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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116 추천 수 0 2021.11.24 10: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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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1:23-30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123-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이 말씀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23-26: 인간 자기를 지으신 방편이야 부정모혈로 어머니 태로 해서 나온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것이니 인간 자기는 하나님의 모형과 형상을 닮았다. 인격적인 면에서나 지식적인 면에서나 가치판단을 따지는 면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대표인데,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대표가 있는 거다. 국가적 대표, 사회적 대표, 부분마다 직장마다 대표가 있는 거다. 대표를 무시하면 안 된다. 문제는 어떤 자가 대표냐?’ 하는 게 문제다. 체육계에서 실력 없는 사람을 국가의 대표로 세워서 뛰게 하면 국가망신이 되고, 더더군다나 도덕성이 문제가 돼서 약물을 먹었다네한다면 얼마나 망신인가?

 

인류의 대표설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직접 만들었고 당신의 입김을 인간의 코에 불어 넣었다고 했는데, 이는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하는 뜻이 들어 있는 거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건 안 믿건 하나님의 입김으로 살아야 하는데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건데 그게 아니라 우릿간의 돼지처럼 먹고 마시고 배 부르는 쪽으로 자꾸 마음이 정신이 소원 목적이 가서 있다. 이건 인간이 참 사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성경대로 보면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죄 아래 사는 것이다. 마귀가 인간을 이겼으니까 인간이 마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 말이 인간들이 정치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믿고 안 믿고 간에 자기 머릿속에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해야 되겠다고 하는 세상의 차원으로 들어가 있으면 이거는 마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가 위로 달린 것은 그 이치가 너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머리를 들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18년 동안 허리가 굽어져서 도무지 펴지 못하는 여인이 있었다. 땅만 쳐다보고 사니 허리가 얼마나 아플까? 그런 것처럼 땅을 소원 목적하고 사니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들까? 이건 정신면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이 그 여자를 일으킨다. 허리를 펴게 만든다. 소원 목적이 위로 향하게 했다.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신 원인 동기 목적을 바로 찾아서 사람답게 살게 됐다.

 

사람이 땅만 쳐다보면 걱정 근심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오늘 먹었느냐? 그러면 내일을 걱정하게 되고, 내일 먹었느냐? 그러면 모레를 걱정하게 된다. 그 사고방식이 펴지를 못한다. 이게 죄 아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지하고 지배하라고 했는데 생명과를 먹어야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과이신 예수님의 교훈을 먹어야 사람이 자유롭게 되고 환경을 지배 통치 하겠는데 오히려 환경에 지배를 받고 있으니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느냐?

 

자기 머리 위에 세상이라고 하는 물질을 올려놓으면 처음엔 가벼운 것 같으나 갈수록 점점 더 무겁다. 힘이 든다. 짐에 욕심이 많은 사람은 가령 고구마를 탁 이면 처음엔 이거 별 거 아닌데하지만 가면 갈수록 머리 밑이 불이 나고 입이 다물어지면서 고개가 자라목처럼 기어 들어가게 된다. 한 발짝도 못 띠게 된다. 세상욕심이 그렇다.

 

무거운 걸 짊어졌느냐? 일반 이치적으로 자주 쉬어라. 무거운 것일수록 그렇다. 그래야 목적지에 갈 수가 있다. 그러지를 않고 짊어지고 십리 길을 가야지?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느냐? 처음엔 가볍지만 갈수록 발가락이 빠지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못 간다.

 

우리 인간이 예수 믿는 것도 지혜롭게 믿고 세상살이도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데, 욕심이 자기를 죽인다. 세상을 소원 목적을 하고 있으니 그게 자기를 죽인다. 그러면 네 머리는 썩는다. 사람이 머리가 하나님의 머리를 닮아야 신령한 것으로 생산이 되는 건데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썩은 것으로 들어가 있으니 이해타산 평가적으로 네 머리는 썩는다. 이러면 사람노릇을 못한다. 고상해지지 못하고 저질이 된다. 이치적으로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안 그렇다가 아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방법은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면 된다. 만물 위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데 만물 밑에 들어가서 다스림을 받고 있으니 힘들게 사는구나. 예수 믿는 것은 이치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무조건 세상을 향한 자기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면 사람이 못 쓰게 된다.

 

교회를 찾아가더라도 진리이치의 말씀이치의 생명수가 없는 곳은 절대로 가지를 말아라. 왜 그러냐? 그곳은 귀신들의 집단지요 서식처이다. 그곳에 가면 모든 귀신들을 다 만날 수 있다. 귀신은 눈에 안 보이지만 하는 짓을 보아서 사람이 귀신들린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날 때부터 도둑인 사람이 있느냐? 남의 물건을 훔치는 정신이 들어가 있으면 도둑이 된다. 도둑이 자기처럼 다 인간이지 나는 도둑이다라고 써놓는 것도 아니고, 이마에 표시를 해 놓는 것도 아니다. 너랑 나랑 같이 다 밥 먹고 한다.

 

그 다음에 남의 마음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다. 예수 믿는 교회 안에서 겉으로 보면 다 교인이고 성경 들고 다니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의 정신이 세상 것으로 잔뜩 소원 목적을 갖고 있으면 이거는 세상이다. 이런 사람은 정신이 소원 목적이 자꾸 세상 것을 쳐다보고 욕심을 내고 가지러 가려고 한다. 마귀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예수를 열심히 믿으라고 하는데 그 열심히 믿는 것을 충성봉사를 잘 하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예를 들면 학교에서 선생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공식은 안 가르쳐주고 학생들에게 자꾸 공부 잘 하라고 칠판을 두드리고, 시험을 쳐서 점수가 안 오른다고 두들겨 패면 공부가 잘 해 지겠느냐? 시험을 치는 것은 평소에 어떻게 가르침을 받았느냐?’ 해서 시험을 치는 것이다. 시험을 치면 실력이 나오는 것이다. 같은 시간에 같이 공부를 했는데도 시험을 치니 실력이 다르다. 그런 것처럼 교회에 다니며 같이 예수를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사건을 줘서 시험을 치니까 신앙의 점수가 나오는 게 다르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언제고 시험을 치자고 해도 상관이 없다. 100점이니까. 예수를 믿는 것도 똑바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어떤 시험을 주더라도 100점이 나올 텐데 맨날 세상을 꿈꾸고 세상을 소원 목적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시험을 치니까 즉, 사건을 주니까 넘어지고 자빠지고 울고 있고 성질을 부리고 세상 못 살겠다고 하고 한탄을 하고 내 팔자야하고 있으니 시험에 합격이 되겠느냐?

 

어떤 사람은 같은 사건인데도 잘 이겨나가고 해결해 나가고 사람이 넘어지지를 않는데 자기는 넘어져서 그렇게 돼 있으니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도 얼마나 한심할까? 마귀가 볼 때도 얼마나 한심할까?

 

교회라고 해서, 십자가를 붙였다고 해서 다 교회로 보면 안 된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 나와야 하고, 그러니까 교회라 하면 옳은 면을 전제로 하고 볼 때 진리가 있어야 하고, 종이 있어야 하고, 교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인데 설교를 하는 메시지가 진리이치가 없으면 이거는 귀신들의 처소요 집단지요 서식처다.

 

이런 곳에서는 모든 귀신들린 사람을 다 만날 수 있다. 어떤 귀신이 들린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성경에는 예언 방언이 있다. 이것과 오늘날 흔히들 알고 있는 예언 방언을 하는 것과는 뜻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보면 예언귀신이 방언귀신이 안수귀신이 참 많다. 눈을 까서 뒤집는 귀신도 많고, 불에도 물에도 잘 넘어지게 하는 귀신도 많다. 먹고 토하고 토한 것을 또 먹는 귀신도 있고, 날마다 금식령을 내리는 귀신도 있고, 집을 잘 뛰쳐나가는 귀신도 있고, 장풍을 잘 날리는 귀신도 있고, 잠을 안 자는 귀신도 있다. 그리고 사명감을 가진 귀신도 있고, 허풍을 떠는 귀신도 있다. 사람을 통해서 귀신이 그런 짓을 하는 거다. 또 성경에 보니까 더러운 귀신도 있고, 벙어리 귀신도 있고, 귀머거리 귀신도 있고, 큰 소리를 잘 지르는 귀신도 있고, 악한 귀신, 흉악한 귀신, 날마다 공동묘지에 사는 귀신도 있다.

 

이게 인간의 말로 표현을 하니까 그런 귀신도 있는가?’ 하겠지만 아니다. 이걸 영의 눈으로 보고 영적인 면으로 해석을 하면 사람 속에 그런 성질들이 다 들어 있다. 도대체 아무 것도 안 하고 먹기만 하는 귀신도 있다. 집에 잠시라도 있지를 못하고 나가서 돌아다니는 귀신도 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게 다 제 정신이 아니다. 제 정신이 아니게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순간적으로도 네가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그렇게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귀신은 그 사람의 정신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다. 사업이 안 되니까 자꾸 점쟁이에게 가서 묻고 하니 점쟁이가 그 사람을 자기의 졸병을 삼는다. 그러니까 그 옆에 있으면 그게 옮는 거다. 그러다가 점쟁이가 되는 거다. 그러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느냐? 제대로 안 돌아간다. 자녀교육이 바로 안 된다. 가정파탄이 된다. 이 외에도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 생명수 하나님의 말씀이치가 있는 곳에 가만있지를 못한다. 다른 데서 늘 펄펄 뛰고 하던 버릇이 있어서 뭐라도 해야 잠도 안 오고 하는 건데 그건 없이 진리 이치적으로 자꾸 말을 하니까 못 알아듣는다. 성령을 받았다면 왜 못 알아 듣느냐? 성령이 귀머거리인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이걸 좋게 말하면 유치원생들에게 대학공부를 강의를 하면 알아 듣겠느냐?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못 알아 듣는다. 그런 식이다. 세상학문의 차원도 그런데 신앙 면에서도 차원이 다르다.

 

신비주의 교회, ‘복 복하는 구복주의 교회, 사회에 봉사하는 사회주의 교회, 나라를 구하자고 하는 구국주의 교회, 현세주의 교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자기들의 거기에다 꽂아댄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은 없어진다. 성경구절을 들고 자꾸 어느 한 목적에 붙인다. 그게 이단자들이 하는 짓이다.

 

성경의 이치가 없이 돌아가면 감정이 된다. 이러면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자꾸 교회에 가서 눈물만 빼려고 하고, 사람의 마음에 세상바람을 넣어서 흥분을 일으키고, 그걸 은혜를 받았다고 하게 된다. 그렇게 예수님을 수십 년을 믿어도 얻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 있는 데는 분위기부터가 자기에게 안 맞는다. 하나님의 말씀이치에 의해 깨달아져서 자기의 더럽고 세상적 육적 타락된 사고방식이 씻겨지면 사람이 거룩해지고 고상해지고 사람의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밝아지고 자유롭게 될 텐데 그렇게는 생각이 안 들어가고 진리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에 안 들어서 속에서부터 뒤틀려 올라온다. 그러니까 몸부림을 치고 비비 꼬고 책장을 넘기고 시계를 쳐다보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집중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 다스림이 안 된다.

 

자기를 못 다스리면서도 남을 다스리려고 이러쿵저러쿵하며 돌아가니 그게 어떻게 다스려 지겠느냐? 이런 사람들은 기도원 같은 데나 그런 집회에 가서 한이 풀리는 푸닥거리를 한 번 해야 시원해진다.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는 물이 없는 곳을 찾는다. 귀신은 눈에 안 보이지만 그러나 사람이 귀신이 들려놓으면 일반적으로도 정상적인 삶이 안 된다. 그런 것처럼 말씀의 이치의 눈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일반적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신앙의 질이 정상이 아닌 것도 있다.

 

영은 영으로써 분별을 해 들어가야지 영의 눈을 가지고 육만 분별을 한다면 그거야 육의 눈을 가지고도 분별해 들어가는 것이다. 영은 영으로써 분별하는 거다. , ‘예수 믿는 사람들의 그 정신의 질과 향방과 그 성질과 이해타산이 어디에 가서 붙었느냐를 본다.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도 이치적으로 그걸 느껴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귀신이 왜 그 사람에게서 나갔을까? 사람 자기가 자기 속에 든 귀신을 보고 귀신아, 나에게서 나가라해서 나간 것이냐? 자기 속에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귀신의 성질로 주격이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귀신아, 나가라는 소리도 못하는 거다.

 

그리고 귀신이 스스로 나갔느냐? 스스로는 나가지를 못한다. 나가는 경우라면 그 사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 나도 이제 바로 믿어야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나 하면 귀신이 혹 나갈 수 있다. 아니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이 자기 속에 들어오자마자 쫓겨나간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말이 아니라 자기 속에 영접이 되면 자기 속에 들어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닌 질을 갈아치운다. 세상정신은 쫓겨나간다. 반드시 그렇게 돼 있다. 사람이 옳은 이치를 듣게 되면 옳은 이치의 지식에 의해서 아닌 것은 나가게 돼 있다. 논에 구정물이 있을 때 그 물을 스스로 빼기가 힘들다. 위에서 맑은 물을 계속 보내면 구정물이 내려가 버린다. 이치가 그런 것처럼 더러운 귀신이 나갔는데, 깨끗한 것이 들어오면 귀신은 나가게 돼 있다. 하나님의 것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것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 것은 더러운 것이므로 나가게 돼 있다. 옳은 지식이 들어오면 세상 더러운 지식은 나가게 돼 있다.

 

이 더러운 귀신이 나가서 물이 없는 곳에서 쉬려고 하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다 물이 있고 물이 없는 곳이 없다. 이게 지금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말씀을 들을 때 귀신이 두 번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령한 물을 채워야지하는 결심이 들어가야 한다. 내가 인간이라면 인간을 바로 알아야지. 내가 인간인데 나를 모르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데 어떻게 내 몸 밖에 있는 세상을 알 수가 있겠느냐? 모르는 거다.

 

그런데 본문의 사람은 아마 뭘 모르는 모양이다. 귀신이 든 사람이던 교회이던 귀신이 들어가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고 돌아다녔지만 재미도 없고 다리도 아프고 별 볼일도 없다. 그래서 옛 정을 생각해서 그 전에 자기가 있었던 집에 돌아와서 집 주인을 아무리 찾아도 집 주인은 안 보이고 청소가 잘 돼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리모델링이 잘 돼 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전에 그 집에 있을 때 주인이 목욕탕에 물을 채워놓고 수시로 목욕을 하는 꼴이 보기가 싫어서 그 집을 나갔는데 이제 다시 와서 보니까 집을 리모델링을 해서 목욕탕이 없다. 귀신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리모델링이 잘 돼 있다. 그래서 얼씨구나. 좋구나하면서 다시 그 집에 들어온 것이다.

 

더러운 귀신은 신령한 물만 봐도 엄청나게 싫어한다. 깨끗한 물을 보면 되게 싫어한다. 이게 지금 비유적으로 들어가 있는 말이다. 진리이치는 깨달을수록 이치가 나오는 거고 씹을수록 맛이 나오는 건데 마음바탕에 귀신의 성질적 요소가 들어 있으면 그게 재미가 없는 거다. 손짓 발짓을 하고 춤을 추고 몸으로 이상한 짓을 해야 신이 난다.

 

바퀴벌레와 빈대는 불만 보이면 싹 숨어버린다. 어두운 걸 좋아한다. 불만 없어지면 자기들의 세상이다. 막 기어 나온다. 그런데 벼룩은 물만 있으면 꼼짝을 못한다. 옆에 물 한 사발만 떠놔도 벼룩은 꼼짝을 못한다. 여기서도 깨달을 게 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전에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자기 혼자 살면 재미가 없으니까 나가서 돌아다니면서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귀신 일곱을 만나서 데려왔는데, 데려오니까 어떻게 뛰고 솟고 잠도 안 자고 잘 노는지? 그러니까 귀신 충만이 된 것이다. 일곱이면 충만을 의미한다.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이런 짓을 많이들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됐느냐? 성경에 보니까 그 사람의 형편이 처음보다 더 악하게 됐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옳은 것을 알았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의 생명수를 부지런히 자기 속에 채워야 하는데 왜 성경을 자기 계획 설계에다 끼워 맞추느냐? 진리본질로 하나님의 말씀의 설계대로 들어가야지, 자기의 신앙 믿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대로 진리 지식적으로 들어가야지 왜 자기 식대로 리모델링을 하느냐 그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왜 자기 식대로 리모델링을 하느냐?

 

목사님이 노숙자를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하면 그 사람이 나가서 자기와 같은 사람을 또 데리고 온다. 가서 또 데리고 오고 하면 집에 가득 차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들을 데려다 앉혀놓고 설교를 하면 잘 듣겠느냐?

 

귀신들린 정신이나 귀신들린 종교인들이 예수님과 반대되는 일을 하고, 진리이치인 신앙의 본질을 무시하고 저주하고, 그런 비진리적인 일에 협조 동참하면서 진리에는 동참 협조가 없고. 개인이던 교회이던 그렇게 되면 인격적으로나 속성적으로나 진리 지식적으로나 주님을 닮아가는 면에서 보면 완전히 낭비의 일생이 되고 만다. 출생으로부터 공동묘지에 가기까지 완전히 낭비적인 인생이다. 자기 존재의 가치와 목적에 구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완전히 다 깨져나간다. 성경에 보면 이걸 패망이요 멸망이요 폐인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의례히 살림이 망했구나. 장사가 망했구나. 내 집이 망했구나하고 보는 거지만 그러나 옳은 신앙의 눈은 사람이 폐인이 되고 사람이 망가진 것을 볼 줄을 안다. 사람이 흥하고 망한 것을 볼 줄 안다. 기독교인이 이걸 볼 줄 모른다면 소경이다.

 

27-28: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어디를 좋아하는 건지, 어디를 싫어하는 건지 잘 아신다. 목사님들도 영의 눈을 가졌다면 그걸 잘 알아야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육적인 소원 목적을 가진 자들이 주축이 돼서 목사님을 초빙하면 거기는 가면 안 된다. 그런데 보통 보면 보는 눈이 없어서 눈에 보이는 조건이 좋으면 그리로 잘 간다.

 

예수님께서 귀신얘기를 한 말씀 끝에 한 여자가 무리 가운데서 큰 소리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했다. 이 소리를 무리들이 다 들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성경역사로 보면 예수님은 신앙심이 고운 마리아로 통해서 나고 길러졌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면 여자가 한 그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하다. 자식이 훌륭하면 어떻게 부모가 저렇게 잘 가르쳤을까?’ 한다. 그러나 자식이 늘 나쁜 짓을 한다면 부모가 어떻게 가르쳤기에 자식이 저 모양일까?’ 하게 된다. 절대적은 아니지만 그러나 무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성경에 부모의 교훈에 따라 후손들에게 많은 사건들이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거는 절대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 다음 것은 이러쿵저러쿵 해석할 필요가 없다. 이러쿵저러쿵 하게 되면 본 목적이 틀어져 나간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이다. ‘지킨다하는 여기에는 생명이 걸려 있다. 목숨을 내건 것이다. 믿는다고 해도 자기 목숨에 위협이 오면 그냥 도망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생명을 내댄다 그 말이다.

 

이제 여자의 말을 비슷한 각도로 생각을 하면 너 언제부터 예수를 믿었느냐?’ 하고 물으면 나는 모태신앙이다하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으로 들리느냐, 복이 없는 사람으로 들리느냐? 복이 있는 사람으로 들린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모태신앙이라고 해도 부모도 자식도 하나님의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된 신앙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사람을 겉으로 보면 신앙이라고 하는데 그 신앙의 질을 보니 , 신앙이 아니로구나하는 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신앙이 아닌 신앙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무리들 가운데서 여자가 큰소리로 그 말을 한 것은 계시적으로 당시의 무리들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부모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에 있어서 큰 깨달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부모가 과연 옳은 신앙자냐? 그러면 참 복이 있다. 그러나 아닌 이질적인 신앙자일 때는 잘못됐다. 그런데 오늘날 그걸 그렇게 보느냐? 모태신앙이라고 하면 무조건 다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는 어떻게 귀신이 들리고 안 들리고 한 정신 사상을 알아보겠느냐? 못 본다.

 

29-30: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알려고 하지를 않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만 구하는 너희들은 말씀의 이면적 영적인 이치는 깨달으려고 하지는 않고 자꾸 눈에 보이는 면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하는 그것을 보려고 하니 그게 악하다. 그러니 너희는 악한 세대다. 악한 족속들아, 너희들에게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

 

불순종의 요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무엇이더냐?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40일만 있으면 그 성이 무너진다고 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고 전도 좀 하고 오너라하니까 내가 왜 우리 백성의 원수 된 나라에 가서 그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하고 슬그머니 도망을 갔다.

 

그러니까 요나가 일어날 때는 그걸 누가 봐도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전도하러 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일어나서 어디로 가느냐? 니느웨로 가지 않고 이왕 가는 것 보물이 풍부한 다시스로, 물질이 풍부한 곳, ‘축복 축복하는 곳에 가서 살면서 하나님께서 날 잊어버릴 때까지 거기에서 살다가 와야지했다.

 

요나가 한 행동을 간단히 보면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다시스의 새파란 바닷물과 꽃을 머리에 꽂고 보석이 박힌 옷을 입고 훌라춤을 추는 다시스의 아가씨들이 눈에 선하다. 행동을 한 그 사상으로 들어가 보면 사상의 질이 그렇다는 것이다.

 

바닷가로 나오니 날씨도 좋지, 바람의 촉감이 좋다. 배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이 느낌을 모르실까? 다 아신다. 하나님은 요나의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아시고 미리 다 준비를 해 놓았다. 그러니까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좋은 준비이지만 그러나 영의 눈을 가지고 미래적으로 보면 너는 얼마 안 가서 고기 뱃속에 들어가겠구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이 기록된 성경을 보니까 이걸 알지만 그런데 자기 신앙의 질이 요나처럼 들어가 있음에도 대부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목사님들은 그걸 미리 보고 당신이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것처럼 꼼짝도 못하게 된다하는 것이 보여져서 그 교훈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걸 못 보면 그런 교훈은 못 나가고, 그런 이치도 안 나가고 예수 믿어 부자 되자하며 팔팔 뛰다가 집에 가게 된다.

 

우리는 진리이치를 가지고, 영의 눈을 가지고 자기의 신앙사상을 구별하고 분별하고, 그 다음에 오늘날 교회에서의 메시지가 돌아가는 그 질을 구별 분별해야 한다. 그게 아닌 양이나 부피 덩어리를 가지고 구별을 하면 바른 것을 못 찾는다. 거짓 종이나 거짓 영이나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돌아가는 상태를 못 본다. 이러면 백 날 말을 해도 일반적인 눈을 가지고 자꾸 사람을 보려고 하지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사람을 보려고 하겠느냐?

 

그러니까 그 때 당시 종교인들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들의 추세가 모든 것을 겉으로만 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단자라고 몰아붙이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죽인 이 자들을 역사가 가만 두었느냐?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보게 됐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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