 주님께서 이 일에 수종드는 자를 멸망이 되도록 하시겠느냐? 믿는 사람이 주님의 이 일에 수종을 많이 들수록 이게 주님께 충성이다. 믿는 자기가 진리의 일을 하는 곳에서 수종을 들면 진리로 닮아진다.

 

하나님의 일을 한 자는, 즉 자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일에, 주님의 교훈으로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일에 수종을 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니 이 일을 한 자는 영원히 존귀 영광이 되게 하신다. 성경으로 통해 당신의 이름을 걸고 이 약속을 하셨다. 선지자를 영접하는 가정은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자기 마음 속에 뭘 받아들이느냐, 뭘 영접하느냐에 따라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된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서 이 말을 한 것은 아주 정확하게 말을 한 거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를 좇으라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서 성경을 생각한 게 틀림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얘기를 하는 거다. 자기에게 나를 쫓으라라고 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약속하신 메시아임을 확실히 알게 된 거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으로 들어가서 확신이 되어야 한다. 목사님의 말씀이 좋은 말일지라도 자기가 성경을 읽으면서 확신을 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서 확실하게 다져져야 한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목사님이라도 하나님이 아닌 이상 허점이 있다.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도, 다윗도, 솔로몬도 허점이 있었다. 사람을 완전자로 보지 말아라. 그렇다고 해서 부족한 인간이니라고 하면서 자기가 죄 지은 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목사님의 말씀이 옳으면 성경 속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을 해 봐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정을 했으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를 했다. 말씀으로 자기의 생각을 바로 잡았다. ‘우리 목사님이 그러시던데라고 하지 말고 말씀에서 다시 확인을 하는 게 옳은 신앙의 자세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자기의 양심이 괴로운 것만 생각을 했지 말씀을 기억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었지만 이건 회개가 아니다.

 

자기의 마음이 괴로우냐? 말씀을 기억하라. 이게 새김질이고 주님을 찾는 거다. 이럴 때 자기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온다. 성경에 이런 예가 많이 있다. 사마리아 여자를 술집에서 몸 파는 여자로만 생각하지 말아라. 계시는 따로 있다. 이 여자는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 복을 받는다고 하는 정신으로 살았던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먹었다. 그리고 남편 여섯이 있었지만 참 의지자를 못 만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라고 하니까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한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 여자를 만나서 대화를 한 것은 이 여자와 믿는 우리들에게 참 의지자를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몸 팔고 물 팔던 여자인데, 술을 팔면서 손님들로부터 복음의 소문을 들었다. 어느 날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왔을 때 목숨을 걸고 이들을 숨겨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이것이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두 정탐꾼, 즉 진리(말씀)와 영감이 왔을 때 여기에 자기의 목숨을 걸고 나가면 이룰구원이 된다는 거다.

 

오늘날 믿는 자기가 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바로 서려고 하면 주님이 찾아오신다. 평안으로 찾아오시든지, 사건으로 찾아오시든지, 기쁨으로 찾아오시든지, 말씀 깨달음으로 찾아오시든 한다. 이런 것을 통과하면서 자기가 변화되는 게 있다면 이건 주님이 자기를 찾아오신 거다. 믿는 사람이 주님의 마음으로 달라지면 이 마음의 운전에 따라 자기의 육신을 의의 병기로 쓰게 된다. 이러면 이룰구원이 된다.

 

우리는 자기의 잘못이 생각날 때 가룟유다처럼 하면 안 되고 베드로처럼 말씀을 붙잡고 회개를 해야 한다. 이 회개는 기본회개가 아니라 중복적인 회개를 말한다. 사람이 항상 잘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실수를 하면 즉시 회개를 하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실수도 하고 이런 저런 마음을 품기도 하는데, 자기에게 해가 되는 마음을 품으면 결국은 이것이 자기에게 고통으로 다가오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바로 하면 모든 만물이 너를 좋아할 거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언행심사가 나가니 사자가 다른 사람은 잡아먹었지만 다니엘은 안 잡아먹었다. 그러면 사자가 다니엘을 잡아먹고 싶은데 하나님이 잡아먹지 못하게 해서 못 잡아먹은 거냐, 먹을 생각이 없어서 안 잡아먹은 거냐, 입맛이 없어서 안 잡아먹은 거냐? 인간처럼 생각을 한다면 아 이 사람은 의인이니 잡아먹지 말자라고 해서 안 잡아먹은 거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니 풀무불이 세 사람을 잡아먹지 못하는구나. 이런 것을 보면서 이 말씀을 나에게도 주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은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한다고 미리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안 믿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을 본 후에 제자들에게 가서 증거를 했는데도 안 믿었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마리아에게 전에 들렸던 귀신이 다시 들어와서 마리아가 헛것을 본 것으로 알았을 거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병 든 사람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직접 보고도 믿지를 않았다.

 

이걸 보면 예수를 전할 때 예수가 믿어지는 것도 신비롭고, 안 믿어지는 것도 신비롭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즉 인간 네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교회에 나온 게 자기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다? 그러면 네가 교회에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올 때가 있을 텐데 이건 어떻게 된 거냐? 전도를 할 때 나이 들면 믿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네 마음대로 되는 거냐? 이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냐?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건 믿음의 생각이 아닌 외식적인 생각이다. 빌립은 성경에 있는 것으로 말을 했는데 나다나엘도 성경을 생각하고 이렇게 물은 거냐, 일반적인 생각으로 시골구석에서 무슨 인물이 나오겠느냐?’ 하고 물은 거냐? 후자다. 육의 생각으로 말한 거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한 것은 나다나엘도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한 성경을 보았다는 거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헤롯의 난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을 했다가 나사렛으로 오셨다는 것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왜 애굽에 살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십대 소년인 어린 예수를 데리고 나사렛으로 올라가라고 했느냐? 요즘 사람들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시골구석인 나사렛에서는 예수님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여건이 좋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 한 말씀이냐? 하나님은 더 잘 아신다. 그럼에도 왜 나사렛으로 가라고 하신 거냐? 집값이 싸서? 땅값이 싸서? 미래적으로 그 지역이 발전할 거라서? 아니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자랄 수 있는 여건을 보시고? 어떤 거겠느냐?

 

요즘 부모들을 보면 자녀들의 교육여건을 생각해서 자꾸 도시로 간다. 이건 한 마디로 세상 물질 이해타산으로 사는 거다. 이런 부모들의 머릿속에는 맨 돈만 들어 있고 일등만 들어 있다. 이건 창조의 목적관에서 완전히 빗나간 거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정서 면이나 인격 면이 다듬어지며 올라갈 수가 없다.

 

아브람이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시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집값이 아무리 싸도 다 팔고 헤브론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느라고 손해를 봤다면 그걸 보충을 못 하시겠느냐? 그런데 시골의 어느 목사는 공부를 위해 자식을 도시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교회도 안 나가는데도 자식들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 도시에 그대로 둔다고 한다. 이런 정신의 목사라면 당장 목사를 그만 두어야 한다.

 

오늘날 21세기의 부모들이 얼마나 많이 배웠고 얼마나 똑똑하냐? 그런데 온 세상 부모들이 세상에 맞추어서 자녀들을 교육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돌아가도 세상 끝 날까지 구원의 일을 계속 해 나가신다. 이 역사를 보는 눈은 성령님에 감화된 눈이다.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전하는 말만 듣고는 안 된다. 그래서 네가 와서 직접 보고 만져봐라라고 하는 거다. 이래야 확실히 알 수 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전한다면 이 말을 듣는 성도는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반대로 이질적인 말씀을 받으면 세상 인본주의,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 비진리적인 지식이 들어가서 진리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 정서적 세상적인 것을 찾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평생 예수를 믿어도 진리의 믿음 안으로는 못 들어간다. 생명적 믿음은 못 가진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정신도 사상도 소원 목적도 주님이 알아주는 사람으로 되어야 한다. 인격적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고, 지혜지식이 있고, 도덕성이 반듯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사람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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