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주인의 뜻대로 행치 않은 자.

궁극이 | 2022.06.13 10:17:5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12:41-48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241-48: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본문의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도 이해가 가는 말이다.

 

47-48: 그러면 주인의 뜻이 무엇이냐?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주인을 기뻐할 수 있게 하는 게 주인의 뜻이다. 주인이 기쁘던 말던 종의 뜻대로 하는 건 주인의 뜻이 아니다.

 

진리이치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또는 말하는 사람의 의사성을 알기 위해서는 생각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주인의 입장에서도 내 입장에서도 제 삼자적 입장에서도 관계성을 많이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람이 말할 때 그 사람의 의중은 더 깊고 딴 데 있는 건데 그건 모른 채 그 사람의 말의 액면만 가지고 왈가왈부하게 되면 싸움이 되고 오해가 되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매를 든 분은 항상 하나님이다. 심판자는 항상 하나님이다. ? 인간 나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 비추어 내가 나를 모르면 내가 고통 중에 빠진다. 나를 만든 그 분은 내 생각과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니 어련히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을까? 너를 만든 분이 너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아시고 말씀을 주셨을까?

 

일반적으로 보면 부모가 자식을 낳는 거지 자식이 부모를 낳는 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면 그 부모는 인생살이에 그만큼 경험이 있는 것이다. 듣고 배우고 실천하고 실험하고 한 그만한 경험이 있다. 자식은 경험 많은 그 부모로부터 인생살이를 배워나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비록 아이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부모의 마음은 거의 일반상식에서 별로 벗어나지를 않는다. 하물며 나를 만드신, 그리고 부모를 만드신, 인간을 만드신, 온 인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어련히 아시겠느냐? 한국사람의 마음만 아는 게 아니라 외국 섬나라든 어디에 있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종이 존귀해지고 영광스러워지고 행복해지는 건 누구의 뜻에 있는 거냐? 주인의 뜻에 있다. 본문에서 종이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라는 주인의 원 뜻은 종을 막 부려먹다가 늙으면 내버리려는 게 아니라 종이 주인의 말씀대로 주인집 살림을 맡아서 잘 관리를 해서 주인의 실력으로 올라가면 주인이 그걸 보고 내 집 살림을 다 맡아라. 너에게 내 집 살림을 다 넘겨주마하려는 게 들어있다. 멍텅구리 같은 종에게 넘겨주겠느냐?

 

집주인이 재산이 많은데 자식이 멍텅구리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남의 자식이라도 마음씨 좋고 부지런하고 진실하고 착실하고 건실한 사람에게 유업을 줘서 멍텅구리 같은 자식이 죽을 때까지 먹여 살리게 하는 게 훨씬 낫다. 사람이 이해타산을 잘 따져야 한다. 어떤 것이 보다 더 좋고, 효력적이고, 오래 가고, 영원히 가겠는가?

 

주님의 뜻은 인간 내가 행복하고 영원히 존귀 영광스러워지는 것.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행복하게 해 주는 것. 하늘나라는 우리의 고향이고 이곳은 나그네 세상. 그런데 이 나그네 세상에만 신경 쓰고, 마음 주고, 정 주고 이래놓으면 이 나그네 세상은 너도 나도 다 지나가는 세상이라. 이러한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살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아무리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해도 움직이는 세상에다 마음을 두면 문제는 네가 어떻게 되겠느냐? 이게 성경이 묻는 것이다. 인간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너에게 묻는 것이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기능 지능이 있듯이 영적인 면에서도 영적 기능과 지능이 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성적으로 자라야 한다. 육신이 건강하면 운동에 실력이 있고, 세상공부도 아는 게 많으면 아는 실력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격화 속성화 돼 있으면 그 사람은 그만큼 다방면에서 온전성이 들어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학박사라도 하나님을 모른다면 참 사람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사람이 안 돼 있는 거다. 이 사람은 공부는 많이 해서 물질적 이해타산의 셈은 잘 하는데 인간 관계성이 안 돼 있는 거다. 공부는 많이 했어도 물질적 이해타산만 들어있다면 그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성이 파괴가 된다. 날마다 신문으로 뉴스로 나오는 게 안 보이느냐?

 

예수를 믿어도 기본적으로 인간 관계성이 안 돼 있다면 믿어가면서 성경 하나님 말씀에서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물관계 대사관계를 잘 깨달아서 이것을 삶에 잘 적용시켜 나가면 그 사람은 자기의 관계성의 판도가 넓어진다. 그러면 넓어지느니만큼 기쁨이 넓어지고 다양하니 만큼 기쁨도 다양하게 느낄 수가 있는 거다. 이 사람을 만나보니 이렇게 기쁘고 저 사람을 만나보니 저렇게 기쁘고, 이 일을 만나보니 이렇게 기쁘고 저 일을 만나보니 저렇게 기쁘다. 사람을 아니까, 세상을 아니까 그렇게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신 것은 목적이 있어서이다. 과학자는 그 목적을 모르니까 과학적인 그것만 잡고 씨름을 한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알 때에 신령계와 가견적인 이 물질세상을 왜 만들었는지, 마귀를 왜 만들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성경은 밝혀 놨다. 성경을 통해 볼 때 인간이 우상을 섬기면 어떻게 되느냐? 일본에 큰 지진이 났는데, 지진이 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화가 났다는 의미이다.

 

지구는 참 아름답다. 산천초목이 다 아름답다. 사람을 보면 밉고 곱고 간에 참 아름답다. 하나님의 최고의 솜씨가 사람이다. 최고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게 인간이라는 존재다. 인간이 그러니 하나님은 더 신비롭겠다.

 

어쨌든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실존적인 분이시지 상상속의 존재가 아니다. 지구의 표면적인 것은 현상적이다. 실상적 존재는 자기 속에 따로 있다. 그 자기를 알고 살면 사람이 사는 게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다. 이렇게 되면 어떤 정신적 쓰나미가 자기에게 닥쳐오더라도 파도를 타고 넘어가듯이 넘어가서 신이 날 텐데 그게 아니라 작은 사건이 하나만 와도 나 죽겠네한다면 그 사람이 사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예수 믿는 것은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인생살이를 살맛나게 만드는 게 들어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자기의 기존지식대로 사는 맛을 내려고 하니 세상이 그렇게 따라주더냐? 인간이 참 인간이 되어갈수록 그만큼 행복하고 기쁜 것이다.

 

우리는 출생에서부터 공동묘지를 향해서 가고 있다. 네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네가 긍정을 하던 부정을 하면 너는 하나님의 주권섭리 속에, 시간 속에, 세월 속에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공기를 마셔야 살 수가 있으니 그게 하나님의 덕으로 사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세상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 당신처럼 참 온전자가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내가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는 이 뜻은 나를 만들기 전에, 세상을 만들기 전에, 만물을 만들기 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당신의 의중의 의지세계에서 이미 설정이 된 것이다. 그런 자기 존재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자기의 존재성에 대해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인간 자기는 세상만물 중에 하나가 아니라 특수 창조물이다. 특별한 뜻이 있어서 인간 자기를 만들어 놨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특수적인 존재이니 그 특수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이 밥 먹고 짐승처럼 사는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공부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어떻게 그렇게 살겠느냐?

 

보통이 좋으냐, 특수가 좋으냐? 특수가 좋은 거다. 나는 보통사람이 아니다. 특수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세상 밑으로 들어가서 세상의 다스림을 받지만 성경 창세기에 보면 믿는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게 돼 있다. 그런 자기 존재다. 그러나 성경을 못 깨달으면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 밑에 들어가서 노예로 살게 돼 있다.

 

세상은 자기 소원 목적대로 사람을 써먹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의 속성적 차원으로 올린다. 이게 예수 믿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세상을 만들어 놓은 하나님이 세상 밑에 들어가서 살겠느냐?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을 만들어 놓고 그 세상을 바라보면서 징징 짜고 울었느냐? ‘좋았더라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도 성경말씀을 깨닫고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려 나가는 게 예수 잘 믿는 거다. 이런 사람은 가는 곳곳마다에서 다른 사람들은 징징 짜고 울어도 자기는 그런 것을 척척 해결해 나가니 힘이 나고 즐겁고 기쁘고, 그러면서 또 깨달아 나가니 한 수 위로 더 올라가고 하는 거다. 그러니 얼마나 살맛나는 세상이냐?

 

사람이 죽는다는 게 어떤 면에서 보면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서서히 죽어간다면 고통스럽겠지만 그러나 핵폭탄이 터져서 순간적으로 죽어서 천국에 올라간다면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죽는 게 겁이 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내가 천국에 올라갈 때 예를 들면 천국의 입구에 척 들어서면서 아버지하고 들어가려는데 하나님이 문지기에게 미리 그 놈이 입구에 들어서면 밀어내라해서 문지기가 나를 안 맞아들일까봐 나는 겁이 난다. ‘우리교인들이 죽으면 다 천국에서 맞아줄까하는 생각도 된다.

 

우주만물을 만들기 전에 내가 존귀케 되는 이것이 하나님 당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설정이 돼 있었다. 우리를 인격자로 만들어 놓으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치판단을 평가를 하고 비교를 해서 힘을 써야 만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이미 설정해 놓은 대로의 사람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 들어있다. 그래서 자기를 인격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려면 신앙적인 면에서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다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 적도 알고, 형체도 알고, 색깔도 알고, 행동도 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깨어있다는 뜻은 이룰구원으로 선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집주인이 언제 어느 때 갑자기 나타나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하는 숨바꼭질을 할 때 술래가 벽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할 때 아이들이 눈을 감은 그 순간에 술래에게 달려와서 술래의 손을 잡는 거다. 그러나 술래의 시선이 늘 아이들 쪽으로 돼 있으면 아이들이 술래 쪽으로 뛰어나오지를 않는다. 그런 것처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준비가 잘 돼 있으면 예수님이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오셔도 상관이 없는 거다. 밤에 오시던 낮에 오시던 상관이 없다. 이게 신앙이 깨어있는 거다. 그 신앙 믿음이 항상 밝게 깨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도둑놈인지 예수님인지 안다.

 

그런데 현실에서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사건을 붙잡고 나를 찾아 오셨는데도 누가 찾아왔는지를 모른다. 갈릴리 바다에서도 그 풍랑의 사건의 배후에 주님이 오시는 건데도 제자들이 그 주님을 못 알아보니, 알지를 못하니 그 예수님을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으로만 알았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사건이 닥쳐오면 그 사건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으로만 알지 그 사건 저 너머에서 주님께서 나를 만나자고 그 사건을 주권적으로 잡고 오시는 그걸 모르고 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과 인격적으로 결합이 되면 그 사건의 풍랑 가운데서도 기쁠 텐데 그걸 모르니 그 사건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것으로 알아서 두려워 떠는 것이다. 진정한 기쁨은 마음 가운데서 나온다. 진정한 눈물도 마음 가운데서 나는 거다.

 

사건을 만날 때 이렇게 깨닫는 것이 영적으로 깨닫는 건데, 보통은 그러지를 못하고 자기 몸 밖의 크고 작은 사건 자체에 신경을 쓰고 눈물을 흘리느라고 머리가 희어진다. 그만큼 약한 거다. 신앙의 깨달음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니 세상을 살면서 늘 신경을 쓴다는 게 자기 몸 밖의 것에 기준을 놓고, 그 면에 이해타산을 놓고 그 면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걸 예수 믿는 걸로 알고 있으니 이거는 껍데기다. 그런 세월을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말씀으로 인격화 되고 자체화 되어서 모든 거짓된 가르침들을 분별하고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거룩성으로 성장 확장되는 것이 깨어있는 사람이다.

 

거짓된 가르침이 있다. 사람도 거짓된 사람이 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세상적이고 물질적이요 임시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을 아무리 종교적으로 합리화 시켜도 그건 거짓된 가르침이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아무리 진짜다. 참이다. 진실하다해도 하나님의 본질에 놓고 보면 그 사람은 거짓된 사람이다. 거짓된 지식이 들어가면,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그 사람은 잘못돼 있는 거다.

 

이방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돌 앞이나 부처 앞에서 빌 때 목욕도 하고 정성을 다해서 비는 것이다. 그냥 대강 하는 게 아니다. 얼마나 정성을 드리는지 달이 떠오를 때 천 번을 절을 하다가 무릎에 병이 생긴다. 그러니까 그만큼 정성이고 마음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걸 누가 옆에서 볼 때도 저렇게 지성을 다하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왜 안 들어주겠느냐할 정도이지만, 그러나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는 당신의 기준에 맞아야 진짜로 인정을 하시고, 거기에 안 맞는 건 사망이요 가짜요 헛된 거고 형벌이고 심판이다.

 

이방 신을 믿는 사람들은 무릎 뼈가 닳도록 절을 해도 믿는다는 그 정신이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러냐? 천 번을 절을 한 그 행동이 잘못된 것이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지식이 잘못된 것이냐? 그 지식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지식에 놓고 보면 이건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 세상공부는 아무리 많이 해도 눈에 안 보이는 인격적인 면에서 사람이 망가져 들어간다. 인격이 망가져 들어간다. 인격 면에서 하나님 쪽으로 성장이 돼야, 안 죽는 인격으로 성장이 돼야 하겠는데 세상공부에는 그게 없기 때문에 전부는 죽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평생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건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해서 이걸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모든 가르침을 다 분별하고 그것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먹고 마시고 돈이고 이게 다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 쪽으로 적중성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마음과 정신이 자꾸 밖으로 세상 쪽을 쳐다보고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마음과 정신이 이런 세상 것들을 쫓아가면 그 사람은 못 쓰게 된다.

 

사람의 정신이 기둥처럼 정확하게 바로 세워지려면 기초가 단단한 곳에 세워져야 한다.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사람을 세우는 기둥이 아닌 썩어빠진 기둥에 세웠다면 세월이 가고 나이가 먹어갈수록 사람이 망가진다. 우리는 그걸 빼야 한다. 그걸 두고서는 그 위에 집을 못 짓는 것이다. 신앙의 원리가, 예수 믿는 원리가 그렇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근본적으로 타락된 자기의 지식은 다 내버리고 하나님의 지식을 넣어야 그게 옳은 거다. 그래야 자기의 정신과 사상이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져 가는 거다. 이렇게 만들어져 가는데 있어서 재료도 하나님의 것으로, 기둥도 하나님의 것으로. 그런데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세상 식으로 믿어놓으면 이건 세상 기둥들이고 전부는 불타질 것들이다. 교회에서부터 가르침이 잘못돼 놓으면 예수를 믿고도, 천 일 만 일 제단을 쌓고도 너는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에 죽는 거다.

 

집을 지어놔도 설계대로 안 지으면 시청에서 와서 부순다. 사람이 그 안에서 살다가 그 집이 무너져서 상하지 않게 하려고 새 집이라도 무너뜨린다. 그러니 그걸 짓느라고 시간 들어가고, 돈 들어가고, 노력 들어가고 한 걸 생각해 봐라.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허망하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느냐? 미래적으로 허망한 그걸 우리로 미리 보게 해서 깨닫게 해서 헛 살지 않고 헛 믿지 않도록 가르쳐 주는 게 목회자이다.

 

신앙 면에서 영적으로 깨어있지를 못하면 즉, 신앙 면에서 졸고 있거나 자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자는 자기를 누가 들고 가든지, 업고 가든지, 통속에 넣어가던지 자기를 통째로 들고 간다. 사람이 깨닫지 못한 상태로 있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똑똑타 해도 허점투성이이다. 세상의 어떤 정신이, 세상의 어떤 속화된 바람이 와서 그런 너를 데리고 갈 수 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