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궁극이 | 2022.07.11 09:49:5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1:29-31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29-31: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자마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며 당장 예수님을 증거했다. 세상 죄를 누가 책임졌느냐? 어린양이다. 어린양이란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거다. 그러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느냐? 말하자면 십자가가 아닌 물에 빠져 죽으면 안 되는 거냐? 십자가는 죄인이 죽는 상징이다. 이 상징 속에는 실상이 들어 있다. 믿는 사람은 이 실상을 인격적으로 깊이 느껴야 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15절에 보면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라고 했는데,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말한다.

 

세례요한은 주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나보다 먼저라는 말은 누가 누구보다 세상에 먼저 태어났다네. 시간적 존재적으로 누가 먼저 있었다네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서부터 존재적으로 실상세계인 천국에서 영원 무궁히 계신다는 면에서 먼저라는 거다. 즉 시간을 초월하고 장소를 초월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심을 염두에 두고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라고 한 거다.

 

연대적 가견적 역사적으로 보면 석가나 공자는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다. 그러면 한국사람 중에 석가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없었느냐?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시간적인 것을 가지고 예수님보다 불교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참 종교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고, 또한 삼라만상을 만들기 전에 먼저 계셨고, 세상 모든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계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모든 창조물의 생태계와 일 년 열두 달 사계절이 돌아가는 것 등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로 통해 설계를 하신 거다. 성경에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하는 것은 무에서 유로 만들었다는 것만 아니라 선재적 그리스도로 통해 인간 나의 구원을 위한 계획을 과학적 이치적으로 빈틈없이 만들어 놨다는 거다. 한 마디로 세상만물 속에 우리의 구원도리와 이치를 숨겨놓았으니 이것을 그리스도로 통해 발견해서 구원을 이루라는 거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즉 구원목적을 가르쳐 주느냐? :에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이걸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세상을 자랑하고 교인들이 세상을 구하는 것은 이걸 가르치지 않고 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사람은 마음이 깊은 사람과 얕은 사람이 있고, 즉 깊이 생각을 하는 사람과 얕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마음이 깊은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지만 마음이 얕은 사람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자기 편리대로 생각을 한다. 이런 사람은 궁극적인 구원계획을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예수님께서 당신보다 6개월 먼저 세례요한을 보내심은 세상 것을 소개하고 자랑하라고 보낸 거냐? 아니다. 성경을 들고 땅과 세상 것을 가르치는 자는 주님이 보낸 종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목사라. 박사라할지라도 성경으로 보면 주님이 보낸 종이 아니다.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나도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세례요한이 주님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주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례를 주느냐? 본문에는 없지만 성경의 다른 곳에는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사자가 그 부모에게 나타나서 요한이 날 것에 대한 전갈이나, 제사장 가문으로서 어떻게 키울 것 등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가정에서 신앙으로 자란 요한이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 분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마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 나선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주라고 시키지도 않았고 제사장들이 시킨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세례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게 믿어지는 것은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에 적중된 광야생활을 하고 있었고, 엘리야와 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례요한처럼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회개의 세례운동을 하는 자에게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이 된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는 거다.

 

회개의 세례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성령님의 감화로 되는 건데,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와 엘리야와 같은 감화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지적한다. 우리가 세상만물을 주님을 기준해서, 즉 자타의 구원에 목적을 두고 이용 사용 활용을 할 때 일반 도덕성적으로 좋게 보이기도 하고 좋지 않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반 도덕성을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다. 어쨌든 사람이 회개가 잘 되면 나타나는 면도 그 도덕성이 고상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인간세상에서 아무리 공자의 도덕성을 배웠다고 해도 이 도덕성은 하나님 앞에 회개가 된 사람의 도덕성을 못 따라온다.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었을 거고, 외국에까지 나가서 학위를 따고 온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가 됐느냐? 하나님 앞에 회개가 된 도덕성을 가지지 못했고, 인격적으로 거듭나지 못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이걸 지적할 수 있는 거다.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어도 회개가 안 된 사람은 하나님의 도덕성을 가지지 못했고, 인격적으로 거듭나지도 못했다. 반면에 회개가 된 사람은 세상을 자기 등 뒤로 던지고 천국을 바라보며 산다. 이 사람의 도덕성은 신령성이요 신적인 것이라서 세상에는 이 도덕성을 능가하는 도덕성이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인격적으로 거듭나지 못했으면 그 도덕성이 회개된 사람을 못 따라온다.

 

국가적으로도 이룰구원을 주격으로 한 제사장의 나라가 된다면 이런 나라가 핵폭탄을 만들겠느냐? 핵폭탄 대신 뭘 준비하겠느냐? 제사장의 나라는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자가 배후다. 시편에도 보면 다윗을 앞서 가서 싸우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게 믿어지느냐? 예수 믿는 자기 뒤에 만군이 버티는 자가 되어야 하겠는데 마귀 떼가 배후에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믿는 우리는 자기의 신분과 위치와 속성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지금도 천국복음의 본질을 가진 자는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맞을 준비를 시킨다. 성도들로 하여금 이치를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막힌 것을 헐어서 하나님과 밀착이 되게 한다. 설교 속에는 이런 양면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예수 믿어서 부자가 되라는 소리는 마귀의 소리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만드는 거다. 교회의 메시지 속에는 물질이 끼어들면 안 된다. 백성들의 마음밭이 옥토가 될 수 있도록 돌과 잡초를 알려줘서 주님의 역사가 신속 정확하게 임할 수 있게 하는 게 회개의 세례다. 이 일을 하는 자에게는 성령님의 감화가 있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기까지를 대강 살펴보면, 먼저 세례요한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하며 드러내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주의 일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다라고 하고서 세례요한 자신의 모습은 사라진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골곡이 심하고 비뚤거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바르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역할이다.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오는 그 분에 대해 나는 그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라고 했다. 그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례요한은 감히 그 분의 신발 끈을 풀 존재도 못 된다는 게 아니라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정 계획 설계가 있는데, 세례요한은 이럴 능력이나 지혜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세례요한이 자기에게 나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고 백성들에게 알렸는데, 둘이 만나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통성명을 한 게 아닌데도 어떻게 보자마자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개를 했을까?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는 거지 인간의 이성적 생각으로는 불가능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은 믿는 사람이 자기의 위치와 신분에 따라 사명을 다할 때 이 사람에게 구속의 주가 오신다는 거다. 사실 주님이 이런 종에게 가셔야 이 사람이 구속의 주로 오신 당신의 오심을 헛되게 하지 않는다. 만일 주님이 당신을 소개하라고 한 사람이 거짓 종이라서 돈이나 떼어먹고 달아나고, 세상을 가르친다면 주님의 얼굴이 뭐가 되겠느냐?

 

그러면 가룟유다는 어떤 경우냐? 예수님께서 가룟유다가 어떤 자일 줄을 몰라서 당신의 제자로 부른 게 아니라 가룟유다처럼 돈에 욕심이 많은 나를 불러서 돈을 좋아하면 그 결과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가룟유다 자신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깨닫고 바로 서야 하는 거고, 아울러 가룟유다로 통해 보여줘서 우리를 당신처럼 천국의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뜻으로 가룟유다를 부르신 거다. 우리가 그 분의 의도성을 모른 채 말을 하게 되면 주님을 멍청이로 만들어 놓는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바로 자기가 가룟유다임을 모른 채 가룟유다를 향해 스승을 판 배신자라고 하며 손가락질을 하고, 주님은 이런 가룟유다를 알아보지 못해서 당신의 제자로 삼았다가 배신을 당하고 망신을 당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으니 말씀 속에서 주님의 의도성을 모르면 주님을 바보로 만들어 놓게 되는 거다.

 

말세가 되면 거짓 종이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간단히 말하면 참 종은 세상을 등지고 있다. 그래서 몸은 도시 안에 살더라도 이 사람의 정신은 광야에서 산다. 도시에 살아도 도시에 의지하지 않는다. 즉 오직 주님만 바라본다. 반면에 거짓 종은 세상에 등을 기댄다. 이 안에는 자기의 노후대책이 들어 있다.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영원 전서부터 계신 분이라는 거다. 이 분은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셨다.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다. 여기서 회개란 세상의 일반 사회 윤리 도덕적인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서 이탈해서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니 이런 정신과 사상으로 살던 삶에서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며 인간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소원 목적대로, 진리본질로,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 살겠다고 각오와 결심을 하고, 실질적으로 인격적으로 이렇게 사는 게 회개다.

 

이게 본질적인 회개인데, 이 회개가 되면 그 다음에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하는 등의 잘잘한 것은 살아가면서 고쳐지게 된다. 선악과를 계속 먹으면서 이런 걸 고치려고 하면 자기의 근본이 세상적이요 죄악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쳐지지를 않지만 생명과를 먹으면 이런 걸 고치는 건 쉽다.

 

저울이 기준점이 틀어져 있으면 이 저울에 어떤 물건을 달아도 정확한 무게를 알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근본 목적인 구원에 적중되지 않는 모든 언행심사는 어떤 면으로 해도 하나님의 온전에 도달이 안 된다. 그러니 이건 예수를 헛 믿는 거다. 이런 상태로 열심을 내게 되면 헛 믿는 것에 노력을 투자하고, 헛 믿는 것에 시간을 보내고, 헛 믿는 것에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고, 헛 믿는 것에 자기 재산을 투자하고, 헛 믿는 것에 자기 목숨을 바치게 된다.

 

기독교는 이런 게 아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바로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게 예수를 잘 믿는 거다. 이건 없이 어떤 일에 충성봉사하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잘못된 거다. 바른 깨달음에서 나오는 모든 활동은 정상이지만 잘못된 깨달음에서 하는 것은 네가 망한다. 하나님의 기준에 안 맞는 충성봉사를 한다면 이게 누구 앞에 충성봉사냐? 마귀 앞에 충성봉사가 된다.

 

우리의 이룰구원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일터나 가정생활에서 되어지는 거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전부 이룰구원으로 들어가려면 깨달음이 밝아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하고, 모든 면에서 사람이 바로 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이런 게 없이 전부가 물질 이해타산으로 들어가 있다. 이런 삶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에서 벗어난 삶인데 세상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원리적으로 틀어진 것을 모른다.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 세상 어디에 천국이 있겠느냐? 천국을 잃어버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천국을 만들자고 하는 게 물질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 인간인데, 불신자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과 세상 것에 소원 목적을 하며 산다면 이 사람은 회개가 될 수 없다. 회개가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다.

 

오늘날 교회가 바른 회개를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을 소원 목적하면서 일반적인 윤리 도덕적인 죄를 지으면 이에 대해 열심히 회개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을 가진 게 없이, 하나님의 기준이 없이 어떻게 바른 회개가 되느냐? 모르는 상태에서 회개를 하면 어떤 식으로 회개를 하겠느냐? 정답을 모르는데 어떻게 틀린 답을 아느냐? 옳은 이치를 알아야, 기준을 알아야 바로 서는 거지 기준을 모르는데 어떻게 바로 되겠느냐? 그러니 죽어도 회개가 안 된다. 이건 참 회개를 모르는 거다. 이건 회개가 아니라 일반 도덕적인 차원의 반성일 뿐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갈 때 참 회개를 할 수 있고, 바른 회개를 해야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오신다. 이게 회개의 세례의 질이다. 질이 바로 들어가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쉽게 만나게 되고, 자기가 변화가 된다. 주님이 자기 속에서 말씀을 붙잡고 이 역사를 하신다. 성령님의 역사다. 회개의 세례로 자기 속에 주님께서 인격적 결합적으로 들어와서 역사를 하시면 주님의 성품으로 변화된 자기가 드러나게 된다. 교회가 이걸 모르면 하나님의 본질로 온전케 되는 게 아니라 불타질 세상 것을 붙잡고 살면서 마귀 짓을 하게 된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당신의 옳은 종들은 다 이런 일을 하고 갔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설교가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본질에서 이탈이 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으면 재앙이고, 형벌이고, 충성봉사를 해도 헛 수고가 되고, 헛 믿고 가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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