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궁극이 | 2022.05.02 18:26:3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12:35-40
설교자
김경형 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2장 35절-40절: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시대적인 밤을 알아야 한다. 죄악의 깊은 밤이란 일반적으로 정치가 혼란한 때냐? 물질문명이 퇴보적인 때냐?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 무엇을 염두에 두시고, 어떤 상태를 염두에 두시고 이 말씀을(깨어있어라) 하시는 거냐?

 

졸지 말고 항상 깨어있으라는 걸 오늘날 기독자들이 문자적 개념으로 알아서 철야기도를 하는 자가 있다. 깨어있다는 것은 영적 차원에서 진리이치로 깨우침을 받는 생태가 깨어있는 거다. 깨어있는 상태는 구별이 들어가 있고 분별이 들어가 있다. 존재 속의 성격 성질 성분분별, 기독교 안에서 교회들의, 목사님들의 설교의 흐름의 분별이 들어가 있다. ‘이치가 맞는 거냐’ 하고서.

 

예수님을 믿는 자기가 진리의 깨달음에 서 있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어두운 것이다. 그 다음에 교회적으로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간구하고 추구하는 게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이방인들처럼 들어가 있다면 이는 어두운 밤이다. 시대적 밤이다. 선지자가 없는 때는 어두운 시대다. 말라기 다음에 예수님 오시기 직전까지 400여 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다. 흑암시대다.

 

그런 면을 보면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참 종이 한 명인지, 열 명인지, 백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참 종은 반드시 있지 않을까 한다. 그건 왜 그런가 하니 창:에 보면 노아홍수 때 즉, 인류 제 1차적 종말 때에 노아를 볼 수 있다. 이 노아가 120년간 방주를 지을 동안에 증거를 했다. 또 이스라엘 종교 말년 때도 그랬고, 또 예수님 때도 옳은 종 세례요한이 예수님 앞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 마지막 시대에 재림 직전에 옳은 종이 많지는 않으나 있는 건 사실일 것이다. 종만이 아니라 흰말운동 즉, 주님을 따르는 그 운동에 동참 협조 수종드는 당신의 참 교인들이 있을 것이다. 이게 다 종들이다.

 

진리신앙의 적중적인 노선으로 가는 이게 좁은 길 생명 길이다. 그 외는 다 아니다. ‘지옥 간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자식이 자식노릇을 바로 하는 게 아니라 깡패들과 같이 놀 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귀와 손을 잡고 일을 한다 그 말이다. 그것도 영의 눈을 가지고 볼 때 이게 보이는 거지 육적인 눈을 가지고는 이런 게 안 보이는 거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교회부흥의 개념을 숫자적 개념으로 가지고 있고, 그리고 예수이름으로 사역주의로 들어가 있다. 이게 말세시대의 외식신앙이다.

 

이 외식신앙에는 거짓도 들어있고, 이단자들도 들어있고, 여러 가지 잡신 귀신 악령을 받은 자들이 다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외식신앙은 절간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이방종교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기독교 안에서 귀신들의 마귀들의 온상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신학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신앙의 존재성은 믿고 들어가는 거고, 존재성만 알면 되는 거냐? 아버지의 성품 인격,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최고로 좋은 아버지의 소원에 적중성으로 들어가는지? 신앙적으로 보면 그런 게 있는 거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대에는 그것이 아니라 비진리가 진리인 것처럼 행세를 한다. 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마지막 시대는 그렇게 가가게 돼 있다. 그래서 노아홍수 때도 그랬고, 계:의 거의 마지막에 가서도 말씀을 하는 거지만 말세 때가 되면 종교적 부흥, 종교적인 건설로 치닫게 된다. 보이는 가견적이며 현상적인 소원 목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마지막 시대에 많다. 목사도 많고. 우리는 신앙건설이다. 속사람 건설이다. 없어지지 아니할 전을 건설이다. 이게 성전이다. 이건 불에 안 탄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로 들어가기 전에 사사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가 좋은 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데, 거기에는 법궤도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사람을 불러서 지도자로 세우고 제사장으로 세웠다. 신앙사상 면에서 말세 때가 꼭 그와 같은 현상이다.

 

그런 면을 종합적으로 볼 때 오늘날 기독교가 신앙 질적인 면에서 갈 데까지 다 가는구나. 심지어 목사가 이방 종교인들과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개 교회마다의 신앙의 질을 제일 먼저 살필 수 있는 게 기독교 신문이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거다. 보면 성경의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로 가고 있다. 그래서 ‘어그러지고 패역한 세대여’ 하고 주님의 책망이 들어가는 것이다.

 

죄악의 깊은 밤에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가는 신앙이 생명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 이 길로 바로 믿으려면 암만해도 살아가는데 약간의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왜냐? 시대적 바람이 엄청나게 파도로 밀려오는데 목적지로 향해서 가는 배가 어찌 저항을 안 받겠느냐? 받는 거다. 당연한 거다. 잔잔하게 해 주옵소서? 그건 아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모셨다면 ‘잔잔하게 해 주옵소서’ 그 소리는 안 한다. 왜? 주님이 같이 탔다면 이건 안 빠져 죽는 걸로 완전히 약속이 돼 있는 거다. 그런데 자기의 신앙을 질을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 부딪히면 주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거다.

 

그것도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살 길을 찾아서 가다가 풍랑 파도가 일어나면 그건 물속으로 빠지는 거다. 안 빠진다가 아니라 빠진다. 주님의 긍휼을 입는다면 건져는 놓겠지. 왜 그러냐? 너에게 영원 궁극적 구원이 있기 때문에, 큰 구원이 있기 때문에 잘잘한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보시고 살짝 살짝 잡아주는 것도 있는 거다.

 

세상 마지막이 될수록 신앙의 본질은 모른 채 사역주의로 외식신앙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마지막이 될수록 신앙의 본질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내 가정이 어렵던 부요하던 상관없이, 부하던 가난하던 상관없이 신앙의 본질로 찾아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몸을 바다에 뜬 하나의 배로 비유한다면 큰 풍랑 파도가 일어날 때 그 마음속에서 누구부터 찾겠느냐? 네가 큰 풍랑 파도를 이길 수 있느냐?

 

자기 배 앞으로 풍랑 파도가 올 때 그걸 피하려고 할 때 뱃머리를 파도 옆으로 돌리면 그 배는 전복이 된다. 신앙의 이치도 자기에게 닥쳐오는 파도를 정면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파도를 갈라야 한다. 안 가르면 전복이 되는 거다. 그런데 신앙의 질과 성격을 보면 그만 파도에 겁을 내니 사정없이 엎어지는 거다.

 

자기 몸이 아파 들어갈 때 신앙의 본질을 찾아라. 본질을 찾는 것은 그 사건 상황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 때 주님을 못 만난다면 부자로 살 때 만나지겠느냐? 건강할 때 만나지겠느냐? 건강할 때 못 만났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자기 몸이 최고로 어려울 때 주님을 못 만나면 희망은 없는 거다. 사건을 잡고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자기 신앙을 바로 잡지 못한다면 언제 바로 잡느냐?

 

어부가 풍랑 파도가 일어날 때 배를 모는 자기의 실력을 못 키운다면 잔잔하고 순풍 불 때 실력을 키우느냐? 그건 아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의 이치를 많이 착각을 하고 있다. 세상 마지막이 될수록 신앙의 본질을 모른 채 계속 덩어리 부피만 키우는 게 부흥인 줄로만 안다.

 

여객선이 항구에서 출항을 할 때 풍랑 파도가 강하게 분다면 손님을 많이 태우는 게 좋으냐, 가급적이면 안 태우는 게 좋은 거냐? 할 수만 있다면 태우지를 말아야 한다. 이치가 그렇다. 이 비유가 교회에 못 들어오게 만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이방 로마나라 강대국을 의지했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마저 ‘우리의 왕은 가이사니이다’ 라고 했다. 오늘날 세상 속화된 인도자들에게 ‘너희 왕이 누구냐?’ 하면 말로는 ‘예수님입니다’ 라고 말할지라도 그러나 설교의 질적인 면, 냄새가 나는 면에서 보면 ‘세상이 나의 왕입니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속에 말이 있는 건데, 말로는 ‘세상이 나의 왕이다’ 라고 할 목사는 없겠지만 그러나 구하는 것이 세상이고, 취미가 세상이고, 추구성이 세상이고, 지향성이 세상이라면 당신의 왕은 로마라고 하는 세상이구나. 그의 말속에서 사상적인 의미에서 그 사람의 신앙은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때처럼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이 이방세상을 의지하면, 로마 강대국을 의지하면 그 신앙은 외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거다. 왜 그러냐? 세상기준은 인간기준, 물질기준,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기준이다. 이건 다 불에 타서 없어지는 현상적인 것인데, 이 현상적인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세워놓으니 그 신앙은 외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거다. 예수님의 재림 때도 교회들이 세상정신으로 흐르게 돼 있다.

 

예수님은 주의(主義)로 말을 하자면 천국복음 내세주의이다.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더라. 하늘나라를 말씀하시더라.’ 이 외에 구국주의, 사회주의, 신비주의, 구복주의, 현세주의, 은둔주의, 초절주의 등 전부는 세상에 속한 사상이다. 늘 말하지만 이게 기독교의 함정들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것들이 함정인 줄을 아느냐? 모른다.

 

노아홍수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고 했다. 이걸 어떤 주석이나 목사는 천사라고도 하는데, 그러나 천사는 아니다. 성경에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곳은 없다.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천사에게 천국을 물려주고 다스리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천사가 천국을 다스리도록 돼 있지를 않다.

 

천사는 영물체로서 현재적으로는 우리보다 나으나 천사는 성장을 할 수 없는 고정적인 인격체이다. 그리고 천국을 상속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성장이요, 이 세상에서 사건 환경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자꾸 닮을 수 있는 거다. 천사는 현재는 우리보다 낫다고 할 수 있으나 궁극에 가서는 우리보다 못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지만 천사는 이게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는 처음부터 만들어지기를 하늘나라의 질로써 만들어 놨다. 왜 그러냐?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살펴보고 나서 하나님께 보고를 하려면 마음대로 하늘나라를 들락날락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천사의 몸이 하늘나라의 신령성과 질이 이질이라면 그 심부름을 못한다.

 

우리가 성경을 깨달으려면 이치의 뜻에 맞아야 한다. 글자만 갖고 이러쿵저러쿵 했다간 큰일 난다. 이렇게 하다가는 이단도 되고 백단도 된다. 늘 말하지만 성경에 어떤 숫자를 말하는 것은 숫자를 목적적으로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숫자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말을 하자니 인간의 용어로 숫자를 빌려서 쓰는 것이다.

 

삼년 반 동안 예언하는 걸 삼년 반이라고 하지를 않고 삼년 반의 날짜와 같은 1,260일로 말을 한 것은 ‘날마다 날마다’ 이게 들어있다. 3년 반이나 마흔 두 달이나 같은 기간인데, 마귀가 이 기간 동안에 시험을 친다도 할 때 ‘마흔 두 달’ 시험을 친다고 하는 것보다 ‘삼년 반’ 시험을 친다고 할 때가 마귀의 수법이 더 있을 것 같다. 1,260일도 3년 반이지만 ‘1,260일’ 하게 되면 날마다 말마다 선지자의 말씀을 계속 듣고 깨닫는다는 면에서 마귀의 시험을 더 빨리 눈치를 챌 수가 있다는 의미가 들어간다.

 

그런데 마흔 두 달 시험을 친다고 하게 되면 이 마귀가 그 마흔 두 달의 기간 동안에 한 달 동안은 조용히 있다가 또 한 달 동안은 소나기를 퍼붓듯이 달려들었다가, 또 조용해졌다가 이렇게 한다면 교인들 입장에서 어떻게 느껴질까? 전쟁이 일어났다가 조용해지면 ‘아, 원수들이 죽었나보다’ 하며 자아도취로 스스로 위안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마음이 그렇게 돌아가는 의미가 그렇게 말을 하는 안에 깔려 있는 거다.

 

자기가 건강했을 때는 하나님의 뜻에 콧방귀를 뀌다가 몸이 아프면 ‘아이고’ 하며 하나님을 찾고 한다. 그러다가 의사의 손길로 낫던 저절로 낫건 병이 나았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들어갈까? 안 아팠을 때보다 그 마음이 어떻게 들어갈까?

 

예수님의 재림 때도 교회들이 세상정신으로 흐른다. 교회란 결국 교인 자기다. 그러니까 말세인 오늘날 이 시대에 자기가 어떤 정신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으며,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의 질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빨리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시간이 없다 그 말이다.

 

노아홍수 때에 노아의 아들들 외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세상으로 흘렀다. 오늘날도 그 때처럼 세상으로 흐르는 교회가 세상을 붙잡고 세상과 놀아나고 있다. 물질을 붙잡고 물질과 놀아난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처럼 교회가 물질과 놀아나니 예배당을 짓는다고 하면 은행에서 대출이 잘 된다. 왜 그럴까?

 

그런가 하면 국가의 정책에 따라 대출을 억제하거나 회수하는 일도 있다. 그래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예배당을 짓다가 한동안 공사를 중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면 그 돈을 어디서 끌어오느냐? 교인들의 집을 전당잡히고 해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 목사의 골이 터진다. 생각을 해 봐라. 그 이자만 해도 얼마냐? 또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지칠 대로 지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교인들이 다 도망가게 된다. 교인들이 도망을 가면 예배당 건축을 시작할 때 그 교회의 장로나 집사들이 대출서류에 도장을 찍었으니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된다. 이런 꼴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그런 걸 보기 좋다고 하겠느냐?

 

결국 교인들로부터 돈이 안 나오면 목사가 하나님의 심판자리에 서서 명령이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은 지키라고 한다. 성경구절에 있는 데로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귀의 수법은 성경구절을 갖고 와서 쓴다. 거짓 종들은 성경구절을 갖고 와서 쓰는 거다. 참 종은 성경구절 그대로 쓰지 않고 그 속의 하나님의 뜻을 끄집어내서 ‘너에게 대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렇다’ 한다. 목사부터 발견을 해야 한다.

 

늘 말하지만 100마리 양 중에 한 마리가 없어졌는데, 목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온전과 완전이라는 의미를 모르면, ‘100’ 하는 그 의미성을 모르면 딴 말을 하게 된다. 꼭 100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돈을 셀 때 98, 99 하고 그 돈뭉치를 묶는 사람은 없다. 100 하고 나서야 그 돈뭉치를 묶는다. 이건 ‘이제 됐다’ 하는 의미다. 그런 것처럼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은 고차원의 신앙에서의 부족성을 말해주는 거다. 이걸 알아야 만이 양 99마리를 산꼭대기 올려놓을 수 있는 거다.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양을 높은 산에 올려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양을 높은 산 위에 올려놓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간다면 그 아흔 아홉 마리의 앙들은 다 짐승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그러나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의 차원으로 보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간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아흔 아홉 마리를 차원 높은 곳에 올려놓아야 만이 그 다음에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가 있는 거다. 성도들의 신앙의 차원을 고차원적 자리로, 하나님의 성품적 자리로 올려놓지 못한 채 한 마리를 찾으러 갔다가는 99마리를 다 놓친다. 그런데 세상목사는 이걸 어디에 붙여서 써먹느냐? 전도해서 교회에 끌어넣으라고 한다.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신자도 할 수 있는 소리다. 그러나 성경의 뜻은 그런 게 아니다.

 

노아홍수 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이 세상으로 흘렀다. 세상 누림성으로 시집장가 가고 먹고 마시고 했다. 천국 쪽으로는 들어가 있지를 않고 세상 누림성으로 들어가 있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면 그 때에 노아의 세 아들은 장가를 안 갔느냐? 갔다. 그런데 노아의 아들들이 장가를 가는 것은 믿음의 방주를 짓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처녀총각들의 시집장가 가는 사상이 바로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 사상이 어디로 가느냐? 주님을 잘 믿기 위해서 시집장가 가고, 주님의 집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의 구원사업을 잘 이루기 위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해야 한다. 그런 사상이 없으면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한 인간기준으로 좇아가게 돼 있다.

 

오늘날 특히 여자들이 옷 입는 게 성경의 신앙사상으로 보면 성령님께서 떠난 것을 본다. 이게 다 롯의 때와 소돔 고모라 때를 말하고, 노아홍수 때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을 취한 것을 보여준다. 육신적으로도 말을 하는 거지만 신앙 사상적으로 세상화를 말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성령은 떠나더라. 하나님의 신은 떠났다. 그러니까 이걸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아, 이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가 떠났구나.’ 그렇다면 악령의 역사다. 그런데 이걸 모른다. 불어만 나면 성령이 역사라고 하지 사람이 하나님의 성분과 성격 성질로 성장되는 게 성령님의 역사인데 그 면은 모르는 거고, 안 보이는 거다.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격 면에서 성장을 해야 그 사람이 고상한 건데 나이를 많이 먹어도 인격성장이 안 된 사람이 있다. 그러면 우리가 볼 때 이상하게 보인다. 신앙적인 면에서 구별을 잘 해야 한다. 지금은 해는 떴어도 밤이다.

 

롯은 소돔 고모라에서 주인노릇을 하려고 했다. 소돔 고모라는 불탈 곳인데, 불타질 그곳에서 주인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와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이 성은 망한다, 불에 탄다’ 해도 쉽게 나가지지를 않는다. 탈출이 쉽게 안 된다. 꼬리가 길다. 뭐가 달린 게 많다. 사상적으로 그게 안 끊어진다.

 

‘불이 내려와서 이 성이 망한다’ 하면 홀몸으로라도 얼른 삼촌 아브라함이 있는 쪽으로 가야지. 우리 같으면 그럴 것 같은데 롯은 그게 아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사상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천막 하나 갖고 양떼를 이끌고 헤브론 골짜기를 다니면서 네 본토 일가 친척집을 마음속에서 자꾸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신앙사상은 첫 날 받은 그 생명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자꾸 떠나는 거다. 아브라함이 사는 게 곧, 떠나는 거다. 살면서 떠나고 있고. 그러니까 이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게 참 쉽다. 그런데 롯은 힘들다. 왜냐? ‘떠나라’ 하면 ‘이 아파트는 팔고 떠나야지요’ 하고 있으니 그렇다.

 

이런 역사적 거울들은 세상 마지막 때의 신앙이 밤이 깊은 신앙, 잠자는 신앙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잠자는 신앙은 구별이 안 된다. ‘세상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 했다. ‘믿는 사람을 보겠느냐’가 아니라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은 많은데 본질에 속한 적중성의 신앙을 못 보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 본질인 진리생명의 신앙의 말씀을 가지고 깨어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 그렇게만 보지 말고 깨어있는 신앙이 몇 명이나 될까? 모든 것을 구별 분별하는 이게 깨어있는 신앙인데, 이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 모두 나도 깨어있는 사람 중에 끼어있을까, 아니면 잠자는 신앙 중에서 나도 자고 있을까? 신앙의 질을 보면 자기 신앙이 깨어있는지, 잠자고 있는지 금방 드러난다.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면 자기가 깨어있는 신앙인지, 자고 있는 신앙인지를 모른다.

 

목사님들이 교인들을 볼 때 잠자는 신앙, 조는 신앙으로 보이는데 목사 자기의 신앙은 왜 잠자고 있고 졸고 있는 신앙으로는 안 보일까? 왜 그걸 모를까? 목사라고 다 옳은 게 아니다. 목사도 잠자는 신앙도 있고, 거짓 종도 있고, 이단자도 있다. 그런데 왜 모르느냐?

 

어떤 물건이 가벼운지 무거운지 어림잡으면 그게 정확하냐? 뭐가 있어야 정확한 거냐? 저울이 있어야 한다. 긴지 짧은지 이거는 잣대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신앙에도 정확한 기준 척도가 있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적중성이다. 거기에서 나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적인 신앙을 모른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적중의 신앙을 모르는 거다. 말씀 속에서 이게 발견이 안 되는데 기도를 하면 아는 거냐? 모르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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