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신앙인과 시인

이선근 형제 | 2015.03.30 23:01:4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9:20-22
설교자
이선근 형제
참고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129757&page=2&document_srl=129758

신앙인과 시인

(마태복음 9장 20-22절)

 

2013년 2월 10일 주일예배

이선근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간사)

 

신앙(信仰)이라는 말의 한자어 풀이는 우러러 믿는다는 뜻입니다. 보통 이 단어는 종교인들에게 그들이 따르는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실천의 진정성을 상징하여 사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신앙인(信仰人)’이라고 합니다. 한편 시(詩)라는 말의 한자어 풀이는 깊은(土) 마음(寸)을 빚어 사원(寺)을 짓듯이 언어(言)로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짓는 것이라 하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시를 짓는 사람을 일컬어 흔히들 ‘시인(詩人)’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바로 신앙하는 사람 곧 신앙인과, 시를 짓는 사람 곧 시인에 관한 것입니다.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색, 계> 등으로 유명한 헐리웃의 중국인 이안 감독은 얼마 전 새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선보였습니다. 비록 연말부터 내내 흥행 하고 있는 <레미제라블>에 가려 많은 분들이 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만, 상당히 좋은 영화라 생각되며 오늘의 주제와도 잘 맞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소설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대략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그리 성공하지 않은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멋진 소설의 소재를 찾아 헤매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신을 믿게 할 만한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고 하여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를 다 듣게 되면 신을 믿게 될 거라고 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인도에서 자란 피신 몰리토 파텔, 그는 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동물원에서 다양한 동물들과 함께 자랍니다. 뿐만 아니라 힌두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적 가르침을 접하며 종교적 질문들과 함께 성장합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운영하는 동물원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가족들과 동물들을 화물선에 싣고 캐나다로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바다를 건너는 중 큰 풍랑을 만나고 배는 그만 침몰하고 맙니다. 구명보트에 홀로 남은 파이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침몰하는 배를 보며 오열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화물선에서 탈출한 뱅갈호랑이(리차드 파커)가 구명보트를 붙들고 올라탄 것입니다. 호랑이 외에도 다리를 다친 얼룩말, 배고픈 하이에나와 시름에 빠진 오랑우탄이 보트에 함께 있습니다. 이제 파이는 이들과 함께 구출되기 전까지 망망대해 가운데서 200일이 넘는 표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은 각기 이어진 모종의 사건들에 하나씩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살아남은 뱅갈호랑이와 파이의 함께 계속 살아남기 위한 모험담들이 3D, I-Max 스크린에 황홀하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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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미묘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뱅갈호랑이와 파이가 멕시코만의 해변에 무사히 도착하여 파이는 사람들에게 구출되고 뱅갈호랑이는 숲속으로 사라진다는 결말입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에 감동한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의 소재로 사용해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괜찮다고 대답하며 그는 구출된 이후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병원에 입원한 파이에게 침몰한 화물선의 보험관련 조사를 위해 멀리 일본 본사에서 두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들의 질문은 주로 화물선이 침몰한 원인을 아느냐는 것인데, 파이는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과 뱅갈호랑이 이야기만 합니다. 당황한 일본인들은 녹음을 멈추고 재차 다그칩니다. 화물선이 침몰한 원인이 될 만한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눈물 섞인 고함을 지르던 파이는 뱅갈호랑이 이야기를 뒤로 하고는 눈물을 닦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듣고 싶다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겠다며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애초에 구명보트에는 동물들은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행복한 불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다리를 다친 일본인 여행객과 (일전에 아버지와 싸움을 하기도 했던) 거친 성격의 주방장, 그리고 파이의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난상황에서 이 세 사람은 각기 욕심과 다툼으로 죽었으며 결국 파이 혼자만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 소설가는 어리둥절해 합니다. 얼룩말은 일본인 여행객, 하이에나는 주방장, 오랑우탄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리고 뱅갈호랑이는 바로 파이 자신이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동화 같은 황홀한 영상과는 달리 참혹하고 비극적인 표류사건이었음을 소설가는 직시하게 됩니다. 이제 피신 몰리토 파텔(파이)은 소설가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선택 하던지, 한 소년이 난파선에서 탈출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 이제 이 이야기는 당신의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은가요?” 사랑하는 자매형제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이야기를 믿고 싶은가요?

 

배의 침몰 사건을 조사하는 일본인들은 당연한 사건의 당연한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파이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알기 전 소설가는 파이의 이야기가 다소 황당하지만 우연한 사건이고 꽤나 재미있는 소설의 소재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피신 몰리토 파텔에게 이 이야기는 스스로에게 닥친 고통을 이겨낸 기적적인 이야기입니다.

 

사실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면, 두 번째 이야기인 비참한 표류 사건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누구나 판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뱅갈호랑이와 파이의 표류기가 사실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는 저는 결국 파이가 믿는 기적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열린 결말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당연한 것도 우연한 것도 아닌 파이의 믿음 그 자체에 대한 놀라운 기적으로 남게 됩니다.

 

모든 종교들이 다 그렇겠지만, 처음 기독교에 입문하면 믿음에 대한 훈련을 받습니다. 야훼와 예수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와 구원에 대한 수많은 해석을 만나게 되지요. 보통 어느 단계에 이르면 각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고백적 간증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쯤 되면 그를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훈련과 더불어 우리는 기도라는 훈련에 대한 요청도 받습니다. 흔히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가 만나는 신비로운 시간이라고 설명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또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우리는 스스로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고 표현 합니다. 물론 기도생활의 협소한 의미로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룰에 따라 정해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종교 활동입니다만, 좀 더 광의의 의미로는 폭 넓은 종교적 마음가짐과 행위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기도는 자신이 가진 신앙에 대한 결과적 행위들을 포함합니다. 이처럼 신앙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것에는 믿음과 기도가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난 새길의 말씀증거 중 2003년의 길희성, 2007년의 장윤재, 2008년의 김기동, 2010년의 정양모, 김희헌, 그리고 지난해 2012년의 한인철 등 여러 선생님께서 각기 말씀해 주셨던 주제와 같은 것입니다. 깊은 성찰과 함께 할 수 있는 말씀들이오니 꼭 한번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같은 선에서 믿음과 기도를 포함한 신앙에 관한 보다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드리려 합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본문은 열두 해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고 나서 치유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동일하게 기술되어 있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상상한 이야기에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잠시 부탁드려봅니다.

 

행복한 삶을 살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고관직에 있진 않았지만 백성들을 돌보는 마을의 소박한 관리 일을 했습니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도 가져다주었지요. 여인은 남편의 월급을 쪼개어 보험도 들고 청약저축도 합니다. 아이에게 예쁜 옷을 사주기도 하고, 늦은 귀가를 하는 남편을 위해 구수한 스프를 끓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한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병원도 그녀의 병을 치료할 수 없었고 어떤 무당도 그녀의 병을 바로 잡아 주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수척해졌고 아이는 웃음을 잃었습니다. 1년, 2년, 그렇게 자그마치 12년이 지났습니다. 얼마 갖고 있지도 않은 재산 모두 탕진하고 남편도 더 이상 그녀를 보살필 수 없는 모양입니다. 아이도 이제는 더 이상 엄마의 품을 찾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비참한 그녀에게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군요. 그러면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거라고, 이미 우리는 하느님 나라 가운데 있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게다가 정말로 기적도 일으킨다고 합니다. 여인은 예수를 만나고 싶습니다.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초라한 여인은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나가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저 멀리서 그 무리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다가 예수가 우리 마을을 지난 다는 소문을 접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인은 군중과 무리의 다리 사이 먼지를 헤치고 기어서 예수님께로 갑니다. 가는 내내 상상합니다. ‘예수님의 옷술이라도 닿으면 내 병이 나을 텐데...’ 드디어 눈 앞에 예수님이 보이고 여인은 있는 힘껏 손을 뻗었습니다. 이 순간 여인은 수많은 행복한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여인을 느낀 예수님은 여인을 찾고 그녀에게 말씀합니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여인은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느꼈다고(마태복음 9:22, 마가복음 5:27-29, 누가복음 8:44) 성경은 보도합니다. 제가 재현해 낸 여인의 사건은 여기까지입니다.

 

자, 이제, 그렇다면, 예수에게 하느님과 같은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치료되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귀신의 힘이었을까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도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면 우연의 결과는 아닐까요? 재산을 몽땅 탕진 할 만큼 세상 모든 방법으로 치료받아오던 여인입니다. 알고보면 치료된 원인이 어딘가 있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병이 나은 원인을 다른데서 찾고 있습니다. 바로 그녀의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복음 9:22) 사랑하는 새길의 자매형제 여러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는 표현이 복음서에 상당히 자주 등장하여 다소 식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놀라운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본문이 삽입된 이야기들을 좀 더 보겠습니다. 본문은 한 지도자(다른 복음서에는 야이로)가 딸을 살려달라며 예수께 간청하기를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를 따라가다가 만난 여인과 있었던 일입니다. 혈루병 앓던 여인의 병이 낫고, 죽었던 소녀도 살아납니다. 이어서 눈먼 사람 두 사람도 모두 그들의 믿음에 따라 눈이 열립니다. 참 믿기 어려운 상황들의 연속입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죽은 소녀가 살아나고, 병자가 병이 낫고, 눈 먼 자가 눈을 떴을까요? 합리적인 이성으로 받아들이기엔 엉성한 데가 많아 보입니다.

 

이성적 판단 이전에 우선 세 사건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걷는 동선을 따라 각각의 사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을 꿰뚫는 건 예수의 능력이나 놀라운 기적 자체보다는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만 얹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 예수님의 옷술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 예수를 따라가면 눈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처한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은 그들이 믿는 신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그 믿음이 모든 것을 변화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앙이라고 합니다. 본문에 나온 여인과 지도자, 눈 먼 자들은 모두 신앙인들입니다. 믿으면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구원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치료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자신들의 신앙에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그랬으니까요.

 

물론 믿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음서의 메시아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다른 사람은 죽었어도 살리셨는데 정작 자신은 힘없이 십자가의 비명으로 고개를 떨구고 만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이는 충격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걸어 신앙했는데, 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듬직했던 베드로마저 처절하게 예수를 부인합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했지요. 자기는 하느님의 새 나라를 신앙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해야 할까요?

 

그러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믿고 있듯이 예수님은 부활했습니다. 하느님의 새 나라를 신앙하던 여인들이 제일 먼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성경은 보도합니다(마태복음 28:8-10, 마가복음 16:9-11, 요한복음 20:14-18). 예수님은 분명히 죽었는데 죽은 그 사람이 손에 못 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보이며 내가 그라고 인자한 울림으로 제자들 곧 우리들 앞에 서서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27) 성경은 이렇게 부활한 예수의 기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신앙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각기 달라 모두가 같을 수는 없지만 어지간해서 믿음에는 계단을 오르듯이 역동적인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계단은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믿음, 두 번째 계단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믿음, 세 번째 계단은 믿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초월한 믿음입니다. 신앙이란 그러한 것 같습니다. 우리를 신앙인이라고 부르는 건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무턱대고 믿고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우러러 믿는 것, 그 믿음대로 사는 삶을 두고 신앙하는 신앙인 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합리적인 세상, 또는 우연의 세상에 사는 사람은 첫 번째 계단이나 두 번째 계단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계단 더 오르면 하느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그 나라를 보는 것이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스스로를 지구학자라고 말한 토마스 베리, 은유신학과 생명신학으로 유명한 샐리 멕페이그 같은 분들은 우리들에게 시인이 되라고 권유합니다. 시인은 꽃 한 송이와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꽃 한 송이를 통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납니다. 시인은 아픔을 아파하고 기쁨을 기뻐합니다. 그들에게 같은 꽃이란 없습니다. 세상 모든 들꽃이 200 송이라면 들에는 200 가지의 각기 다른 꽃이 있는 것입니다. 200 가지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있고 각기 다른 생명의 영혼들이 있는 것입니다. 시인들은 꽃을 보며 사랑합니다. 지고한 사랑의 깊이는 사뭇 어머니의 자식 사랑에 못지않습니다. 이 사랑은 이름 없던 들꽃에게 이름을 주고, 세계를 주며, 생명이 됩니다. (창세기 2:15, 19-20) 신앙인의 삶이 어찌 시인의 삶과 다를까요? 자신의 삶에 시를 지어주세요. 타인의 삶에도 시를 지어주세요. 이제 꽃과 나무에게도 시를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메마른 하느님의 뼈가죽이 보일 것이며 굶주린 하느님의 신음이 들릴 것입니다.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기 시작한다면 이미 신앙인입니다. 그 다음엔 용기를 구하십시오. 건강한 신앙인은 포기하거나 돌아서지 않습니다. 함께 아프고, 함께 고통 받으며, 연합합니다. 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신앙을 성숙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신앙은 칼과 창을 쟁기 만들고 갈라진 땅에 생명수를 채울 것입니다. 다시 하느님의 몸은 생명력 있게 살이 오르고 그 음성은 평화롭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새롭게 풍성해 질 수 있습니다.

 

현재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매 순간순간이 곧 흐름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신앙의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과거나 미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는 세계의 모든 관계와 소통 된 상태를 ‘우리’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신앙의 공간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시간은 ‘지금’이며, 신앙의 공간은 ‘우리’입니다.

 

신앙을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예민한 감수성입니다. 보고 듣고 느껴져야 하니까요. 이 신앙의 감수성은 예민할 뿐만 아니라 건강해야합니다. 보고 듣고 느껴진 것들을 온전히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받아 안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깊이는 무한대입니다. 받아 안은 사랑이 ‘이만하면 됐어’ 라고 여겨질 수는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란 여전히 부족한 사랑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듣다보면 점점 불편해 질 수 있습니다. 그냥 예수만 믿으면 좋겠는데, 신앙을 키워갈 수록 예수처럼 살아야 하니 여간 쉽지가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처럼 사는 것이 신앙인이 살아야 할 삶이고 이 삶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며 풍요롭다고 저는 확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가뭄이 심했습니다. 그 한 여름 그때 목마른 논이 갈증에 쩍쩍 갈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안아 줄 수 있었으면 됩니다. 정치인, 기업인, 농민, 혹은 그 누구라도 꼭 누구의 잘잘못을 찾거나 원인을 따지거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그저 목마른 이 땅의 갈증을 눈물로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깊은 사랑이 시작됩니다.

 

내 아이가 친구와 싸워서 돌아왔습니다. 제일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냉큼 학교로 찾아가 싸운 친구를 꾸짖고 그 부모와 단판을 지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퉁퉁 부어 울상을 한 내 아이의 마음을 제일 먼저 봐주고 그 아픔을 성숙한 가슴으로 안아 주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깊이 들어주며 우리라는 관계로 연결 되는 것, 그렇게 함께 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오늘 저는 신앙인이 신앙하는 매 순간에 가장 먼저 우선해야 할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매 순간의 사건은 순간순간 계속 발생하며 다음 순간으로 흐르듯 이어져야 합니다. 매 순간 신앙한다는 것은 마치 시를 짓듯이 깊이 듣고 깊이 안아주고 깊이 사랑하는 일체의 과정 그 자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꼭 시가 아니라 음악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도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다만 악기로, 붓으로, 카메라로, 그리고 호미와 쟁기로 시를 짓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선한 관계로 연결될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시를 짓는 것입니다. 시를 짓는 것이 관계의 확장과 깊은 사랑의 실천이라면 이것이 바로 신앙이 아닌가요? 그러니 이 모든 과정이 진실하다면 (결과가 아직 확실하지 않더라도) 신앙하는 과정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는 예술이 되어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한 번 가졌다고 해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마다 변하지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는 매 순간순간 시인의 감흥에 따라 변합니다. 어제는 파란 꽃이 신비이지만, 오늘은 그 파란 꽃이 슬픔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인들은 항상 좋다고만 하지도 않습니다. 좋을 수도, 슬플 수도, 기쁠 수도,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감정은 예민한 감수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오히려 무감각한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인은 타자세계와 연결된 상태 즉 우리를 형성하고 이 연합 안에서 색색의 다양한 감정이 일어난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우리로 연합된 상태라고 하여 시가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 스스로의 ‘자기 감정’은 연합한 ‘우리의 감정’ 안에서만 ‘자기 감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을 이루는 것이 ‘내 감정’의 포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공감 또는 교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위 시상(詩想)이라는 것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시상을 표현하는 행위를 우리 기독교인의 언어에서 찾아보자면, 내면의 깊은 신앙을 따라 나를 버리고 각자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며 주님 가신 그 길을 갈 때(마태복음 10:38, 누가복음 14:27) 그때서야 비로소 시상은 시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는 그 시를 만난 사람들에게도 각기 또 다른 새로운 감동이 되어 되살아납니다. 시인이 시상을 품고 시를 지으며 누군가가 시를 읊듯이, 우리의 삶도 시가 지어지는 이 과정과 같이 영원한 생명 속에서 끊임없이 신앙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파이의 이야기에서 파이는 200여 일, 곧 1728만여 초의 매 순간마다 서사시를 짓는 시인의 마음으로 신앙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의 구명보트와 뱅갈호랑이 이야기는 영화 속 소설가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 모두에게 연결되어 우리들 각자의 이야기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마치 시를 읽듯 상상하며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을 가슴에 담고 영화관을 나왔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파이의 모든 순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로 지금 스스로에게 신앙하는 삶을 질문해야 하고, 나의 신앙이 온 생명과 연합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펼치고 있는지를 용기내어 반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12년 간 혈루병을 앓던 여인의 뻗은 손으로부터 펼쳐진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를, 우리도 신앙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길의 자매형제 여러분, ‘지금’ ‘우리’ 시를 품은 듯 하느님 나라를 신앙해 봅시다. 시인이 세상에 대하여 그렇듯 우리 신앙인도 모든 순간마다 아름답게 펼쳐질 하느님 나라를 신앙하기를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시인이 시를 가슴에 품어 이루듯,

신앙인이 신앙을 가슴에 품어 이루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 온 생명과 함께 어우러져

우리가 되게 하시고,

서로 깊이 듣고, 깊이 품고, 깊이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삶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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