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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관 형제 | 2015.03.30 22:58: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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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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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관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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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자의 자세

(요한복음 5:2-11)

 

2013년 1월 27일 주일예배

권진관 형제

(성공회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오늘 저는 우리 삶 속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직접참여와 대리적 참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참여는 내가 어떤 사건에 직접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대리라는 말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절박한 일들에는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지마는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공간에서 즉 이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공적인 영역에서 이들을 위해서 대리해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좋은 결과가 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 오늘의 주제를 말씀드리면 presentation 과 representation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행하는 행동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결정해 줍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어떤 존재인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행동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해 주는데, 그 행동은 presentation, 즉 직접 참여의 행동과 representation, 즉 대리적 행위로 구성됩니다. 사회적 엘리트일수록, 지식인일수록 사태의 당사자가 되어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그 문제를 살피고 대변해 주는 대리자의 역할을 많이 하게 됩니다.

 

새길교회는 지식인 교회입니다. 지식인 중산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식인들일수록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직접적 참여한다기 보다는 좀 떨어져서 이 문제들을 공공적인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대리하여 참여를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 공공임대주택에 살지 않는 사람이 이에 대한 정책 결정에 참여한다면 이것은 그 주민들을 위한 대리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국회가 가장 전형적으로 이러한 대리적, 대표적인 기능을 합니다. 사회의 문제들을 그 문제에 얽혀 있는 사람들을 대리하여 혹은 대표하여 문제들을 논의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민중들의 현실을 대변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representation, 즉 대리적 대표의 기능을 많이 합니다.

 

새길 교회는 우리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놓고 기독교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약자들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대리해주고, 대변해 주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 직접참여하지 않고, 대리적인 일만 하려고 하느냐?” 얼마전 용산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용산 참사 사건의 해결을 위해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말만하는가?”하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직접 참여를 잘 하지 못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복잡한 생각을 잘 정리해 낼 수 없습니다. 책을 가지고 소일합니다. 자료를 읽고 분석하고, 다시 종합합니다. 이런 일을 하다가 보니, 밖에 나가서 직접 행동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밖에서 정의로운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거나 이러한 말을 할 기회가 있으면, 밖에서 직접 참여하면서, 뛰어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대변하려고 노력합니다. 공지영 작가가 쓴 책들, “도가니”라든가 쌍용자동차 사태에 대한 로포 “의자놀이”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대변, 즉 representation일 것이라고 봅니다. 신학도 이러한 민중의 일들을 심도있게 성실하게 대변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면서 신학을 합니다.

 

작고하신 민중신학자 서남동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의 사제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약자들, 고난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한을 대변해 주고, 감싸 주고, 치유해 주는 사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만인 사제란 모든사람들이 사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한 만인의 사제가 되라는 말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정의를 위한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식인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새길 교회도 이 직접 참여와 대리적 행위 모두를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직접 참여의 경험없이 하는 대리적 행위는 왜곡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동고(同苦)의 참여없는 대리적 행위는 지식인들의 자기 이해의 표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적인 presentation이나 사제적인 representation 모두 신앙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행동으로 우리의 존재와 신앙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가톨릭의 유명한 현대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의 신앙은 우리의 행동과 말, 생각을 포함한 모든 행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존재의 핵심에 신앙이 있다면, 우리의 존재나 신앙은 우리의 행동, 말, 삶에 의해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우리의 내면의 존재를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존재를 결정지어 준다는 것을 우리 교회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은 우리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신앙은 행동이 없으면 죽은 것이 됩니다. 저는 우리 새길교회와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이 이러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존재는 항상 밖을 향해 자기를 표현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는 확보될 수 없고,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됩니다. 행동으로 우리의 신앙과 존재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으로의 표현은 다시 우리의 존재로 회귀되어 돌아옴으로써 우리의 존재 그리고 신앙은 증가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존재의 자리인 교회는 문화원의 사업을 통하여 자기 표현되어야 하고, 이 표현은 다시 성찰되어 우리 교회 안으로 돌아옮으로써 교회의 존재(신앙)가 증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새길 기독사회문화원에 대해서 총회를 열어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문화원을 놓고 의견들이 갈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진보 보수가 함께 섞여 있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백화쟁명을 보는 듯합니다. 하나로 통일된 모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함께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을 긍정하고 타협하는 정신일 것입니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공감을 받은 영화 중에 레미제라블이 있었고, 또 하나는 “라이프 어브 파이”였습니다. “라이프 어브 파이”라는 영화에서 난파된 배에서 사나운 뱅갈 호랑이와 함께 좁은 공간을 나누게 된 주인공의 얘기입니다. 이 주인공 남자 뱅갈 호랑이는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뱅갈호랑이는 배 아래에 있다가 자주 배 위로 올라옵니다. 이 호랑이를 피해서 이 남자는 바닷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러다가 땟목을 만들어 배와 연결시켜 놓고 그곳으로 피신합니다. 식량이 배 갑판에 있기 때문에 호랑이 몰래 가져오는 과정에서 호랑이에게 공격도 당합니다. 호랑이에게 음식이 떨어져서 호랑이를 위해서 큰 고기를 잡아다가 던져줍니다.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원수가 죽도록 놔주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지루하고 끝없는 난파생활에서 호랑이마저 없었다면 이 사람은 홀로 지쳐서 살 의욕을 잃고 말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적이고, 아무리 무서운 호랑이라고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았습니다. 함께 공존할 수 없는 맹수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공존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외로움과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애착을 느꼈고 살기 위해서 계속 궁리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원수가 나를 살려준다는 얘기는 정말 아이러니하고 모순입니다마는 그것이 사실인 것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 아무리 함께 사는 사람이 웬수같을지라도 그 사람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곧 사라지고 마니까 잘 공존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좋은 것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신앙의 생명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을지라도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하나로 일치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존재와 신앙이란 그 존재와 신앙을 표현하는 외적인 표현, 즉 신앙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에서 이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가 보여준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가셨는데,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이 여자를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예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응답이 재미있습니다. 본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예수께서 무엇을 쓰고 계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거기 와 있서 예수에게 다구치고 있는 사람들의 죄들을 땅바닥에 쓰고 계셨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마는 그걸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좀 곤란하니 못들은 척하기 위해서 땅에 손가락으로 쓰는 시늉만 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으로는 예수께서는 이렇게 딴전을 부리면서, 시간을 끌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흥분한 사람들을 일단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가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나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물끄러미 예수의 손움직임을 보았을 것이고, 그의 글자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의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빵꾸, 똥꾸”라고 썼을 지도 모릅니다. 몇몇 사람들은 킥킥 댔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곳에 정신을 팔리다 보면 힘써 달려오느라 숨찼던 것도 진정되고, 분노도 어느정도 가라앉게 됩니다. 시간을 최대한 버는 작전을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쓰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예측불허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 군중들 중 율법학자 몇명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예수에게 다그쳐 묻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최근에 감동깊게 보았던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장발장을 끝까지 추적하는 자베르 경감 이야기입니다. 장발장이 자기를 잡으러 다니는 자베르를 살려주는데 이 자베르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끝까지 장발장을 추격하면서 갈등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 율법학자의 모습에서 오직 법집행만이 정의이고 진리라고 믿는 자베르를 보게 됩니다.

 

이제 이 자베르와 같은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새로운 길을 가르칩니다.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글을 쓰던 예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이 장면을 지휘했다면, 대단한 강조, 우르르 쾅쾅하는 드럼 소리와 함께 모든 현악기, 금관악기 연주자들이 최대의 소리와 최고의 피치를 올리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쳐라.”

 

그리고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허리를 굽혀 땅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 말씀에 사람들은 무장해제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돌을 놓고 돌아갑니다. 이제 여자 혼자만 서 있고,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말씀에 대해서 저의 해석의 방법을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주체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 이 여자를 잡아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세 주체가 등장합니다. 이 세 주체는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행동을 하면서, 또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라고 하는 주체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의 과제는 서로 완전히 다른 주체들 사이를 조정할 뿐 아니라, 이 주체들이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체들 상호간에 다른 입장이 나타나는데, 특히 예수와 율법학자 사이에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의 차이가 보입니다.

 

첫째로, 무엇이 정의(justice)인가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주체들 사이에 정의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정의를 주장했고, 그것은 율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법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는데 무조건 법을 따라야 한다는 율법주의의 함정이 율법학자에게서 보입니다. 자베르 경감과 같이 충실하게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필요할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예수께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정의를 율법학자들처럼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결코 정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정의는 잘잘못을 가리는 것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이라는 것, 그래서 사랑의 관점에서 잘잘못을 보고, 분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의는 이렇게 분간하는 일이지만, 사랑은 이 분간 속에서 다시 하나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정의론은 더 포괄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사랑과 정의 사이에 구분이 없습니다. 예수에게 정의는 법률적 심판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의 하나만으로 (즉, 외로운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정의는 항상 사랑과 자비, 평화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탁월하고 귀중한 인간관을 가졌습니다. 예수는 인간을 주체로 보았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율법학자들의 태도를 자베르 경감에게서 볼 수 있는데, 자베르는 빵을 훔쳐 죄를 지은 장발장은 계속 죄를 짓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자베르나 율법학자들은 죄인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장발장이 항상 나쁜 짓을 할 사람으로 확신하고, 죄지은 여인은 계속 죄를 지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여자를 주체로 보았고, 주체인 인간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주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된 행동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존재론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변화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마치 장발장이 예수와 같은 어느 신부(priest)를 만나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났듯이, 이 여자도 그렇게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전통은 이 여자가 나중에 예수의 신실한 제자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예수를 위해 옥합을 깬 여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까 소개말씀드린 칼 라너는 저의 신학적인 토대를 일정하게 마련해 주고 있는 분인데, 그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신학적 토대를 마련한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그는 그의 유명한 인간학적 존재론과 형이상학에서, 모든 존재는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 철학자들이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초월하게 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이전의 모습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자기 초월할 수 있다고 하는 존재론적인간학을 주창했는데,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확신의 한 예가 오늘 예수를 만난 이 여자에게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셋째이자 마지막으로, 예수는 제가 처음 말씀 드린 것처럼 그의 신앙을 자기의 행동을 통해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이 그가 메시야이고 주님임을 확인시켜 주고 그의 메시야적 존재를 확보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직접 참여와 대리적 참여, 즉 presentation과 representation모두를 행동으로 옮겼던 분입니다. 그는 떼로 몰려온 율법학자 바리새인들 앞에서 위험을 무릎 쓰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직접적 참여와 행동을 보였던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이 여자를 대리하여 대변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리와 대변은 결국 자신의 위험을 무릅쓴 용기있는 직접적인 참여가 있을 때 진정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 여자를 위하여 대신해 주었으며, 동시에 위험한 상황 안으로 자신을 직접 투신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간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던 예수의 열린 인간관, 그리고 정의는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따짐은 사랑으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예수님의 폭넓은 사상,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이들과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신앙을 보이시고, 메시야성을 보이셔서, 결국, 이 여자로부터 “주님”이라는 고백을 받으신 이 예수에게 우리는 존경과 사랑을 표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저의 이야기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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