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 우리에게 ‘신앙의 웃음’을 주소서

김부겸 목사 | 2015.05.24 23:47:4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창1:9-10
설교자
김부겸 목사
참고
http://blog.naver.com/malsoom/97344616

2010년 1월 10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창세기 1장 9절~10절

설교제목 : 우리에게 ‘신앙의 웃음’을 주소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거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고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세 1:9~10)】

 

  <책 이야기>

  며칠 전 『그리스도교와 웃음』(미야다미쓰오 지음, 가톨릭출판사)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 가운데 와 닿은 하나의 문구는 “웃음은 해방의 언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웃음’이라는 코드로 변형시킨 주기도문을 소개했는데, 그 새로운 주기도문이 색다른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웃음의 주기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바라건대 우리의 웃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공경하게 하소서. 우리 웃음을 통해 당신 나라를 임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우리의 웃음으로 이루소서. 즉 하늘에 있는 웃음처럼 지상에 있는 웃음에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우리에게 오늘도 신앙의 웃음을 주소서. 우리에게 상처 입힌 자들을 우리가 웃음으로 용서하듯이, 우리가 당신에게 준 상처를 웃음으로 용서하소서. 그리고 우리를 사탄의 웃음에서 구원해 주소서.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웃음이 아니기 때문이며, 진정한 웃음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읽어본 소감이 어떠신지요? 제 입장에서는 참 좋았습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거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고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세 1:9~10)】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당시에,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보여주신 당신의 표정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땅과 바다를 나누어지도록 하신 후에 지으신 그 표정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였고, 또 이 지상에 열매맺는 나무들을 만들어 놓으신 후에 지으신 그 표정이 곧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또 밤과 낮을 만드신 후에 그 표정 역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였고, 땅의 짐승들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을 지으신 후의 표정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세상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표정은 지극히 좋고 또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의 원래 성격은 그렇게 웃음이 많은 미소천사였던 것입니다.

 

  <선과 악의 판단 코드, 웃음>

  웃음은 선과 악의 판단코드입니다. 그 공동체가 선한가 악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웃음에 있습니다. 여기 한 공동체가 있다고 칩시다. 즉 가정공동체, 직장공동체, 학교공동체, 교회공동체 …… 민족공동체, 인류공동체가 있는데, 그 공동체가 선한가 악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웃음에 있습니다. 만약 웃음이 살아 있다면,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미소가 살아있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공동체가 웃음을 잃어버렸다면,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미소가 사라진 ‘죽음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웃음은 해방의 언어인 것입니다.

 

  <나의 웃음 이야기>

  이야기를 하다보니, 제가 웃음을 잃어버렸던 과거의 상황이 떠오릅니다. 제가 과거에 ‘교회 권력 쟁탈의 도구’로 활용되던 기독교계 신문사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신문사는 ‘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휘둘리는 신문사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 기자들에게 ‘옳고 그름’이 기사쓰기의 판단기준이 아니라, 그 권력자들의 눈치가 판단기준이었습니다. 특히 어느 한편의 유력자에게 그 생존의 뿌리를 의탁한 당시 신문사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상대방들의 약점을 잡는 일에 혈안이 되어야 했고, 약간의 허점이라도 드러나면 그 사실을 확대재생산 시켜서 보도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 저도 상대 후보자들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일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고, 억울한 일이었고, 답답한 일이었고, 후회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괴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약 1주일간의 여름휴가를 다녀왔는데,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첫날 후배 기자들이 제게 한 짧은 대화가 뇌리에 남습니다. “어! 선배 얼굴이 확 폈어요.” 그래요. 그랬습니다. 지칠대로 지쳐서 일그러져 있던 제 영혼이 잠깐이나마 자연속에서 쉬는 삶을 통해서 아름답게 피어났던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하느님의 미소’를 잠깐이나마 되찾았던 것입니다.

 

  <서경덕 이야기>

  화담 서경덕 선생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화담 서경덕은 그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책 읽던 그 옛날엔 세상 다스리는 일에 뜻을 두었건만 / 만년에는 안회의 가난을 달갑게 여기도다 / 부귀에는 다툼이 있으니 손대기 어려우나 / 자연에는 금하는 이 없으니 몸을 편히 쉴 수 있네 / 약초 캐고 낚시하여 배를 채울 수 있고 /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으니 정신이 맑아지네 / 공부가 의심하지 않음에 이르니 쾌활함을 알게 되고 / 헛되이 백년 사는 사람만은 면하게 되었네.】


  제가 이 짧은 시에서 주목하는 대목은 “공부가 의심하지 않음에 이르니 쾌활함을 알게 되고”(學到不疑知快活)라는 구절입니다. 다툼이 치열한 문명사회가 아니라 평안이 흐르는 자연사회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탐구한 화담 선생이 그 마음과 생각 가운데 의심이 사라졌고, 마침내 인생의 본래적 진리인 쾌활함의 영성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 기독교식으로 해석하자면, 화담 서경덕은 ‘하느님의 미소’ 속에서 살다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웃음’을 잃어버렸다면, 그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적인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웃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웃음’을 잃어버린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웃음’을 되찾을 수 있는 삶의 방법론에 대해서 깊이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우리에게 신앙의 웃음을 주소서’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신앙의 웃음을 주소서’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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